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래 전 국민학교때 이민을 와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쟁사회에 대해 듣기로는 남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사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는 남이 잘 안되면 자신이 경쟁에서 유리하게 앞 설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미안해 하는 마음보다는 조금 더 욕심을 부추키는 마음을 키운다는 말을 들으며 개인적으로 나의 모국이 그런 상태라는 것에 대해 슬프기까지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의견이나 말로 한 국가를 페인트 칠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어느 인간 사회가 되었던 한 인간 사회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조차로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야곱의 이름 또한 발목을 잡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남이 잘되기를 기뻐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남보다 자신이 앞서야 하고 자신이 잘되어야 한다는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3대 언약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마치 부자들도 3대까지 가기 힘들다는 말이 있듯이 특별한 교육 지침을 따르지 않는 가정에서는 3대즈음에 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흐려지든지 아니면 없어지는 경우를 종종본다. 야곱이 태어날때는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이미 15년전에 죽어 없어진 상태였고 이삭과 리브가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3대에게 잘 전해졌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여러 보인다. 첫째로 어머니인 리브가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각이 아니다. 그녀의 의도가 야곱에게 거짓과 속임수를 통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을 나타난다. 왜 이삭이 자신의 축복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겼는지는 고대 시대의 말과 약속에 대한 절대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의 비극처럼 말로 뱉은 말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현대인들 처럼 쉽게 말을 하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 문서화 된 계약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기본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작은 약속이라도 중대히 여기고 어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들이 여러 있지만 구약 시대처럼 인간의 약속이나 말까지 현실과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보는 가치관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기 힘든 세계관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물로 만들어졌기에 그러한 가치관이 존재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의 바른 이해가 있었기에 그런 세계관이 가능했던 것이다.
야곱은 28:11에서 드디어 처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의 삶은 그 때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사람의 말을 따라 남의 발목을 붙잡고 남의 축복을 인간의 방법으로 취득할려고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임하고 부터는 타인에게 발목이 붙잡히는 대상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야곱의 삶의 진행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또한 삶이 바뀌는 것을 본다. 만난 사람마다 죄 사함을 받고, 앉은뱅이가 걷고, 아픈 사람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이 바뀐다. 예수님 또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살리시고, 거짓으로 살아가던 자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누릴려는 잘못된 인생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선상으로 인도하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오늘 날도 계속하신다.
Ref: 창 27-28, 마 9: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