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기도 –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금식 –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보물 – 마 6:20, ” 하늘에 쌓아 두라”; 삶 –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갈래의 길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더 풍성해 보이는 지상낙원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있는 천상낙원을 바라보았다. 롯의 지상낙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질서를 어기는 죄의 極의 징후인 동성연애가 만연한 곳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유황불로 타 없어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죄가 어느 정도 차면 그로 인한 결과는 순식간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았던 그의 딸들도 롯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지속성을 중시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보면 이미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의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 의식 세계를 점령했는지 알 수 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 땅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즉 초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인정 받을 수 있는 구제가 필요한 것은 구제의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영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기위한 구제 사업은 구제를 하는 사람의 명성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지 진정 구제가 필요한 대상을 위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주제 측의 어려운 희생이 요구가 된다 하거나 명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제 대상의 필요와 상관없이 쉽게 구제가 단절되는 것을 본다. 진정한 구제 같은 구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 희생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그 아무도 희생의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도와 금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도 않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타인들을 성공적으로 잘 속여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된 다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정신을 삶의 중심 가치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세상의 강력한 힘보다는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용하다. 그의 마음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것들은 육신을 위한 것 들보다 더 중요한 것에 있다.
창세기 -21장, 마태복음 -7:14의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