야채죽 만들기

  1. 다시마, 멸치, 버섯으로 육수를 낸다.
  2. 들기름을 넉넉히 쳐서 야채 (양파, 호박, 당근)을 올려 볶다가 30분 동안 뿔린 쌀을 넣고 투명해 질때까지 볶는다.
  3. 육수를 넣고 팔팔 끓여주고 약불에서 20분정도 더 끓이 다가 걸죽해지면 새우젓 (1/2 TSP) 을 넣는다.
  4. 김, 깨등을 솔솔 넣어준다.

직원 수양회의 오류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회사에서 직원 수양회를 매년마다 시작하게 되었다. 첫 두해 정도 참석하고는 수양회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조다단이 무슨 큰 변화에 대한 뉴스를 듣기위해서라도 참석해 달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주제들은 특권, 문화적 겸손등 근본적으로 어용과 관용을 최고 가치관으로 두는 주제들.  어떻게 보면 서로들의 차이점이라는 것을 다 무너뜨리기위한 노력이다. 영락없이 사업분야에서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들과의 이해관계를 높이기 위해 오래동안 개발된 것들의 도입에 불과한 것들. 이런 가치관이 중요하다 생각되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다들 소비자들의 정신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과반수의 준비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며 소수민족이나 소수파의 억압이란 사상적 관점에서 세계관을 개발시키고 자신들의 사상을 팔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자연적 현상으로도 보겠지만 10억의 환자들을 위한 단체로 만들자는 목표을 주시하면 왜 이런 것들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 알수 있다.  이런 단체는 실패하게 되있다. 큰 목적을 두고서 어떻게 목적을 이루자는 주제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의 다른점을 부각시키면서 벽을 낮추자는 이상한 방법과 주제를 가지고 와서 서로 편안 한 공간을 만들자는데에 핵심적인 목적이있다. 혼자이면서도 편하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더불어 같이 공유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것이다.  불편함을 기본으로 삼고 목적지향적인 사고로 앞으로 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단체들의 기본적 성공비법이다. 그런데 지금 무슨 단체 문화 상의자를 도입해 이상한 짓거리만 한것이 4년째.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은 서로 서로 다른 점들을 다 평등화 시켜 다들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다른 점속에서 흘러나오는 강점들이 서로 서로 융합해 모여 앞으로 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되어 나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봤을때는 자신이 중심적으로 강하게 가지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믿음같은 곳에서 부터 힘든 것들을 극복하는 힘을 얻어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서의 자신의 현실 파악이며 절대적 믿음이며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능력이다.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남의 감정이 상할까봐 말을 못하게 만드는 단체문화를 만들어 개개인의 강점이 숨겨져가게 되있다. 서로 맞지않아도 언성이 높아지고 모임이 험악한 분위기라도 할말을 하며 개개인의 강점이 나와서 그것이 용납되고 감정과 무관하게 융합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지금 조성되는 분위기는 그냥 다들 서로 서로 조심해 주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이런 병신같은 분위기에서 무슨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단체가 되겠는가?  그냥 이력서만 위대해 보이는 거짓 전문가들이 들어와 전에 기민히 만들어졌던 팀들을 다 붕괴시키고 자신들의 업적세우기에 전념하고 있는 상황. 거짓이 난무하고 있고 큰 돈을 준다고 하면 간도 빼주고 있는 상태이다. 4년째 계속 이런 골빠진 소리들만 늘어내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냥 지내들 하고 싶은대로 모든 결정을 하고 있다. 그들에겐 어떤 근본이 되는 도덕적 이해란 빨리 붕괴될 수록 좋고 그럴수록 바른 말하는 사람들이 없고 세뇌교육을 통해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질문하게 만드는 분위기로 조성한다. 그 전 10년의 발전에 비해 4년째 계속되는 지금의 변화는 무슨 실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몇몇 교부금 작가들의 작업으로 들어오는 수입으로 회사가 돌아가고 있다. 어떤 실적과 전혀 무관한 등치만 큰 마케팅 회사로 변해있다. 큰 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일어나는 현상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원하는 단체 문화가 이런 것이겠다 싶다.  자신들의 무능력에 입닥쳐줄 수 있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되고 중요한 결정과는 무관한 “단체 문화적 만들기”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는 미치광이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만 서로 의논하게 하면서 단체는 추진력을 잃어가며 이상짓만 하게 해서 낭비와 낭비의 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병든 기업화 만들기의 제일 큰 힘을 쓰고 있다. 지금부터 5년 안으로 자체적으로 맥이 빠져 붕괴 단계로 가 있을것이다.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이제 출구전략을 세워나가기 시작해야 겠다.

고려인 3세의 고백: 한국은 고향같아요

“Когда я приезжаю в Корею, я чувствую, что вернулся домой.” (한국을 방문하면 고향에 온 것 같아요.)

사할린 (Сахалин, Sakhalin) 한인 동포 3세.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러시아인으로 엔지니어 일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가면 고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집에서 먹는 것도 한국인과 같이 밥과 간단한 반찬으로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할린 고려인 3세.

나는 미국이란 타국에서 수십년동안 한인 2세들을 대하면서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한인 후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마음 중심에 깊은 우물과 같이 자리 잡아버렸다. 물방울 하나 하나 뚝뚝 떨어지듯이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만 남은 여생 끝나기 전에 완성할려면 더 박차를 가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지역주의
  2. 미국을 보는 관점
  3.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4. 북한을 보는 관점
  5.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6.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무속신앙
  2. 유교
  3. 불교
  4.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직장에서도 이런 거짓을 자주 보는데 그 때부터는 그 당사자가 쓰레기처럼 보이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烏合之卒

목적 상실에 자신의 분수도 모르면서 옹졸한 자존심만 쌔서 거만하기 짝이 없어 나이값도 몸 값도 못하는 주제파악, 현실과 자신의 감정까지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려고 하는 모임. 이런 사람들은 사실 새운 목적을 같이 달성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빠질 수 있고 덜 일할 수 있는지를 위한 모임인 것 같다. 다음과 같은 형태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 모임 첫 머리에 큰 소리로 자신은 무엇 무엇을 어떤 이유로 안하겠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사람.
  • 일년동안 직무유기를 행하면서 정작 일한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만을 언급하는 사람.
  • 과거 오래전에 자신이 잘 한것을 살짝 언급하면서 자신을 부추켜 올리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사실도 아닌 것을 마치 사실처럼 단정해 말해 주위 사람들을 벙찌게 만드는 사람.
  • 현실과 무관하게 얄팍한 지식과 잘못된 의견을 믿고 단정지어 다른 이를 위한 답시고 말하는 사람.
  • 자신이 맡은 일을 무책임한 유치원 어린아이처럼 팽겨쳐 놓고서 무슨 자격으로 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지 의문이 가는 사람.
  • 다른 사람이 자신한테 무슨일을 시키는 것 같으면 자신이 시다바리냐고 반응하는 정신이상자.
  • 앞에 있는 짓을 하는 사람옆에서 같이 북쳐주고 장구쳐주는 사람.

이런 무리들의 인도자를 자신들이 돈주고 고용했다는라고 생각하면 친절하게 개무시해버린다.

진실이 죽고, 양심이 죽었을까?  단순히 성격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참석원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목사)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5-7

がまん (我慢) 日本人의 忍耐

한국사람으로 태어나 일본이란 상당한 존재성을 의미한다. 증오의 대상이되기도 하면서 조용히 존경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되기도 한다. 1970년대 태어난 나에게는 만화를 통해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고등학교에서 일어를 공부하면서 그 후에는 일부러 더 노력하지 않아도 한국인들은 일본을 뉴스를 통해 그리고 여러 다방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알버커키에 와서 검도를 시작해 이제 8년되었다. 일본식 검도이지만 정작 가르치는 사범은 여기 본토배기 나바호 인디언의 자손이다. 그가 과거에 일본을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40여년 동안 검도를 배우며 여기서도 검도르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70세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다. 그러나, 검도를 하면서 가끔식 검도세미나나 대회또는 심사를 통해 다른 제미일본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가끔식은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한국사람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배운다. 캘리포니아에서 타오스에 오셔서 방문해 가르치셨던 시카이 선생과 몇몇 검사들과 같이 저녁을 하며 많은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나왔던 주제를 가지고 시작해 볼까 한다.

がまん

한문은 한국어로 아만이라고 읽는다. 일본문화의 하나의 토대가 되는 선불교에서 나온 단어다. 원뜻은 사실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을 높여 남을 낮게 본다라는 뜻. 한층 더 깊이들어가면 자신을 높이여기는 어떤 자존심에 의존해 그 어떤 것도 견딘다는 뜻에 가깝지 않을 까 한다. 아무튼, 원래 현시대의 사용은 일본 섬나라에서 시작한 단어가 아니고 미국에서 사는 일본인들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2차대전 중 강제로 억류된 일본계 미국인들이 쓰기 시작한 단어. 그리고 다시 단어를 널리 기억나게 한 것이 바로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사건이다. 바로 인간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을 견디어 내는 인내를 뜻하는 것이 바로 이 단어인것이다.

그러나, 단어가 최근의 유래가 되었다 해서 일본인들에게 새로 생긴 인내가 아니다. 그들의 문화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을 그냥 불교에서 단어를 빌려 쓰는 격이다. 그들의 문화는 사실 오랜 과거의 향기를 품기며 현시대의 꿈꾸는 문화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외부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해 매우 빨리 현대화되었고 역사의 휘오리바람속에서 과거와의 맥이 끝어진 느낌이 강한 문화로 변해있다. 그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역사공부운동이 퍼지고 다시 정리를 하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맥이 끊어졌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천황의 명령으로 인해 현대화가 되었고 그 천황의 엄청난 역사적 유산은 지금 상징적으로 그 후손으로 살아 숨쉬며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힘든 것들을 불평없이 조용히 견디어 내는 것을 뜻한다. 2011년에도 그들이 소리내어 펑펑 울지 않았던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에 온 세상사람들이 혀를 차며 칭찬해 했던 것이 아닌가. 그들은 과거의 가치관을 뼈속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시카이 사범도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매우 힘들었을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도 힘든 속마음을 보이지 않으며 아내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기가 지나고 나서 열매를 맛보는 인생의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가정사를 엿들으며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펑펑 터뜨리고 문을 쾅 닺고 상을 엎어버리고 쓰고 던져지는 휴지처럼 신앙을 버리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쉽게 화을 토해내버리는 한국인들. 그에 비해 많은 일본인들은 여자나 남자나 할 것없이 마치 무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 처럼 이런 인내하는 면에서 일관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들을 알면서 주위에 보이는 한국인들을 보면 챙피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불교적인 고난의 행군을 걷는 삶을 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둡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속에 기쁨을 발사할 수 있지 않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인내 쯤이야 식운 죽 먹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가 고난속에서 웃으며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Preparing an oatmeal breakfast

  1. Boil a cup (or little more) water to bubble (ratio: 1:2 oats-to-liquid). I usually use a cup of water with a half cup of oatmeal.
  2. Add a bowl of rolled raw oatmeal and bring the heat down to LOW for simmering.
    1. Add a pinch of salt and other POWDERED spices
    2. Wait 5 minutes (swirl every minute ir so with a wooden spoon so they don’t stick to the bottom) – time can vary depending on your heat and the size of the pot
  3. Serve it in your favorite bowl
  4. Add your poison mix, milk, and toppings. Just don’t over do anything.
  5. Enjoy

Notes to have it stay healthy:

  • A half-cup of oatmeal is considered to be 1 serving (150 cal)
  • Instead of sugar or honey, try  cinnamon, (unsweetened) cocoa powder, or vanilla extract
  • Use fresh or frozen fruit rather than dried fruit (they have more calories)
  • Don’t overdo sweets or nuts

Some recommendations for topping:

  • Apples, raspberries, blackberries, blueberries
  • Walnuts, pecans
  • Kimchi (probiotics!)
  • Fried or boiled egg (protein!)

잠깐의 비

멀리서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지붕에 다다닥거리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함을 풀어줄까해서 입고 입던 짧은 바지를 벗고 속옷만 입고 뒷 마당에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비 구름이었을 뿐.

마음을 후련하게 씻어 줄 소낙비는 온데 간데 없고 그냥 보슬 보슬 내리는 비였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어도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은 또렸하게 보였습니다.

잠깐 지나가던 작은 비구름을 원망할까

얼른 바지를 다시 입고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놓지 말아야 할 규칙

일하면서 수업을 드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그런데 오랫동안 수업을 들지 않다가 일하면서 들어보니 과연 쉬운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서라는 핑계는 이제 진부하다. 그냥 보통때 그 만큼 공부를 하지 않는 생활의 휴유증일 뿐. 이제 자꾸 나이들어서 이렇다 저렇다란 표현은 피해야겠다.

다행이 수업시간은 허락을 받고 다녀서 걱정없이 수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회사 일을 했다. 그리고 회사일이 끝나면 곧 바로 숙제와 공부로 이어져 보통 12시, 어느땐 새벽 2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했었다.

수년동안 지켜온 새벽기도회 참석과 수영은 못하게 되었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자면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곤욕스럽다. 전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그렇게 힘든 적이 없었다. 계속 앉아만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배도 더 나오고 체중도 더 오르게 되었다.  놓지 말아야 할 규칙을 놓아버려서 받는 징벌같은 느낌까지 든다. 이제 원상복구하기도 힘들다. 다시 한걸음씩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