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salvific economy of God according to His eternal covenants
느부갓네살왕을 봐도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들을 욕되게 한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대로였다. 하나님께서 영원하다 하며 맺은 언약이 (창 17:7) 영원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일시적으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말씀 그대로 이해한 것을 지금와서 선택적 해석법은 무엇인가? 비록 전통적으로 대체주의가 받아졌지만 성경말씀의 바른 이해의 기준위에 다시 바로 잡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체주의가 독일 나치들의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 시킨 제일 큰 원동력이었다. 그 참사를 이어 1948년 5월 14일의 기적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성경에서 계속 약속하셨던 것들의 진행형 성취에 불과한데 이것도 무시하면 마치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약속을 어기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이상한 짓에 해당되지않는가? 신약의 새로운 언약은 구약의 언약의 진행적인 성취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Heb 8:13 의 κατάρας ἐγγύς 또한 서서히 없어질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장들을 통한 희생을 요구하는 부분에 있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12절에 죄에 대한 용서가 더 이상 구약의 언약에 바탕을 둔 희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새언약에 바탕을 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벽한 희생이지만 13절을 완성형으로 잘못 이해한 중점으로 대체주의로 이끌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관계에서는 아직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아직 이루실 것들 많이 남아있다. 사도 바울의 경고 또한 잊으면 않된다. 그의 신학원리에서도 이방인 교회는 접목된 지체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의 이해가 제일 성경적인 이해라 말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큰 반감을 가졌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을 포함한 이방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대체신학을 형성하였다.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이것을 대체적인 의미까지로 적용되는 것은 성격에서 적용하는 범위 밖으로 나간 것으로 봐야 한다. 정통적으로 고집해 왔던 신학원리가 비성경적이라면 끼워 맞추기로 해석학을 적용하지는 말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몸통과 가지는 바르게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