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時: 2018年 2月 7日 (水)

행 7:54-8:3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스데반이 구약을 이야기한 것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 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였다란 말을 하기위한 것인 것을 알고 그들은 화가나 이를 가를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것을 보개된다. 이를 말하니 종교지도자들을 스데반을 무력으로 도시 밖으로 끌어나가 돌로 쳐 죽인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와 같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며 죽는다. 이 때부터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의 교회들는 매우 큰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이 핍박을 앞장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울. 집집 마다 다니며 기독교인을 이 잡듯이 찾아네 옥에 가두는 일을 한다. 이 살벌한 사울이 나중에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바울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큰 죄나 작은 죄나 알고 있는 죄나 모르고 있는 죄, 털어보면 먼지 안나는 사람없다는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존제다. 죄가 밝혀졌을때 인간은 자연적으로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진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서 그는 부끄러움에 숨어버린다. 그 부끄러움은 강퍅해진 마음이 아니고 양심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면 아담의 자손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죄책감이라 한다. 이 죄책감은 마음의 안내자이다. 회계하라는 신호이다. 그 신호를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하던지 아니면 부인하고 악마의 편에 서는 것이다. 현시대에 와서 심리학과 사회학이란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둔 인간을 주제로 한 학문들은 이 중대한 신호를 무효화하는데 앞장서서 1960초반부터 인간을 비인격화 하는데 성공했고 우리는 그것을 전 세계적 사회의 매우 빠른 퇴보를 보며 지금에 이르러 왔다.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던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가인이 아벨을 돌로쳐 죽였고,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일려했던 이유를 보면은 다 교만에 눈이 가리워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시와 질투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에 반항에 살인자들로 변했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성스러운 존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 스데반이 구약을 읊으면서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난 그들의 죄. 구약은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이란 교훈의 거울로 우리의 죄를 나타내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반응 중에 이를 갈았다는 말이 나온다. 지옥을 표현할 때 이를 간다고 나온다.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지옥을 향하고 있다하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보좌옆에 예수를 보게 될때 그냥 홧김에 그를 끌어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그들이 예수에게 한 것처럼 역시 율법으로 따지면 처형할 수 있는 권리도 타당한 과정도 거치지 않고 맹수들 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버린다.  신성모독이라 이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무지는 여기에서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죄를 대면했을때 이들은 날뛰는 하이에나들로 변한다.  구약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간통과 살인을 언급하며 죄를 대면하게 했을때 다윗은 날뛰는 하이에나로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옷장같은 골방에 들어가 배옷을 입고 머리에 흙과 재를 뿌리며 몇날 몇일 동안 금식하며 통곡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피눈물이 되게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하였다. 회계를 한다고 해서 죄값을 치루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몇 세대를 걸쳐 심은대로 거두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렸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이라 불리지 않나 생각된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했으면 유대인들의 역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다. 주님, 성령님께서 죄를 인식하게 하시는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회계하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히 못할 죄가 없으면 다시 새롭게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무한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아무리 작은 죄라도 마음이 더 강퍅하게 부인하고 사탄 마귀의 유혹과 어둠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스데반처럼 죽음 맹렬한 순간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간것 처럼 이 하나 밖에 없는 삶또한 주만 따르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