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에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한 목사가 교회 목회에 대해 나름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교인들이 대부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별 걱정들이 없고 다 나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 이제는 설교나 목회 방침이 그런 바뀐 성도들의 삶에 맞춰 성도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교회를 다니게 하는 것을 돕는게 목사의 일이다 라는 말이었다. 목에까지 넘치는 차오르는 답답함이 있었지만 감히 나이도 어린 전도사가 목사들 끼리의 대화에 끼어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럽의 國敎化된 교회들의 역사와 현대화 되어 어떻게 썩었는지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목자들이 그런 정신상태인데 성도들에게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목자 아닌 평신도들의 소그룹에서 들어가 봐도 같은 정신이 여러 모습으로 보인다. 선교? 십자가를 지는 신앙? 자신을 부인하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글쎄… 예수님이 계속 반복해서 여러번 말씀하신 것들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10:38-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텍사스 주에 제일 큰 교회 중 하나가 Joel Osteen 의 Lakewood 교회이다. 오스틴 목사가 가르치는 것은 단순하다. 신학이나 바른 성경말씀의 이해는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로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건강과 부를 얻는 것이다. 인터뷰에서 죄에 대한 질문을 했을때 그는 촛점을 죄에서부터 옮겨 이 세상 삶속에서 불행하고 실패하고 우울한 기분에 맞추고 그런 것에서 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삶과 메시지로 가르치셨던 천국복음과 상반되는 망언이다. 철저한 물질주의적 인본주의적 기복신앙. 지옥에서부터 사탄이 만약 성경말씀을 비틀어서 가르친다면 오스틴 목사가 전하는 복음 그대로를 전할 것이다. 죄에서부터의 회계도 없고 요 16:8의 성령님의 죄에 대한 책망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부터의 구원도 없다. 마치 무슬렘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되 회계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된 것처럼 Lakewood 의 성도들도 그런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씨름이란 상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맞대어 비틀어서라도 그 형태에 금상첨화 격으로 덧붙인 것처럼 보완하는 상태가 된다. 비록 상대의 힘과 상충되는 힘을 가해야 하는 상태이지만 보어적으로는 그 상대란 대상을 재일 닮은 주제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것이고 그 만큼 하나님에 대해 밀접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려오는 힘을 맞대하며 미는 힘이 적절해야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허공에 힘이 가해지는 것은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힘이다. 검도대련를 위한 기본적 연무에서도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의 거울이 되기를 노력하는 부분이 중심에 있다. 더 높은 수준의 劍士의 표현으로는 자신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의 거울처럼 움직인다라고 한다. 누구와 씨름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 어떤 형태의 만남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친밀함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야곱의 절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과의 의도치 않았던 씨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님에게 죽을 수도 있다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먼저 있었기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걸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말씀에 대한 확신을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형을 만난다 할찌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애원하다시피한 마음의 상태에서 자신이 씨름을 한 상대가 하나님이었다는 것도 모른체 씨름을 하게 된다. 씨름한 결과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게된다. 여러 가능한 이름 중에 하나님과 씨름한다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는데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과 씨름 하는 삶이다. 하나님께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이 가고, 어제보다 오늘 더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매일 매일 삶을 아주 편하고 즐겁게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라. 나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라. 핍박을 받고 사람들이 너를 죽일 것이지만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를 죽였는데 제자된 너희 들이 나보다 더 낫다라고 착각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전하시고 심지어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후에 만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들의 삶을 순종이란 삶으로 다 하나같이 순교를 맞이했었다. 우리의 삶 또한 치열하게 돈버는 일을 가지고 나중에 은퇴해서 어떻게 더 편하게 살까하는 것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이 더 중요해진 자들이나 다름없다.
이런 시대, 즉 거짓된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르치고 죄를 고취하는 삶을 하나의 생활방식이라고 가르치는 이런 시대에 더욱 정신차려야 한다.
Ref: 창 31-32, 마 10:2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