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s: mhan
安時: 2018年 2月 2日 (金)
2/2/2018 (금)
행 5:27-42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설득시켜 공회앞에 대려와 청문회를 연다. 기본적인 질문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정의를 문제삼기위해 예수의 이름을 가르치느냐 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는바 이며 복음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로 세운바 되었음을 알렸으나 종교 지도자들은 더 크게 화를 내며 죽이려고 할때 가말리엘이라는 율법교사가 과거의 이질적 종교운동도 없어진 것을 참조로 그냥 참고 관망하여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보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진정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도들을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며 밖에 나가 계속해 예수의 이름을 전도한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에 대한 언급을 보면 공회를 연 Sanhedrin의 지도자들은 다 하나같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엄격히 지키는 율법으로도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그 어떤 타당한 것도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었기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무데뽀로 추진한 불법적인것이었고 그것도 모잘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때의 사건을 제조작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당사자들이었다. 이렇기에 죄책감이 목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을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앞에 인간의 반응은 간단해야 한다. 그냥 이실직고하고 자백하여 회계하면 된다. 아무리 큰 죄라도 회개하는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커녕 더 큰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죄로 인한 결과, 즉 죄값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이어져 회계까지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얼마나 슬픈가. 그러나, 우리도 같은 행동을 보일때가 많다. 마치 심리학의 fight or flight 반응처럼 죄책감을 크게 느끼는 와중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담대하게(?) 자포자기식으로 그냥 더 큰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해버린다.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면 이렇게 행동하면 않된다. 회계로 직결해 하나님앞에 이실직고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운바된 사도들은 이러한 핍박과 고난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계속 부르심에 충실하다. 사실 여기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은 이 시대 사는 유대인들의 모든 공간적인 환경, 정신적인 삶과 문화를 지배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제일 잘나가는 드라마, 영화, 정치, 경제적 세력들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때는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었다는 것.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세력들 앞에서도 전혀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기본적인 원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다. 그 어떠한 세속의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너무도 단순한 순종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에 칼이나 총이 들어와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때문이다. 이 세상 하늘이 무너져 머리위에 떨어진다해도 육신은 깨져 죽는다해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있기에 우리는 한 발더나가 기뻐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각오가 되있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모습이고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죽음을 각오하며 복음을 위한 육신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그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기꺼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해 나가는 것이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주님, 너무도 편하게 메마른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정작 육체적 핍박이라도 있으면 잠에서라도 깰텐데요. 이러나 풍족한 삶에서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무뎌져 죄에 빠지지않게 말씀으로 깨워주시고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A new robotic cameraman that I ended up purchasing
Self-serving blindspots
Every organization reflects the values and the beliefs of its leader and constituents. And it’s not difficult to observe a gamut of characteristics that flow out of how the organization is run. The best perspective can be gained from inside, of course, regardless how it is viewed from outside. The net effect of an organization and the glow around it is usually not reflected internally. Depending on the purpose of an organization, the externality of net effect of the organization may be of the greater importance than the experience of what is going on internally. However, all organizations concern themselves heavily with the internal experiences of its constituents, especially those with authority and power.
The ideal, Platonic image of a philosopher king may strike as quaint for many, but the health of an organization often depends on it. It seems that the human tendency, unbeknownst to himself, is to set up a multidimensional framework of environment that best serves himself. Acton’s dictum reminds us that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and we see the effects ubiquitously. With authority, power, and influence is typically taken for granted in a handed-down framework, and constituents become somewhat of a captive audience with assumed roles. In many small scale, we see this playing out in cult groups, and there’s only a paper-thin difference when compared to socially accepted organizations. With the right elemental factors, the organization can sustain itself for a long period of time while remaining remarkably ineffective. In this reality, we often trust our leaders, mere human being, with a great risk. Integrity is often cited, but not practiced. Integrity comes with a heavy responsibility that should test the limits of internal conflicts we experience as human beings, but not many individuals are built to withstand such awesome struggle without a sense of abandonment of self. Without such tension at a highly private mental and spiritual space of leaders, we often get cheap imitations that behind a veil of public image turn out to be self-serving individuals to thrive. This is a sad reality of society we live in, and even though we have few examples in history such as Byzantine empire that groomed royal retainers, the modern society has completely abandoned such ideals to allow untamed, and uncultivated anima in the laissez-faire genius of Enlightenment.
安時: 2018年 2月 1日 (木)
2/1/2018 (목)
행 5:12-26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되지만 시기하던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오게 하고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사도들은 순종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그 들을 잡을려고 하지만 따르는 무리가 많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사도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고 예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원래 사두개파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에 큰 비중을 두어 성전의 제사장의 역활을 신앙의 중점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라 정신적으로 성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더 말씀에 충실할려고 했던 이들이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정 반대편에 앉아 심지어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죽였던 사람들. 그들은 복음의 사자들을 옥에 가두고 기회가 있었으면 죽이기까지 했을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알아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바르고 진실된 것을 보이실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다. 영어로는 teachability.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고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말씀에 대한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배우고 순종의 길을 걷기를 아에 생각조차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알고 거기서 그치는 것도 문제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담대함은 더 곤란한 입장이다. 그냥 책을 읽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마음의 문을 닫아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면 나와 자신이 편히 살고 있는데 왜 와서 방해하는 냐란 태도를 취할 사람들이다. 이런 것을 두고 강퍅하다라고 한어로 표현한다. 강퍅한 마음. 하나님이 사도들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동시에 이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나의 마음은 강퍅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진리가 나를 변화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주여, 너무나도 쉽게 강퍅하게 변하는 마음의 주의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여주시고 뜨겁게 하여 나의 토기장이 되시는 주께서 나를 주가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 될 수 있게 빚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온도의 차이
죄인 중에 괴수
烏合之卒
목적 상실에 자신의 분수도 모르면서 옹졸한 자존심만 쌔서 거만하기 짝이 없어 나이값도 몸 값도 못하는 주제파악, 현실과 자신의 감정까지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려고 하는 모임. 이런 사람들은 사실 새운 목적을 같이 달성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빠질 수 있고 덜 일할 수 있는지를 위한 모임인 것 같다. 다음과 같은 형태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 모임 첫 머리에 큰 소리로 자신은 무엇 무엇을 어떤 이유로 안하겠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사람.
- 일년동안 직무유기를 행하면서 정작 일한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만을 언급하는 사람.
- 과거 오래전에 자신이 잘 한것을 살짝 언급하면서 자신을 부추켜 올리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사실도 아닌 것을 마치 사실처럼 단정해 말해 주위 사람들을 벙찌게 만드는 사람.
- 현실과 무관하게 얄팍한 지식과 잘못된 의견을 믿고 단정지어 다른 이를 위한 답시고 말하는 사람.
- 자신이 맡은 일을 무책임한 유치원 어린아이처럼 팽겨쳐 놓고서 무슨 자격으로 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지 의문이 가는 사람.
- 다른 사람이 자신한테 무슨일을 시키는 것 같으면 자신이 시다바리냐고 반응하는 정신이상자.
- 앞에 있는 짓을 하는 사람옆에서 같이 북쳐주고 장구쳐주는 사람.
이런 무리들의 인도자를 자신들이 돈주고 고용했다는라고 생각하면 친절하게 개무시해버린다.
진실이 죽고, 양심이 죽었을까? 단순히 성격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참석원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목사)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5-7
不逞鮮人 (불령선인)
일제강점기때 불온한 조선사람이란 뜻으로 일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이르던 말.
이상이 감옥에서 건강악화로 죽을때의 죄목 이기도 하다.
비겁한 和의 문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라는 말은 성경에서도 나온다 (롬 12:18). 특히 같은 교인끼리는 더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는 매우 많이 나온다. 화목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미덕이다. 그러나 화목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은 아니다. 진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예수를 잘못할 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아픔을 겪으면서 까지도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대 화목을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특히 삶이 더 풍요로와진 요즈음엔 더 그렇다. 진리는 뒷 자석에 앉혔다.
예수가 어떻게 和목하게 돈 바꾸는 이들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덕과 인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푸덤직한 웃음을 얼굴에 띄고 털털한 마음으로 “다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며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측은히 여기실꺼야” 하며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며 나름 고난위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사장들과 협조와 돈 바꾸는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뤄내었을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和 문화적으로 그린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되풀이 돼는 고전부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들리면서 상대의 기분만을 위해 상황을 모면하는 비겁한 문화이다. 그래서 대화 방법도 윗 사람의 기분을 위한 것으로 상단한 발전이 돼어 있고 일본 같이 和를 신격화 시키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공공 장소에서 지켜본적이 있는가? 돌팔매질 안받으면 다행이다. 너 혼자만의 생각을 왜 남에게 억지로 파느냐 부터 시작해서 비논리적인 언론의 자유까지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앞에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와서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지킬 필요까지 있냐? 도리어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 등까지 예수라는 이름에 증오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 많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더 지혜롭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를 전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밟혀도 사람들끼리 화목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욕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리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런한 비겁한 문화 때문에 일제시대에서도 목숨이 아깝지 않았던 극소수의 예수쟁이들만 빼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다 일본 천황의 신전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예수 귀한 그 이름 이란 찬양을 한번이라도 불렀다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면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和를 도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타협할 수 있는 비겁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신앙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禍를 입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