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소중함

오늘 뉴욕타임즈에서 Sestan 의 두뇌 연구에 대한 글을 읽고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몇년 전에는 MIT Technology Review 에서 Doudna의 CRISPR 유전자 편집, 그리고 현재 진행형으로 매우 급격히 그리고 조용히 적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의 생활화. Sestan 장기관류장치의 발전을 통해 돼지의 두뇌를 신체밖에서 계속 살리는데 성공했고, Doudna는 CRISPR이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완벽한 수준으로 올리었고 컴퓨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의 발전은 다음 몇년 안에 실용화 될 수 있는 양자 컴퓨터(quantum computer)와 같이 합하여 적용되면 (적확히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것 또한 연구 분야이지만) 어떤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는지 인간의 상상력이 한계란 말까지 나올 수 있는 시대가 지금 사는 이 시대이다. 이러한 것들이 학구적으로는 쉽게 외면당하는 철학부 같은 곳에서만 논의되고 있고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운명의 종착역에 다다른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니엘서 12장에 마지막때에는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라고 두가지의 요소를 따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 아닐까란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꼭 물리적으로 왕래를 하지 않아도 정보의 왕래로 지식의 유포와 공유가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공유의 속도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지식의 분량을 상당히 넓히는 효과를 초래하고 정보의 분산효과를 잘 활용하는 분야에서는 또렸한 의지와 지원만 있으면 상당히 빠른 인적 넷트워크 형성과 팀구성으로 은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바벨탑 올리기는 누워서 떡먹기가 된다. 지금은 인간 두뇌와 유전자 편집같은 의학기술들에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진지하게 바른 세상관으로 바라봐야 할때인것이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만드신 영적인 존재인것이다. 그러나, 두뇌 연구분야에 있어서는 인간의 두뇌는 인간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인 原物(원물)로 보는 것이 定說(정설)이고 지금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의식을 나름 과학적으로 정리하는데 혼신을 다하며 대중에게 제일 잘 팔리는 책으로도 쓰이고 있는 중이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하더라도 믿지도 않을 뿐더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어떤 침묵의 규정으로 둔 과학계에서는 무신론적인 입장이다기보다는 의식세계를 감싸고 있는 영적세계의 언급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불가지론적(不可知論者)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죽은 사람의 두뇌만을 다시 소생시켜 살린다면 마치 나사렛처럼 다시 부활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힘으로가 아닌 의학의 힘으로 부활된 사람인것인가? 사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최근에 이미 어느 중국 의학계에서 인간의 머리를 다른 몸에 붙여 실험을 한 사례가 있었다. 물론 두뇌 세포가 부패되기 전에 소생시키는 것이라 나사렛 처럼 나흘동안이나 시체로 있었다면 의학의 힘 밖에 있었던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 아무튼, 30분 동안 산소 공급이 중단된 두뇌세포를 소생시키는 일은 예사롭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심하게 부상당해 죽은 군인의 두뇌를 다시 소생시켜 다른 건강한 몸에 이식시켜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내 몸은 과연 나의 것인가? 물론 쉬운 답으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다 썩어 없어질 것. 동시에 성령의 성전인 것. 기꺼이 육신된 목숨을 내주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할 수 있다. 주는 사람의 입장은 그러하다. 내 몸이 죽어 썩어 없어지는니 타인이라도 계속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내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다. 내 두뇌에 대한 결정권은 당연히 인간법적으로서는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각능력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보통 법적 결정권이 허락되지 않는다. 바른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죽은 두뇌를 소유하고 있는 의식불명의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전 결정되거나 사전 위임된 타인에게 결정권의 행사권이 주어지게 된다. 엄격히 법적으로만 따지면 이렇다. 자신의 몸을 내어 준 사람에게 나의 두뇌가 들어가 어떤 불행한 이유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정의일 수 도 있다란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런한 배경에는 인간의 의식또는 자아의식을 가능케하고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단지 물리적 두뇌 세포와 그 소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되는 어떤 존재의식에만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논리인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그 단계까지 단숨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끝을 정하시는 것이라면 의학적으로 가능하다하여 인간의 죽음과 의식또는 영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이렇게 계속 실험을 진행해야하는 것인지 질문을 해야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실험을 허락해야 하는지 진지해야 더 심사숙고하고 논해야 될때이다.

CRISPR 에 있어서는 이렇다. 예를 들어 임신한 아이가 다운증후군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CRISPR를 통해 유전자를 다시 재프로그램해서 바꿔 정상인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적용사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 편집을 통해 아기의 눈 색깔 또는 지능까지 향상시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첫 사례와 같이 유전적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두번째 사례처럼 어떤 유전적 향상에 있어서는 쉽게 남용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보통 거부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난자가 수정되면서 동시에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유일무이한 유전자의 조합이 하나님의 손으로 된 것이냐 아니면 많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大찬스, 즉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맹인 시계 제작자의 손으로 된 것이냐 라는 질문에 답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의 답은 한 가지 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즈음에는 오히려 성경보다는 전통을 더 중시여긴다는 카톨릭 신자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더 성서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만큼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 에 있어서는 Oxford 의 젊은 철학자 Bostrom 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Bostrom 은 무신론적 철학파적인 관점에서 접하고 있으면서 문제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관점에서는 한가지 언급을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간관이다. 인공지능의 절정은 바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로보트의 실현이다. 인간관에 있어 문제를 쉽게 빨리 설명하기 위해 조금 억지스러운 예를 들어보겠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고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학자를 그냥 곰이라고 하자. 이 곰이 자신을 흉내네는 인공지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치자. 만들어진 로보트는 사람일까 곰일까? 답은 당연하다. 여기서다 다가 아니다. Bostrom 과 많은 사람이 AI 가 만드는 사람의 수준에 도달하면 (HLMI = Human Level Machine Intelligence) 그 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만든 사람의 수준보다 더 빠르게 지능이 상승하며 만든 사람이 만들었던 모든 안전 제한은 순식간에 해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 실험에서도 이미 입증이 된것이다 (“AI box problem”). 즉 개미 한마리 잡으러 굴로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호랑이 천마리가 둘러싸이는 상황을 만나는 격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인간관을 언급할때 너무나도 쉽게 Dawkins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언급한다. 그것이 정설로 통한다. 곰이 곰을 만들어 버리면 마늘먹고 웅녀가 되지 않는한 곰보다 더 곰같아 지는 것은 그냥 더 무서운 맹수 한 마리일뿐이다. AI의 결과물은 그것을 지금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사람이 아니고 그 다른 어떤 관점에서 시작해 버린다면 너무나 당연한 꼴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고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자리에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시고 어떤 세상관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가르쳐 주셨다. 인간의 학문과 발전은 자신들이 심은대로 거둘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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