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와 바울를 다시 안디옥으로 보낼 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하고 같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 내용: “우리가 보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서 너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전할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너희에게 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않아 다음과 같이만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우상에게 주어진 음식과 피가 흐르는 음식 또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며, 음행에서 멀리하라.”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하고 교회에서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아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와 연관해 세가지가의 주동사가 있다. (1) 보냄 (2) 읽음 (3) 가르침.
(1) 실라와 유다가 교회 장로들로부터 선택받아 가게된다. 그들은 형제들중의 인도자라고 나와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교회의 인도자들은 지혜와 성령충만이라는 두가지의 강령에 따라 지정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택될때 이 두가지의 기본적인 강령을 간과하는 것을 너무 흔히 본다.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사회적 지휘가 높거나 유명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교회의 물질적인 것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 다 지혜나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지혜롭다고 말할때는 근본적으로 바른 인신론적 바탕에서 의미하는 지혜이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 누군가 지혜롭다고 말할때와는 다른 지혜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바로 알고 인간의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위에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다. 여우처럼 약아 빠져서 계산에 빠르고 모든 것을 다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세상의 물욕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절대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서의 첫 강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신론적 (epistemic) 바탕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기본적 틀일 뿐이다. 다음은 성령충만. 요 16:8에 성령님의 3가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 의, 그리고 다가올 심판. 그리고 모든 진리로 (v13) 인도하신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 주님의 의를 입은 사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의 기본이라 하겠다. 회계나 주에 대한 믿음은 자연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니 많은 교회가 멍멍이판일수 밖에 없지않는가.
(2) 편지를 읽음. 27권의 신약 중 21권이 편지이다. 서신서라고 한다. 그 중에 바울의 서신이 제일 많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인 것 처럼 편지를 읽고 모두 기뻐하고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날의 교회 또한 이 편지를 읽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딱딱한 틀에 익숙해져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앞에서 읽고 교인들은 모두 다 같이 들으며 그것을 통해 기뻐하는 전통이 없어진 것이다. 구약에서도 제사장 에즈라 하나님의 성전이 제건된 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사람들이 회계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 갈급한 지금이다.
(3) 가르침. 교회의 3가지 대강령중 교육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육. 선교. 친교. 바르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움의 근본이다.
주님, 바른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더 성장해 나가며 순종으로 열매맺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