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obu: switch to screen for byobu backend for multiple windows to a single server

I usually connect to a single server via PuTTY, and have three (horizontally) split sessions for logs, and another PuTTY window for sysadmin, and maybe one for coding (with multiple sessions via byobu), and possibly another one for reference. This doesn’t seem to be possible with tmux as backend for byobu.

This may be because, tmux, in spite of all the praises it receives for speed, features, and whatnot, doesn’t support multiple concurrent, but distinct sessions via byobu. I haven’t researched this deep enough to conclusively say that there is absolutely no way to do this, but I’ve found simply switching over to screen to be much easier solution for now.

byobu: number of updates available doesn’t get cleared

Environment: RHEL 7.6 (Maipo), byobu v5.73, Screen v4.01.00devel (2006-05-02)

Even after a complete update of the system (via yum in this case) the number of updates available indicator on the status line on byobu doesn’t get updated. This happens regardless of terminal multiplexer you’re using (either screen, or tmux.) This indicator seems to be cached under /dev/shm/byobu-mhan-CQCSeDjp/cache.screen folder, and a very short-lived, temporary workaround seems to be simply emptying out the folder. More permanent solution would be to fix the script itself (/usr/libexec/byobu/updates_available). On line 66, the following yum command is executed:

yum list updates -q | grep -vc "Updated Packages"

That is supposed to return the number of updates available, but it only works properly when it’s under under sudo on this system. It fails with an error message when it is run with user account, which byobu assumes when this script is run:

Cannot upload enabled repos report, is this client registered?

This seems to be a message related to RH subscription manager, which is typically installed as a plugin to yum. We can run without plugins to see if it still complains:

No complaint here. And return of 0 is promising. That 1! below has been an eyesore, so for now, this will be a good enough of a fix for me. This may disable some repos that were added as plugins, and I will have to double check that some other time. Adding –noplugins to line 66 in /usr/libexec/byobu/updates_available.

ssh: putty: “Couldn’t get a file descriptor referring to the console”

Environment: CentOS 7.6.18.10, PuTTY rel. 0.71

Whenever I use PuTTY (on Windows) to connect to my CentOS box, I always get the message immediately after the authentication:

Couldn't get a file descriptor referring to the console

I decided not to ignore the message today, and figured out that setfont in my .bash_profile was causing it. I recall putting that in when I used to work from home more often and connect directly on console. Just nuke or comment out the line, and all is at peace.

ssh: “perl: warning: Setting locale failed”

Environment: CentOS 7.6.1810

When logging in from a WSL console (Windows 10, v1809, Build 17763.615 + Ubuntu 18.04) into my CentOS box it seems to be complaining about locale settings.

perl: warning: Setting locale failed.
perl: warning: Please check that your locale settings:
        LANGUAGE = (unset),
        LC_ALL = (unset),
        LANG = "C.UTF-8"
    are supported and installed on your system.
perl: warning: Falling back to the standard locale ("C").

Screenshot:

According to this page, you can just add the following lines to /etc/environment file:

LC_ALL="en_US.UTF-8"
LC_CTYPE="en_US.UTF-8"
LANGUAGE="en_US.UTF-8"

vim-plug: git error “could not read Username for…”

When I tried to PlugInstall a new plugin called ‘talek/vorax4’, which is an old SQL*Plus IDE, git kept on returning with the following error:

x vorax4:
    Cloning into '/home/skan/.vim/plugged/vorax4'...
    fatal: could not read Username for 'https://github.com': terminal prompts disabled

Here’s the screen shot:

I had the following line in my ~/.vimrc.

Plug 'talek/vorax4.git'

Then my Google search yielded this helpful page, and it explains that this is caused by the system trying to authenticate with https with an account that has 2FA enabled.

This can be solved by forcing git to use ssh for all interactions.

Jaco Pretorius

And following the instructions there, I executed the following line:

$ git config --global --add url."git@github.com:".insteadOf "https://github.com/"

Above command adds the following lines to ~/.gitconfig.

[url "git@github.com:"]
    insteadOf = https://github.com/

However, I was getting a different error this time:

ERROR: Repository not found.
fatal: Could not read from remote repository.
Please make sure you have the correct access rights and the repository exists.

I went back to into ~/.vimrc and removed that .git extension from the plugin name, so it reads:

Plug 'talek/vorax4'

Success!

Then, after all these, I realized I could have just removed .git from the repo name without adding that line to ~/.gitconfig. 😉

세계관의 소중함

오늘 뉴욕타임즈에서 Sestan 의 두뇌 연구에 대한 글을 읽고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몇년 전에는 MIT Technology Review 에서 Doudna의 CRISPR 유전자 편집, 그리고 현재 진행형으로 매우 급격히 그리고 조용히 적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의 생활화. Sestan 장기관류장치의 발전을 통해 돼지의 두뇌를 신체밖에서 계속 살리는데 성공했고, Doudna는 CRISPR이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완벽한 수준으로 올리었고 컴퓨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의 발전은 다음 몇년 안에 실용화 될 수 있는 양자 컴퓨터(quantum computer)와 같이 합하여 적용되면 (적확히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것 또한 연구 분야이지만) 어떤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는지 인간의 상상력이 한계란 말까지 나올 수 있는 시대가 지금 사는 이 시대이다. 이러한 것들이 학구적으로는 쉽게 외면당하는 철학부 같은 곳에서만 논의되고 있고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운명의 종착역에 다다른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니엘서 12장에 마지막때에는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라고 두가지의 요소를 따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 아닐까란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꼭 물리적으로 왕래를 하지 않아도 정보의 왕래로 지식의 유포와 공유가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공유의 속도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지식의 분량을 상당히 넓히는 효과를 초래하고 정보의 분산효과를 잘 활용하는 분야에서는 또렸한 의지와 지원만 있으면 상당히 빠른 인적 넷트워크 형성과 팀구성으로 은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바벨탑 올리기는 누워서 떡먹기가 된다. 지금은 인간 두뇌와 유전자 편집같은 의학기술들에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진지하게 바른 세상관으로 바라봐야 할때인것이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만드신 영적인 존재인것이다. 그러나, 두뇌 연구분야에 있어서는 인간의 두뇌는 인간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인 原物(원물)로 보는 것이 定說(정설)이고 지금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의식을 나름 과학적으로 정리하는데 혼신을 다하며 대중에게 제일 잘 팔리는 책으로도 쓰이고 있는 중이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하더라도 믿지도 않을 뿐더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어떤 침묵의 규정으로 둔 과학계에서는 무신론적인 입장이다기보다는 의식세계를 감싸고 있는 영적세계의 언급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불가지론적(不可知論者)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죽은 사람의 두뇌만을 다시 소생시켜 살린다면 마치 나사렛처럼 다시 부활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힘으로가 아닌 의학의 힘으로 부활된 사람인것인가? 사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최근에 이미 어느 중국 의학계에서 인간의 머리를 다른 몸에 붙여 실험을 한 사례가 있었다. 물론 두뇌 세포가 부패되기 전에 소생시키는 것이라 나사렛 처럼 나흘동안이나 시체로 있었다면 의학의 힘 밖에 있었던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 아무튼, 30분 동안 산소 공급이 중단된 두뇌세포를 소생시키는 일은 예사롭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심하게 부상당해 죽은 군인의 두뇌를 다시 소생시켜 다른 건강한 몸에 이식시켜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내 몸은 과연 나의 것인가? 물론 쉬운 답으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다 썩어 없어질 것. 동시에 성령의 성전인 것. 기꺼이 육신된 목숨을 내주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할 수 있다. 주는 사람의 입장은 그러하다. 내 몸이 죽어 썩어 없어지는니 타인이라도 계속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내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다. 내 두뇌에 대한 결정권은 당연히 인간법적으로서는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각능력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보통 법적 결정권이 허락되지 않는다. 바른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죽은 두뇌를 소유하고 있는 의식불명의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전 결정되거나 사전 위임된 타인에게 결정권의 행사권이 주어지게 된다. 엄격히 법적으로만 따지면 이렇다. 자신의 몸을 내어 준 사람에게 나의 두뇌가 들어가 어떤 불행한 이유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정의일 수 도 있다란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런한 배경에는 인간의 의식또는 자아의식을 가능케하고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단지 물리적 두뇌 세포와 그 소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되는 어떤 존재의식에만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논리인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그 단계까지 단숨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끝을 정하시는 것이라면 의학적으로 가능하다하여 인간의 죽음과 의식또는 영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이렇게 계속 실험을 진행해야하는 것인지 질문을 해야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실험을 허락해야 하는지 진지해야 더 심사숙고하고 논해야 될때이다.

CRISPR 에 있어서는 이렇다. 예를 들어 임신한 아이가 다운증후군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CRISPR를 통해 유전자를 다시 재프로그램해서 바꿔 정상인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적용사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 편집을 통해 아기의 눈 색깔 또는 지능까지 향상시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첫 사례와 같이 유전적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두번째 사례처럼 어떤 유전적 향상에 있어서는 쉽게 남용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보통 거부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난자가 수정되면서 동시에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유일무이한 유전자의 조합이 하나님의 손으로 된 것이냐 아니면 많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大찬스, 즉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맹인 시계 제작자의 손으로 된 것이냐 라는 질문에 답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의 답은 한 가지 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즈음에는 오히려 성경보다는 전통을 더 중시여긴다는 카톨릭 신자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더 성서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만큼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 에 있어서는 Oxford 의 젊은 철학자 Bostrom 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Bostrom 은 무신론적 철학파적인 관점에서 접하고 있으면서 문제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관점에서는 한가지 언급을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간관이다. 인공지능의 절정은 바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로보트의 실현이다. 인간관에 있어 문제를 쉽게 빨리 설명하기 위해 조금 억지스러운 예를 들어보겠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고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학자를 그냥 곰이라고 하자. 이 곰이 자신을 흉내네는 인공지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치자. 만들어진 로보트는 사람일까 곰일까? 답은 당연하다. 여기서다 다가 아니다. Bostrom 과 많은 사람이 AI 가 만드는 사람의 수준에 도달하면 (HLMI = Human Level Machine Intelligence) 그 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만든 사람의 수준보다 더 빠르게 지능이 상승하며 만든 사람이 만들었던 모든 안전 제한은 순식간에 해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 실험에서도 이미 입증이 된것이다 (“AI box problem”). 즉 개미 한마리 잡으러 굴로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호랑이 천마리가 둘러싸이는 상황을 만나는 격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인간관을 언급할때 너무나도 쉽게 Dawkins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언급한다. 그것이 정설로 통한다. 곰이 곰을 만들어 버리면 마늘먹고 웅녀가 되지 않는한 곰보다 더 곰같아 지는 것은 그냥 더 무서운 맹수 한 마리일뿐이다. AI의 결과물은 그것을 지금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사람이 아니고 그 다른 어떤 관점에서 시작해 버린다면 너무나 당연한 꼴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고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자리에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시고 어떤 세상관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가르쳐 주셨다. 인간의 학문과 발전은 자신들이 심은대로 거둘수 밖에 없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은퇴는 언제하실꺼에요?”

이미 스스로 은퇴하시고 이 지역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분에게 일부러 직접 물어봤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답하시기 전에 조금 주저하셨다.

“은퇴는 안해요.”

또렷하게 답하신 것이 아닌 것을 보면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해서 대화를 하다보니 금세 자신의 아들의 대한 언급이 나왔다. 그의 아들은 특별한 예술가로 미국 어느 대도시에서 일하고 있으며 저명한 잡지와 회사들을 고객으로 두고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게 한 것은 아들을 돕기 위해서 수 만불이나 되는 장비를 사주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수 년째 아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마치 환상적인 소설의 단면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부모 세대정도 되시는 분이었고 그의 아들은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친구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도와 주시면 혼자 지속하지 못하잖아요. 선생님이 안계셨으면 그런 수준의 사업도 불가능하고요.”

좀 당돌하고 무례하게 들렸겠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아버지로서 아이를 대하는 마음과 방법이 어떠해야 한다는 나름 철학이 있다고 생각되서 어떤 생각을 하시고 계신지가 궁금했고 심지어는 무슨 부당한 일을 하시고 계시것 같다는 마음까지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런 일을 할려면 매우 비싼 장비가 필요하고 혼자 스스로 설려면 시간이 걸려서 내가 그 때까지 돕고 있는거에요.”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래도, 혼자 고생하면서 스스로 독립해야지, 그렇게 부모에게 큰 도움받아가면서 어떻게 혼자 계속 그런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연히 나와 다른 삶인고로 그것에 대한 존중은 잊지않았다.

“아, 예… 저는 어릴때부터 혼자 bootstrapping (독력/獨力)하는 식으로 살아와서 그런 관점에서는 미처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다른 환경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영어로 했으면 더 자연스럽게 들렸겠지만 한인들끼리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자연스러운지는 몰라서 일단은 직역으로 표현하여 답하였다.

육신의 아버지의 도움이란 것이 생소한 나에게는 밀려올 수 있는 자기 연민 같은 것 까지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20여년 전에 작았지만 시카고에서 몇년 동안했던 자사업을 처분하고 가족 모르게 표류된 배같은 마음으로 늦은 밤까지 같은 길을 계속 운전하다가 결국 섬기고 있던 교회 예배당 십자가 앞에서 무릅을 꿇게 되었다. 처절한 마음에서 솓아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 없이 터져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마음의 쌓여있던 것들을 다 토해내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 잠잠한 상태였다. 그리고 가까이 어딘가에서부터 잔잔히 속삭이며 들려오던 말.

“네가 나를 아버지라 하면서 왜 걱정하느냐?”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단다. 이 우주만물이 나의 것인데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근심하느냐?”

그 때 다시 눈물이 솓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감격의 눈물이었다. 앞 길이 보이지 않았던 갑갑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온전히 책임주신다는 믿음이 나의 마음을 감싸버렸다.

“할렐루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찬양도 계속 되고, 들어올때 가지고 왔던 절망은 이제 하늘을 치솟는 소망과 절대적인 믿음으로 바뀌어 교회 앞문을 나갔다. 그 다음 2주 동안은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하며 너무나도 평온하게 기쁨으로 하루 하루 지냈었고 일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까하는 마음으로 2주를 기다리니 기적적으로 지역 방송국에서 나를 찾는 다며 전화가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몸소 채험하였는데 어떻게 육신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겠는가? 육의 아버지가 부유해서 그리고 그 도움으로 내가 도움을 받았다면 이 교만에 빠지기 쉽고 죄로 너무나도 빨리 달려가는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삶보다는 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누구보다도 더 흠도 많고 손 볼때가 많은 사람이기에 더 겸손하고 더 깨져야 하기에 나에게는 보통 사람들의 어린 시절보다는 더 굴곡이 심한 시절을 허락 하신 것이고 고로 그것또한 하나님의 은혜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