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의 저온도를 기록했다던 한국의 겨울. 가만히 있어도 맨살이 시릴만큼 추웠나 보다. 그러나 여기는 눈 한번 오지 않고 도리어 가을의 선선한 느낌이나서 아직 입동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밤의 온도가 보통때 보다 낮아 춥다란 느낌이 든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방에 있는 휴대용 난방기를 틀어서 따스함 가운데 포근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남쪽에 있는 직역이라서 그런지 대채적으로 아직까지는 따뜻하다. 추우면 체온의 유지를 위해 더 두꺼운 옷을 끼워입고 따뜻하면 그럴 필요없이 편하고 얇은 옷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것이다.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마치 휴대용 난방기처럼 주위 환경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 바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의 기질의 차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40여년 삶을 살면서 경험했던 독특히 따뜻했던 사람들이 있다. 기질의 열이 아니었다. 성격도 아니었다. 시카고에 있는 무디 신학교를 다닐 때 알고 지냈던 이 전도사님이란 사람이 그 독특했던 사람이다.
나보다는 몇 살 위셨지만 항상 예절을 지켜 대해 주셨고 만나면 항상 이상하게 과분한것 같은데 과하지 않는 기쁨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학교에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언급만 나와도 환하게 미소를 지게하는 인물이었다. 이 전도사님을 만나면 일단 상대를 진정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 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 만나면 마치 오랬동안 멀리 지내다가 다시 만난 친구처럼 그는 깊은 친근감으로 접근해 가까이 와서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실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는 이런 태도는 당연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儒敎的으로 엄격한 어른들의 무언이 가득했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생소하다 못해 과잉반응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전도사님은 이런 사람을 향한 태도를 매일 뜨는 태양처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나는 무척 궁금했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현실에서 만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와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했었다. 그 온기의 비밀은 다름아닌 은혜앞의 겸손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집에 오면 반겨주는 강아지를 보라. 주인의 과거를 따지거나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집개는 집사람을 마치 재일 사랑하는 사람처럼 반겨준다. 집에 올때 그렇게 반김을 받을 때 얼마나 기쁘고 기분이 좋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이 타인을 집개처럼 반겨주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전도사님은 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라고 일부러 그렇게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사람들을 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 성격은 내성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자신을 개 만큼 낮추었던 이 전도사님이었다. 그렇다. 버려진 개보다도 못한 우리를 구원해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인데 아무데다가도 쓸대없고 구차한 인간적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그리스도의 촛대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찬 바람 쌩쌩끌어오는 냉장고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 전도사님의 따스함은 분명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 같아 더 그립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