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serving blindspots

Every organization reflects the values and the beliefs of its leader and constituents. And it’s not difficult to observe a gamut of characteristics that flow out of how the organization is run. The best perspective can be gained from inside, of course, regardless how it is viewed from outside. The net effect of an organization and the glow around it is usually not reflected internally. Depending on the purpose of an organization, the externality of net effect of the organization may be of the greater importance than the experience of what is going on internally. However, all organizations concern themselves heavily with the internal experiences of its constituents, especially those with authority and power.

The ideal, Platonic image of a philosopher king may strike as quaint for many, but the health of an organization often depends on it. It seems that the human tendency, unbeknownst to himself, is to set up a multidimensional framework of environment that best serves himself.  Acton’s dictum reminds us that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and we see the effects ubiquitously. With authority, power, and influence is typically taken for granted in a handed-down framework, and constituents become somewhat of a captive audience with assumed roles. In many small scale, we see this playing out in cult groups, and there’s only a paper-thin difference when compared to socially accepted organizations. With the right elemental factors, the organization can sustain itself for a long period of time while remaining remarkably ineffective. In this reality, we often trust our leaders, mere human being, with a great risk.  Integrity is often cited, but not practiced.  Integrity comes with a heavy responsibility that should test the limits of internal conflicts we experience as human beings, but not many individuals are built to withstand such awesome struggle without a sense of abandonment of self.  Without such tension at a highly private mental and spiritual space of leaders, we often get cheap imitations that behind a veil of public image turn out to be self-serving individuals to thrive. This is a sad reality of society we live in, and even though we have few examples in history such as Byzantine empire that groomed royal retainers, the modern society has completely abandoned such ideals to allow untamed, and uncultivated anima in the laissez-faire genius of Enlightenment.

安時: 2018年 2月 1日 (木)

2/1/2018 (목)
행 5:12-26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되지만 시기하던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오게 하고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사도들은 순종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그 들을 잡을려고 하지만 따르는 무리가 많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사도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고 예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원래 사두개파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에 큰 비중을 두어 성전의 제사장의 역활을 신앙의 중점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라 정신적으로 성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더 말씀에 충실할려고 했던 이들이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정 반대편에 앉아 심지어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죽였던 사람들. 그들은 복음의 사자들을 옥에 가두고 기회가 있었으면 죽이기까지 했을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알아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바르고 진실된 것을 보이실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다.  영어로는 teachability.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고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말씀에 대한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배우고 순종의 길을 걷기를 아에 생각조차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알고 거기서 그치는 것도 문제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담대함은 더 곤란한 입장이다. 그냥 책을 읽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마음의 문을 닫아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면 나와 자신이 편히 살고 있는데 왜 와서 방해하는 냐란 태도를 취할 사람들이다. 이런 것을  두고 강퍅하다라고 한어로 표현한다. 강퍅한 마음. 하나님이 사도들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동시에 이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나의 마음은 강퍅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진리가 나를 변화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주여, 너무나도 쉽게 강퍅하게 변하는 마음의 주의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여주시고 뜨겁게 하여 나의 토기장이 되시는 주께서 나를 주가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 될 수 있게 빚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온도의 차이

100여년의 저온도를 기록했다던 한국의 겨울. 가만히 있어도 맨살이 시릴만큼 추웠나 보다. 그러나 여기는 눈 한번 오지 않고 도리어 가을의 선선한 느낌이나서 아직 입동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밤의 온도가 보통때 보다 낮아 춥다란 느낌이 든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방에 있는 휴대용 난방기를 틀어서 따스함 가운데 포근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남쪽에 있는 직역이라서 그런지 대채적으로 아직까지는 따뜻하다. 추우면 체온의 유지를 위해 더 두꺼운 옷을 끼워입고 따뜻하면 그럴 필요없이 편하고 얇은 옷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것이다.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마치 휴대용 난방기처럼 주위 환경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 바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의 기질의 차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40여년 삶을 살면서 경험했던 독특히 따뜻했던 사람들이 있다. 기질의 열이 아니었다. 성격도 아니었다. 시카고에 있는 무디 신학교를 다닐 때 알고 지냈던 이 전도사님이란 사람이 그 독특했던 사람이다.
 
나보다는 몇 살 위셨지만 항상 예절을 지켜 대해 주셨고 만나면 항상 이상하게 과분한것 같은데 과하지 않는 기쁨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학교에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언급만 나와도 환하게 미소를 지게하는 인물이었다. 이 전도사님을 만나면 일단 상대를 진정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 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 만나면 마치 오랬동안 멀리 지내다가 다시 만난 친구처럼 그는 깊은 친근감으로 접근해 가까이 와서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실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는 이런 태도는 당연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儒敎的으로 엄격한 어른들의 무언이 가득했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생소하다 못해 과잉반응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전도사님은 이런 사람을 향한 태도를 매일 뜨는 태양처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나는 무척 궁금했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현실에서 만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와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했었다. 그 온기의 비밀은 다름아닌 은혜앞의 겸손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집에 오면 반겨주는 강아지를 보라. 주인의 과거를 따지거나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집개는 집사람을 마치 재일 사랑하는 사람처럼 반겨준다. 집에 올때 그렇게 반김을 받을 때 얼마나 기쁘고 기분이 좋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이 타인을 집개처럼 반겨주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전도사님은 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라고 일부러 그렇게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사람들을 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 성격은 내성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자신을 개 만큼 낮추었던 이 전도사님이었다. 그렇다. 버려진 개보다도 못한 우리를 구원해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인데 아무데다가도 쓸대없고 구차한 인간적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그리스도의 촛대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찬 바람 쌩쌩끌어오는 냉장고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 전도사님의 따스함은 분명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 같아 더 그립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죄인 중에 괴수

현대인들은 번뇌가 많다. 관계에서나 자신이 무엇이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이다. 여기서 해방은 쉽다. 자신이 최악이며 자신 보다 더 상태가 나쁜이가 없다고 알고 인정하면 된다. 儒家의 中樞되는 가르침은 인간성의 회복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아실현을 위한 자아과민증에 취약하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거룩함에만 집중하면 비슷한 병에 빠지는 것 같다. 무모하게 십자가 보혈의 은혜앞에 자신을 맡겨 버릴 수 있어야 해방된다. 자신은 없어지고 십자가 앞에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하고 순수한 경배를 드리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b

烏合之卒

목적 상실에 자신의 분수도 모르면서 옹졸한 자존심만 쌔서 거만하기 짝이 없어 나이값도 몸 값도 못하는 주제파악, 현실과 자신의 감정까지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려고 하는 모임. 이런 사람들은 사실 새운 목적을 같이 달성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빠질 수 있고 덜 일할 수 있는지를 위한 모임인 것 같다. 다음과 같은 형태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 모임 첫 머리에 큰 소리로 자신은 무엇 무엇을 어떤 이유로 안하겠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사람.
  • 일년동안 직무유기를 행하면서 정작 일한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만을 언급하는 사람.
  • 과거 오래전에 자신이 잘 한것을 살짝 언급하면서 자신을 부추켜 올리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사실도 아닌 것을 마치 사실처럼 단정해 말해 주위 사람들을 벙찌게 만드는 사람.
  • 현실과 무관하게 얄팍한 지식과 잘못된 의견을 믿고 단정지어 다른 이를 위한 답시고 말하는 사람.
  • 자신이 맡은 일을 무책임한 유치원 어린아이처럼 팽겨쳐 놓고서 무슨 자격으로 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지 의문이 가는 사람.
  • 다른 사람이 자신한테 무슨일을 시키는 것 같으면 자신이 시다바리냐고 반응하는 정신이상자.
  • 앞에 있는 짓을 하는 사람옆에서 같이 북쳐주고 장구쳐주는 사람.

이런 무리들의 인도자를 자신들이 돈주고 고용했다는라고 생각하면 친절하게 개무시해버린다.

진실이 죽고, 양심이 죽었을까?  단순히 성격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참석원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목사)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5-7

비겁한 和의 문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라는 말은 성경에서도 나온다 (롬 12:18). 특히 같은 교인끼리는 더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는 매우 많이 나온다. 화목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미덕이다. 그러나 화목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은 아니다. 진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예수를 잘못할 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아픔을 겪으면서 까지도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대 화목을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특히 삶이 더 풍요로와진 요즈음엔 더 그렇다. 진리는 뒷 자석에 앉혔다.

예수가 어떻게 和목하게 돈 바꾸는 이들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덕과 인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푸덤직한 웃음을 얼굴에 띄고 털털한 마음으로 “다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며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측은히 여기실꺼야” 하며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며 나름 고난위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사장들과 협조와 돈 바꾸는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뤄내었을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和 문화적으로 그린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되풀이 돼는 고전부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들리면서 상대의 기분만을 위해 상황을 모면하는 비겁한 문화이다. 그래서 대화 방법도 윗 사람의 기분을 위한 것으로 상단한 발전이 돼어 있고 일본 같이 和를 신격화 시키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공공 장소에서 지켜본적이 있는가? 돌팔매질 안받으면 다행이다. 너 혼자만의 생각을 왜 남에게 억지로 파느냐 부터 시작해서 비논리적인 언론의 자유까지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앞에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와서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지킬 필요까지 있냐? 도리어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 등까지 예수라는 이름에 증오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 많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더 지혜롭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를 전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밟혀도 사람들끼리 화목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욕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리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런한 비겁한 문화 때문에 일제시대에서도 목숨이 아깝지 않았던 극소수의 예수쟁이들만 빼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다 일본 천황의 신전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예수 귀한 그 이름 이란 찬양을 한번이라도 불렀다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면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和를 도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타협할 수 있는 비겁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신앙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禍를 입게된다.

がまん (我慢) 日本人의 忍耐

한국사람으로 태어나 일본이란 상당한 존재성을 의미한다. 증오의 대상이되기도 하면서 조용히 존경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되기도 한다. 1970년대 태어난 나에게는 만화를 통해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고등학교에서 일어를 공부하면서 그 후에는 일부러 더 노력하지 않아도 한국인들은 일본을 뉴스를 통해 그리고 여러 다방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알버커키에 와서 검도를 시작해 이제 8년되었다. 일본식 검도이지만 정작 가르치는 사범은 여기 본토배기 나바호 인디언의 자손이다. 그가 과거에 일본을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40여년 동안 검도를 배우며 여기서도 검도르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70세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다. 그러나, 검도를 하면서 가끔식 검도세미나나 대회또는 심사를 통해 다른 제미일본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가끔식은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한국사람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배운다. 캘리포니아에서 타오스에 오셔서 방문해 가르치셨던 시카이 선생과 몇몇 검사들과 같이 저녁을 하며 많은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나왔던 주제를 가지고 시작해 볼까 한다.

がまん

한문은 한국어로 아만이라고 읽는다. 일본문화의 하나의 토대가 되는 선불교에서 나온 단어다. 원뜻은 사실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을 높여 남을 낮게 본다라는 뜻. 한층 더 깊이들어가면 자신을 높이여기는 어떤 자존심에 의존해 그 어떤 것도 견딘다는 뜻에 가깝지 않을 까 한다. 아무튼, 원래 현시대의 사용은 일본 섬나라에서 시작한 단어가 아니고 미국에서 사는 일본인들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2차대전 중 강제로 억류된 일본계 미국인들이 쓰기 시작한 단어. 그리고 다시 단어를 널리 기억나게 한 것이 바로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사건이다. 바로 인간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을 견디어 내는 인내를 뜻하는 것이 바로 이 단어인것이다.

그러나, 단어가 최근의 유래가 되었다 해서 일본인들에게 새로 생긴 인내가 아니다. 그들의 문화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을 그냥 불교에서 단어를 빌려 쓰는 격이다. 그들의 문화는 사실 오랜 과거의 향기를 품기며 현시대의 꿈꾸는 문화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외부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해 매우 빨리 현대화되었고 역사의 휘오리바람속에서 과거와의 맥이 끝어진 느낌이 강한 문화로 변해있다. 그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역사공부운동이 퍼지고 다시 정리를 하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맥이 끊어졌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천황의 명령으로 인해 현대화가 되었고 그 천황의 엄청난 역사적 유산은 지금 상징적으로 그 후손으로 살아 숨쉬며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힘든 것들을 불평없이 조용히 견디어 내는 것을 뜻한다. 2011년에도 그들이 소리내어 펑펑 울지 않았던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에 온 세상사람들이 혀를 차며 칭찬해 했던 것이 아닌가. 그들은 과거의 가치관을 뼈속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시카이 사범도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매우 힘들었을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도 힘든 속마음을 보이지 않으며 아내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기가 지나고 나서 열매를 맛보는 인생의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가정사를 엿들으며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펑펑 터뜨리고 문을 쾅 닺고 상을 엎어버리고 쓰고 던져지는 휴지처럼 신앙을 버리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쉽게 화을 토해내버리는 한국인들. 그에 비해 많은 일본인들은 여자나 남자나 할 것없이 마치 무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 처럼 이런 인내하는 면에서 일관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들을 알면서 주위에 보이는 한국인들을 보면 챙피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불교적인 고난의 행군을 걷는 삶을 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둡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속에 기쁨을 발사할 수 있지 않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인내 쯤이야 식운 죽 먹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가 고난속에서 웃으며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Preparing an oatmeal breakfast

  1. Boil a cup (or little more) water to bubble (ratio: 1:2 oats-to-liquid). I usually use a cup of water with a half cup of oatmeal.
  2. Add a bowl of rolled raw oatmeal and bring the heat down to LOW for simmering.
    1. Add a pinch of salt and other powdered spices
    2. Wait 5 minutes (swirl every minute or so with a wooden spoon so they don’t stick to the bottom) – time can vary depending on your heat and the size of the pot
  3. Serve it in your favorite bowl
  4. Add your poison mix, milk, and toppings. Just don’t over do anything.
  5. Enjoy

Notes to have it stay healthy:

  • A half-cup of oatmeal is considered to be 1 serving (150 cal)
  • Instead of sugar or honey, try  cinnamon, (unsweetened) cocoa powder, or vanilla extract
  • Use fresh or frozen fruit rather than dried fruit (they have more calories)
  • Don’t overdo sweets or nuts

Some recommendations for topping:

  • Apples, raspberries, blackberries, blueberries, banana
  • Walnuts, pecans
  • Kimchi (probiotics!)
  • Fried or boiled egg (pro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