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和의 문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라는 말은 성경에서도 나온다 (롬 12:18). 특히 같은 교인끼리는 더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는 매우 많이 나온다. 화목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미덕이다. 그러나 화목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은 아니다. 진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예수를 잘못할 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아픔을 겪으면서 까지도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대 화목을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특히 삶이 더 풍요로와진 요즈음엔 더 그렇다. 진리는 뒷 자석에 앉혔다.

예수가 어떻게 和목하게 돈 바꾸는 이들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덕과 인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푸덤직한 웃음을 얼굴에 띄고 털털한 마음으로 “다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며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측은히 여기실꺼야” 하며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며 나름 고난위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사장들과 협조와 돈 바꾸는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뤄내었을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和 문화적으로 그린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되풀이 돼는 고전부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들리면서 상대의 기분만을 위해 상황을 모면하는 비겁한 문화이다. 그래서 대화 방법도 윗 사람의 기분을 위한 것으로 상단한 발전이 돼어 있고 일본 같이 和를 신격화 시키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공공 장소에서 지켜본적이 있는가? 돌팔매질 안받으면 다행이다. 너 혼자만의 생각을 왜 남에게 억지로 파느냐 부터 시작해서 비논리적인 언론의 자유까지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앞에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와서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지킬 필요까지 있냐? 도리어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 등까지 예수라는 이름에 증오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 많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더 지혜롭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를 전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밟혀도 사람들끼리 화목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욕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리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런한 비겁한 문화 때문에 일제시대에서도 목숨이 아깝지 않았던 극소수의 예수쟁이들만 빼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다 일본 천황의 신전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예수 귀한 그 이름 이란 찬양을 한번이라도 불렀다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면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和를 도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타협할 수 있는 비겁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신앙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禍를 입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