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 지역주의
- 미국을 보는 관점
-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 북한을 보는 관점
-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무속신앙
- 유교
- 불교
-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