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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유다, 배고픈 요셉

요셉이 이집트인들에게 종으로 팔려가 있는 동안 유다의 삶은 풍요로움의 상징처럼 보인다. 어떤 중요한 일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따라 사는 유다는 자신이 한 약속까지 망각하고 있다. 반면에 요셉은 종으로서 자신에게 집적 유익한 일이 아닐지라도 섬기는 사람의 것들을 관리해주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런 삶속에서 정직과 성실함의 상징처럼 나타난다.

어떤 새로운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배부른 사람에게서 보다는 배고픈 사람에게서 나온다. 보통 여러 회사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뭔가 혁신적인 것이 나오기를 원해서 돈을 부어 넣듯이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연봉을 높이 올려준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획기적인 것을 창출했던 때 와를 비교하면 100분의 1로 돈이 많아진 회사가 새롭게 창출해내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도리어 엉뚱한 결정의 연속으로 그냥 돈이 구멍난 주머니에 물붓듯이 계속해서 그런 상태만을 유지하는 것을 본다. 혁신을 원한다면 배고파야 한다.

Ref: 창 38-40, 마 12:22-45

자연적 질서, 그리고 형평성과 평등의 차이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 하나님도 자신의 언약의 백성을 다른 백성들도 보다 더 사랑하였다. 현대에 와서 이런 정상적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비이성적인 만행으로 봐야하는 것이 옳다. 한 남자가 이 세상 모든 다른 여자들을 거부하고 한 여자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사랑하는 것이 부부관계이며 인간 사회의 제일 기본이 되는 관계인 것 처럼, 한 아버지가 여러 아이들 중 한 아이를 더 총애하는 것이나 여러 친구들 중 한 친구를 다른 친구들 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등 하나를 다른 것 보다 더 위에 두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이런 자연적 질서는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 보는 매우 평범한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가 어느 한 아이를 더 총애한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만 무엇을 해주고 다른 아이들을 외면한다면 이것까지 바른 것이라고 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총애하는 아이를 특별 대우를 해 줄수 있지만 다른 자식들에게의 아버지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인간 단체에서도 가능한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맞는 것이지만 자연적 질서는 그대로 적용된다. 당연히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봉급을 받게 되는 것이고 더 많은 일을 능력있게 소화해 내는 사람이 그 많큼의 댓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평등과 형평성의 차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허술한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자연 질서적 체계의 필요도 이해 못하고, 형평성과 평등의 차이의 필요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적으로만 평등을 외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無知의 極値의 시대이다. 동일하게 같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을 평등이라 할 수 있지 권리만 을 가지고 평등을 말하는 오류를 범하는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평등하게 대해주지 않아서 온 문제가 아니라 이브가 하나님을 넘어서고 싶었을때 부터,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부터가 문제였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가 촛점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아벨의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에만 촛점이 가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비교했을때 왜 나는 그 만큼 축복받지 못했는 가에 촛점이 부여되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하자. 시기라고 하자. 질투라고 하자.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다른 아들들은 가인과 같이 시기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을 본다. 이것이 더 커지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듯이 이 아들들도 같은 마음을 품게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적 질서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그저 평등만 외치는 오늘 날의 사람들의 아우성과 같은 맥이다. 자연적 질서를 무슨 변태적 악으로 수정하고 역사적 형평성의 문제들을 평등의 문제로 수정하여 기형적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마구 괴변과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행동한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바르세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보고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자신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같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심지어는 치유의 역사와 여러 기적을 행하는 것을 옆에서 보며 가인의 후손인 것을 확인시켜준다. 요셉의 형제들 처럼 그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며 성장해 가기 시작하는 시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오로지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우리 마음에 내키는 데로 간다면 우리 모두 다 가인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질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존중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한다면 아벨 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등만 외치는 가인은 되지 말아라.

Ref: 창 36-37, 마 12:1-21

주님의 가벼운 멍에

창 34에서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父傳子傳으로 야곱의 아들들 또한 야곱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그냥 행동하여 한 부족의 죽음으로 결과를 맺게된다. 비록 始發점은 족장의 아들의 죄이긴 했지만 그 들은 행동은 적절하거나 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가인의 땅에서는 한 사람의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는 것이 순리아닌 순리처럼 작용하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보여준다. 이차대전도 여러 방면에서 납득하기 힘든 수준의 비극이다. 인간의 역사란 무거운 멍에의 연속이다. 현대에 들어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여러가지 형태의 중독의 멍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겁게 누르고 있지만 자신들이 종노릇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무리 일이 많아도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일이 적어도 다른 목적으로 한다면 그 일은 큰 부담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진리를 통한 회계를 통해 자유함을 얻게 되고 인간은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육신과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조용히 바라보시는 주님을 위해 하듯이 하고 사람들 눈치보면서 일하지 말자.

Ref: 창 33-35, 마 11:7-30

하나님과 씨름하는 삶

수년전에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한 목사가 교회 목회에 대해 나름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교인들이 대부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별 걱정들이 없고 다 나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 이제는 설교나 목회 방침이 그런 바뀐 성도들의 삶에 맞춰 성도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교회를 다니게 하는 것을 돕는게 목사의 일이다 라는 말이었다. 목에까지 넘치는 차오르는 답답함이 있었지만 감히 나이도 어린 전도사가 목사들 끼리의 대화에 끼어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럽의 國敎化된 교회들의 역사와 현대화 되어 어떻게 썩었는지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목자들이 그런 정신상태인데 성도들에게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목자 아닌 평신도들의 소그룹에서 들어가 봐도 같은 정신이 여러 모습으로 보인다. 선교? 십자가를 지는 신앙? 자신을 부인하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글쎄… 예수님이 계속 반복해서 여러번 말씀하신 것들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8-39

텍사스 주에 제일 큰 교회 중 하나가 Joel Osteen 의 Lakewood 교회이다. 오스틴 목사가 가르치는 것은 단순하다. 신학이나 바른 성경말씀의 이해는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로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건강과 부를 얻는 것이다. 인터뷰에서 죄에 대한 질문을 했을때 그는 촛점을 죄에서부터 옮겨 이 세상 삶속에서 불행하고 실패하고 우울한 기분에 맞추고 그런 것에서 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삶과 메시지로 가르치셨던 천국복음과 상반되는 망언이다. 철저한 물질주의적 인본주의적 기복신앙. 지옥에서부터 사탄이 만약 성경말씀을 비틀어서 가르친다면 오스틴 목사가 전하는 복음 그대로를 전할 것이다. 죄에서부터의 회계도 없고 요 16:8의 성령님의 죄에 대한 책망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부터의 구원도 없다. 마치 무슬렘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되 회계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된 것처럼 Lakewood 의 성도들도 그런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씨름이란 상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맞대어 비틀어서라도 그 형태에 금상첨화 격으로 덧붙인 것처럼 보완하는 상태가 된다. 비록 상대의 힘과 상충되는 힘을 가해야 하는 상태이지만 보어적으로는 그 상대란 대상을 재일 닮은 주제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것이고 그 만큼 하나님에 대해 밀접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려오는 힘을 맞대하며 미는 힘이 적절해야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허공에 힘이 가해지는 것은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힘이다. 검도대련를 위한 기본적 연무에서도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의 거울이 되기를 노력하는 부분이 중심에 있다. 더 높은 수준의 劍士의 표현으로는 자신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의 거울처럼 움직인다라고 한다. 누구와 씨름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 어떤 형태의 만남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친밀함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야곱의 절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과의 의도치 않았던 씨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님에게 죽을 수도 있다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먼저 있었기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걸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말씀에 대한 확신을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형을 만난다 할찌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애원하다시피한 마음의 상태에서 자신이 씨름을 한 상대가 하나님이었다는 것도 모른체 씨름을 하게 된다. 씨름한 결과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게된다. 여러 가능한 이름 중에 하나님과 씨름한다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는데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과 씨름 하는 삶이다. 하나님께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이 가고, 어제보다 오늘 더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매일 매일 삶을 아주 편하고 즐겁게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라. 나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라. 핍박을 받고 사람들이 너를 죽일 것이지만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를 죽였는데 제자된 너희 들이 나보다 더 낫다라고 착각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전하시고 심지어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후에 만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들의 삶을 순종이란 삶으로 다 하나같이 순교를 맞이했었다. 우리의 삶 또한 치열하게 돈버는 일을 가지고 나중에 은퇴해서 어떻게 더 편하게 살까하는 것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이 더 중요해진 자들이나 다름없다.

이런 시대, 즉 거짓된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르치고 죄를 고취하는 삶을 하나의 생활방식이라고 가르치는 이런 시대에 더욱 정신차려야 한다.

Ref: 창 31-32, 마 10:24-11:6

야곱의 유전공학

이미 할아버지 세대에서부터 받아 놓았던 축복에 대해 감사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속임수를 써 축복을 받을려고 했던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역으로 속임을 받게 되어 원하던 라헬을 먼저 얻기보다는 그녀의 언니였던 레아를 첫 아내로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임한 후의 야곱은 마치 열심히 일하는 소처럼 7년, 또 7년, 그리고 보상을 받으며 추가로 6년을 더 일해 20년의 세월을 일꾼으로 보낸다. 30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은 야곱의 유전공학이 흥미스러워 보인다. 앞장과 뒷장의 맥락을 보지 않고 읽으면 마치 야곱이 나무 가지를 사용해 얼룩진 새끼를 배게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28장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야곱이 어떤 고대 유전공학의 법칙을 이용해서 스스로에게 더 많은 양이 추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나무가지를 준비했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는 야곱의 행동에 대한 뚜렸한 이유나 설명없이 그렇게 했더니 야곱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더라고만 적혀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대 사회에서 미신적으로 행해졌던 것일 수 있으나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라고 해도 한 피조물이 새끼를 배어 어린 것을 나게 하는 것을 주관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부분은 일부러 겹치게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라헬의 임신에 대한 부분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같은 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무튼, 현대의 유전공학에 대한 발달로 좀 혼돈이 있는 것 같아 잠깐 언급해 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명령하신 것은 창 1:28에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조주가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지만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다. 다스리라는 명령 하에 포함되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다. 모든 생물안에는 유전자가 있다. 즉 유전자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부이며 그것을 유익한 목적으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질병, 죄로 인해 생기기 시작한 유전적 질병까지 유전공학을 사용해 퇴치할 수 있다란 말이 된다. 즉 치료나 치유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한 일이지만 마치 히틀러의 나치가 목적했던 것 처럼 무슨 수퍼 인간들이나 그냥 보기 좋은 인간들을 만들어 대다수를 통치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C. S. Lewis 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신론 유전공학자들이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꿈이 현실화 된다면 소수의 통치자들이 수십억의 인구를 통치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창조주같은 힘과 지혜을 얻었다고 믿고 바벨탑 꼭대기의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람과 태풍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심지어 영물까지 다스리시지만 자신을 내새우며 세상적 힘을 키우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에 자신의 진정한 신분이 나타날때를 기다리시며 치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치유한 것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까지 하신다. 그 어떤 유전 공학자보다 우리의 유전자를 잘 아시고 개개인의 코드를 하나 하나 다 외우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하신데 골무로 뜬 바닷물 만큼 밖에 모르는 우리는 마치 온 우주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과학이고 지식의 수준이다.

Ref: 창 29-30, 마 9:18-38

언약된 線上에서의 만남

미국에 오래 전 국민학교때 이민을 와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쟁사회에 대해 듣기로는 남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사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는 남이 잘 안되면 자신이 경쟁에서 유리하게 앞 설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미안해 하는 마음보다는 조금 더 욕심을 부추키는 마음을 키운다는 말을 들으며 개인적으로 나의 모국이 그런 상태라는 것에 대해 슬프기까지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의견이나 말로 한 국가를 페인트 칠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어느 인간 사회가 되었던 한 인간 사회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조차로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야곱의 이름 또한 발목을 잡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남이 잘되기를 기뻐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남보다 자신이 앞서야 하고 자신이 잘되어야 한다는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3대 언약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마치 부자들도 3대까지 가기 힘들다는 말이 있듯이 특별한 교육 지침을 따르지 않는 가정에서는 3대즈음에 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흐려지든지 아니면 없어지는 경우를 종종본다. 야곱이 태어날때는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이미 15년전에 죽어 없어진 상태였고 이삭과 리브가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3대에게 잘 전해졌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여러 보인다. 첫째로 어머니인 리브가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각이 아니다. 그녀의 의도가 야곱에게 거짓과 속임수를 통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을 나타난다. 왜 이삭이 자신의 축복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겼는지는 고대 시대의 말과 약속에 대한 절대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의 비극처럼 말로 뱉은 말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현대인들 처럼 쉽게 말을 하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 문서화 된 계약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기본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작은 약속이라도 중대히 여기고 어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들이 여러 있지만 구약 시대처럼 인간의 약속이나 말까지 현실과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보는 가치관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기 힘든 세계관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물로 만들어졌기에 그러한 가치관이 존재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의 바른 이해가 있었기에 그런 세계관이 가능했던 것이다.

야곱은 28:11에서 드디어 처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의 삶은 그 때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사람의 말을 따라 남의 발목을 붙잡고 남의 축복을 인간의 방법으로 취득할려고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임하고 부터는 타인에게 발목이 붙잡히는 대상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야곱의 삶의 진행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또한 삶이 바뀌는 것을 본다. 만난 사람마다 죄 사함을 받고, 앉은뱅이가 걷고, 아픈 사람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이 바뀐다. 예수님 또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살리시고, 거짓으로 살아가던 자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누릴려는 잘못된 인생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선상으로 인도하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오늘 날도 계속하신다.

Ref: 창 27-28, 마 9:1-17

관계에서 오는 순종의 우선순위

아브라함의 多妻 (창 25:1), 죽음 (9), 이스마엘의 번성 (12), 두 아들을 가진 리브가 (24), 장자의 명분을 한 식사로 판 에서 (32); 아내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거짓말을 한 이삭 (26:7), 그랄 목자들과의 분쟁 (20), 나타나셔서 언약의 확인 (24), 이방인도 인정하는 이삭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축복 (28), 이삭의 多妻 (34) / 모든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 (마 8:22); 모든 만물의 주 – 바람/날씨 (26), 영물 (32)

아브라함의 시대, 즉 고대 역사부터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초생자(初生者)의 권한, 장자 상속권(primogeniture)이었다. 아브라함의 시대를 지나 근 500년 후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장자가 받는 재산은 두 배가 된다는 것이있다. 즉 아들들이 4명 있으면 재산을 4등분하여, 첫째 아들이 2/4, 즉 총 재산의 1/2의 상속받게 되고 나머지 3명의 아들들은 각 총 재산의 1/2를 3등분하여 1/6를 상속받게 되는 것을 원칙으로 보면될 것이다. 한 곳에 땅을 소유하며 거주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경우 장자의 권한과 상속에 대한 것은 더 유연했을 것이다. 아무튼, 아주 오래전부터 장자가 모든 것을 상속했을 만큼 권한이 컸던 것을 보면 (아들이 두명일 경우, 두배란 100%를 뜻 하기도 함) 그 만큼의 물질적 가치가 있던 것이 확실하고 첫째로 태어나는 것도 축복으로 여겨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권한을 한끼의 식사로 바꾸는 에서를 보면은 나름 성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현실주의적이고 바로 앞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생존적 필요에만 더 충실한 에서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후회를 할지라도 자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당장 충족시켜야 하는 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1960년대에 스텐포드大에 있었던 마시멜로 실험이 생각난다. 어린아이 600명들에게 주어졌던 실험이었고 그들을 다음 40년 동안 추적 조사했었다.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먹지 말고 기다리면 또 하나의 마시멜로가 추가로 주어진다라고 약속을 하고 어른은 15분 동안 아이를 혼자 방에 두고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 600명 중 67%의 아이들 즉 400여명 정도의 아이들이 그 15분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는다. 그러나 두번째 마시멜로를 얻기 위해 기다렸던 아이들은 수십년 후 어른이 되어 기다리지 않았던 아이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란 결과를 보게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을 먹어야 하고 지금 당장 욕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은 삶이 계속해서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위로 향하는 목적도 없이 계속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즉석으로 해결해야 하고 바로 충족시켜야 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수 없다. 성령 충만한 삶의 징표도 마찬가지이다. 크게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기도하고 이 은사 저 은사 보여주는 것만이 성령 충만의 징표라고 잘못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산위의 경험들은 계곡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행되는 순종의 삶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목마르고 배고프더라도 바른 때를 기다릴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향해 성령의 뜻을 해아리고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신의 배를 위해 일하는 사람 육신의 것을 위해만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선순위이다.

장자의 권한이 컸다면 그 만큼 책임도 컸다. 부모가 죽으면 장래를 치르는 것은 오늘날도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도 부모가 죽었다고 하면 일꾼을 잡아두는 일은 없다. 당연히 가서 장래를 치루고 심지어는 위로의 말까지 전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은 이런 배경에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우선순위가 기반이 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기본이 되는 원칙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 친구, 모두 다 귀한 관계이지만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머니가 밖에 왔어도 일부러 그 들을 인정하고 안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형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매우 파격적인 발언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선순위를 강조하시는데 우리가 그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핑계가 어떻게 있을수 있겠는가?

중고등부 중학생 시절때 어느 고등학생 누님이 집에서 구타를 받으면서까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것이 기억이 난다. 눈옆에 멍이 들어있고 몸 여기 저기 구타당해 아파서 한 구석에서 울고 있어고 다른 자매들이 위로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면 혹독한 추위에서도 아버지가 집문을 열어주지 않아 친구집에서 밤을 지내고 그런 누님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한인의 정서로 보면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는 불효막심한 딸이다. 그렇게 맞아가면서까지 교회를 다닌지 2년 정도 되었을까? 같이 살던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철저하게 예수 믿기를 반대하고 거부했던 아버지, 어머니까지 교회를 누님과 같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다 예수믿는 식구들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딸은 남자쫓아 가족을 버리는가 하면 어느 딸은 주님쫓아 가족을 구원시킨다. 이 세상을 쫓는 자 당연히 세상과 같이 망하게 되고 주님을 쫓는 자 세상을 이겨 영생을 얻게 되어있다.

Ref: 창 25-26, 마 8:18-34

친절함이란 바탕위의 믿음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친척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리브가에게 간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창 15:2에서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자신의 종의 이름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면은 24장에 나오는 종이 엘리에셀일 확율이 높다. 아브라함의 집안의 사람들은 동쪽 끝 지방에서 파생된 사람들이고 다메섹은 서쪽지방의 사람이라 생김세도 다를 수 있겠다. 아무튼, 리브가는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배푼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타인을 위해 배려와 친절을 배푸는 인격이 갖춰진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샘이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자신의 하인을 위해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과거 노예제도 하에 있던 노예들이 무조건적으로 무슨 동물 처럼 학대만 받고 살아갔던 것 처럼 흑백논리로 세뇌받고 있는 현대이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평민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치우치지 않은 정상적인 관점이다. (성서적 질서보다는 평등주의를 더 중요시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 흑백논리를 이용해 주인/종 관계를 무슨 윤리적인 악으로 풀이하며 구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아무튼, 이 백부장도 인격이 갖춰진 주인으로서 자신의 하인의 문제에대해 주님께 고하는 것을 본다. 하인을 자신의 하찮은 소유물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을 베푸는 모습이다.

친절은 배푸는대로 돌아오게 되있다. 타인에게 친절하면 그 친절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하인같은 사람이라 할찌라도 인격을 갖춰 대하면 그것이 후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그러나, 타인을 비인간적으로, 하나의 소유물 처럼 대하면 꼭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기본도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익숙하고 친밀해질수록 더욱 禮를 갖춰 대하는 것이 理이다. 인격이 덜 된 사람일수록 처음보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익숙해지면 無禮로 대하게된다. 아무리 작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소중한 인간이다. 아무리 가치관이 꺼꾸로된 세상이라 해도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소중히 여기고 禮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

Ref: 창 24, 마 8:1-17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 7:21

30여년전에 섬겼던 한 교회의 목사님은 한국 신학대 총장의 아들로서 호주에서 목회하다가 버지니아에 와서 목회를 하는 중이었다. 그 목사님이 언급했던 Søren Kierkegaard 의 책 Fear & Trembling 을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은 매우 자주 언급한다. 실존주의적인 철학적인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리고 모리아 산에 가는 과정을 한 개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관찰되는 아브라함은 단순명료한 순종의 모습만 보인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마음이 어떠할지 실존주의적 해석등 여러가지 관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따라하는 그 행함에 포인트가 있다. 순종이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경로는 요나의 삶에 보였던 것 처럼 불순종함의 징표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누구시인줄 바로 알고 그의 말씀을 바로 파악했다면 일단 순종이 결단된 후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철학적인 관점의 가치에 부여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에서도 보이듯 그리 성서적인 관점과 실질적인 믿음의 삶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실존주의적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인 목사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면 마치 Azusa 부흥 전의 기독교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던것으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Vineyard movement 나 Pentecostalism 등 예배 동안의 체험을 강조했던 여러 기류에 대해 그들의 열매를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여부를 제공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들의 열매를 보아라.

마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께서도 같은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오늘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많지만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에서만 오는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두 사람 다 말씀을 귀로 듣지만 순종하는 자만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 처럼, 모두다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있고 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말하고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싸구려 신앙이되니 교회 다니는 것을 무슨 사치품 하나 구입해 놓은 것 처럼 구원을 받아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되어 버렸다. 열매없는 것에 대해 탄식하거나 죄를 밥먹듯이 지며 살아도 회계없는 신앙 소비자들만 많아진 세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내 한 마음만 편하면 만사 오케이하며 살아간다. 구약에서 네 다섯 시간동안 피비린내나는 번제물 앞에서 예배를 드린 이스라엘인이 아니더라도 주일 1시간을 드리는 예배가 최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사이로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f: 창 22-23, 마 7:15-29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구제 –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기도 –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금식 –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보물 – 마 6:20, ” 하늘에 쌓아 두라”; 삶 –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갈래의 길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더 풍성해 보이는 지상낙원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있는 천상낙원을 바라보았다. 롯의 지상낙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질서를 어기는 죄의 極의 징후인 동성연애가 만연한 곳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유황불로 타 없어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죄가 어느 정도 차면 그로 인한 결과는 순식간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았던 그의 딸들도 롯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지속성을 중시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보면 이미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의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 의식 세계를 점령했는지 알 수 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 땅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즉 초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인정 받을 수 있는 구제가 필요한 것은 구제의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영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기위한 구제 사업은 구제를 하는 사람의 명성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지 진정 구제가 필요한 대상을 위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주제 측의 어려운 희생이 요구가 된다 하거나 명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제 대상의 필요와 상관없이 쉽게 구제가 단절되는 것을 본다. 진정한 구제 같은 구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 희생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그 아무도 희생의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도와 금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도 않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타인들을 성공적으로 잘 속여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된 다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정신을 삶의 중심 가치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세상의 강력한 힘보다는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용하다. 그의 마음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것들은 육신을 위한 것 들보다 더 중요한 것에 있다.

창세기 -21장, 마태복음 -7:14의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