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s: mhan

安時: 2018年 3月 6日 (火)

(16:19 ~ 17:34) 바울은 데살로니아, 베뢰아, 아덴(Athens)에서 복음을 전한다. 데살로니아의 유대인들은 계속해 따라다니며 군중들을 격분시켜 복음을 반대하였고,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아덴의 사람을 쟁론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행 18:1-11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간다. 같은 업종(장막만들기)에서 일하던 이탈리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같이 있으며 매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바울과 합류하였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매도하자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며 이제부터는 유대인들에게 가지않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며 회당을 나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니 회당의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신 후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아굴라는 로마에서 전도를 받은 유대 기독교인이며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 로마에서는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서로 분쟁이 심화되서 그런지 아니면 복음으로 많은 도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해서 그런지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그냥 다 몰아낸다. 이 때 나오게 된 아굴라다. 나중에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까봐 사역자로서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교회에서 중세때부터 시작된 성직자들은 교회 사역에만 전념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인간이 만들어넨 종교적 행위이며 인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될려면 사역자들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담당하는게 교회라는 인식에서 나와야 하고 교인들도 다른 업종에서 일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을 완전한 사역자로 받아드리지 않는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일단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의해 사역이 되고 안되고라는 썩은 인식이 자리잡혀 있는 한 교회는 계속 썩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는 행위는 옷을 털며 그들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피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의 나와 있는 파수군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할일을 다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해진 말씀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 들의 (영적인) 죽음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뜻. 그렇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언급 된 것 처럼 제일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나가 멀리 간 것도 아니라 바로 옆집에 머물게 된 바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감정이었겠는지는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이것에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던 바울은 얼굴이 철판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 너를 지키겠다는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 끝날때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바울과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5日 (月)

행 17:16-34

아덴에 온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숭배로 가득찬 것을 보고 매일 회당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전도하였다. 에비구레오(epicureans)와 스도이고(stoics) 철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바울을 아레오바고(Aeropagus)로 대리고와 쟁론한다. 바울은 그 들이 모시고 있던 무명의 신을 소개한다고 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를 들은 자 중에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이 있엇고 바울은 여기서 떠난다.

安時: 2018年 3月 4日 (日)

행 16:19-17:15

무당 소녀의 주인이 소녀에게서 귀신이 나간것을 보고 더 이상 돈을 벌수 없게된 것을 알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로마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둔다. 한밤중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사슬이 풀렸다. 지키고 있던 교도소장이 이것을 보고 자살을 할려 할때 바울이 우리가 다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그를 중단 시키자 그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다. 다음 날 교도소장에게 어제 옥에 가둔 사람들을 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두었으니 그들이 직접와서 풀으라고 반박하자 명령을 전한 경찰들이 다시 돌아가 이것을 전하니 바울의 일행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듣고 상관들이 두려워했다. 상관들이 직접와서 사과하고 그들을 옥에서 나가게 한다. 일행은 루디어 도시에 들려 교회를 격려하고 몇 도시들을 통과해 데살로니가로 온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카이저말고 예수가 왕이라한다고 하며 도시 전체를 격분하게 만들어 일행을 초청했던 야손을 잡아왔다. 야손을 돈을 주고 야손과 야손의 사람들이 풀려났다. 바울의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베뢰아의 사람들은 열심을 내어 말씀을 받고 성경 말씀을 매일 보며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 것인지 공부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사람들을 격분시키니 일행은 바울을 아덴에 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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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示: 大學之道 八條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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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時: 2018年 3月 2日 (金)

Paul's Second Missionary Journey, 49-52 AD

Illustration Credit: Mission Bible Class, https://missionbibleclass.org

행 16:6-18
지금의 터키의 여러 도시(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서쪽으로 순행하나 어떤 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건나가고 아시아 동쪽으로는 가지않게 되다가 바울의 환상에서 마게도냐의 남자가 그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마게도냐로 향한다. (지금의 터키)드로스에서 마게도냐의 빌립보까지 가서 머물다가 기도하는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옷단을 파는 여자)에게 전도해 그녀가 세례를 받게되고 그녀의 집안또한 구원을 받는다. 기도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바울에게 어떤 점치는 소녀가 몇일을 계속 따라다니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며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고 외치니 바울이 귀찮게 여겨 소녀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낸다.

마게도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을 아시아로 돌리셨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서 중동지방에서 유럽쪽으로 복음이 건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의 터키에서 그리스 북쪽에 있는 나라인 마게도냐를 복음이 정복하는 순간이다. 불과 300년전에 알렉산더 왕이 온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의 나라는 몇 세대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고 없어졌지만 그 위대했던 인간국가의 왕의 모국이였던 마게도냐에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고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아직도 살아있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 그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루디아. 유럽에서의 첫 기독교이되는 영광을 지니게 된다. 단지 기도하러 나왔다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는 상황을 본다. 고넬료처럼 복음을 들으러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의 마음 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밭은 겸허함으로 일궈진 하나님의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곳이다. 루디아는 이 도시의 유명 상품인 옷단을 판매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하인들도 여러 명 거닐며 큰 집도 있던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그 녀의 집을 빌립보의 첫 교회로 세우신다.

귀신들린 소녀. 그 시대에 상업적 목적으로 점을 치는 곳은 많았다. 마치 한국의 무당같이 어떤 귀신을 받아들여 그 어린 삶이 사람들의 돈버는 수단으로 사용됬던 것이다. 귀신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위협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과 성경의 여러가지 예를 보면 귀신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그냥 알고만 있다는 것에 끝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에 있어서 귀신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누구를 따르는 삶을 사는냐에서 달라진다. 귀신은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을 일삼아 살아가는 존제이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무력하지만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지옥으로 대려갈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존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케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주님,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민감하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육신은 너무나 약하나이다, 그러나 육신의 것들은 뒤로하게 하시고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것을 더 먹고 더 중요시 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직장에서도 이런 거짓을 자주 보는데 그 때부터는 그 당사자가 쓰레기처럼 보이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安時: 2018年 3月 1日 (木)

행 15:36-16:5
바울은 바나바에게 전에 말씀을 선포한 교회들을 방문하자고 하자 바나바는 요한 (헬라어 이름: 마가) 을 같이 대리고 갈려고 했으나 바울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에게서 떠나 일을 같이 하지 않은 요한을 대리고 가지 않고 싶어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서로 떨어지게 된다. 바나바는 요한을 대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대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를 방문한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할 때 제자 디모데를 만난다.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혼혈아이고 이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막기위해 디모데를 할레를 시키고 같이 사역을 다닌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을 교회들과 나누니 교회들이 믿음에서 격려를 얻고 계속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하였다.

요한을 두고 여태 같이 사역해 왔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다. 사실 요한이 어떤 이유로 밤빌리아에서 그 들을 떠났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이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었다. 바울은 이것을 이유로 요한을 대려가지 말자고 한다. 바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일에나 꾸준하지 못하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조금의 희생도 하지 않을려고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로 대는 사람은 나도 개인적으로 같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같은 사람은 매우 흔하다. 이런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바울과 더 동의하는 편에 있다.

동시에 요한을 받아드리고 다시 한번 찬스를 주는 바나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인물들인지 엿보이게 하는 본문 말씀이기도 하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또한 사역으로 회복했던 인물이다. 바울을 죽일려했던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한 동안 먼 곳으로 가 있었고 바나바가 직접 가서 바울을 대리고 왔서 복음 사역을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다. 이 계기로 요한(마가)는 나중에 바울을 인정을 다시 회복하고 더 나가 후에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된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그냥 사도행전 12장에서 언급이 끝나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보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바나바가 대인배같은 인물인것 같다. 그렇다고 바울이 소인배란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기준이 더 높았던 바울에 비해 바나바같은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회복의 기회를 얻고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대로 사용하시고 준비된 만큼 사용하신다. 좋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지므로 더 많은 교회들이 이들의 사역의 해택을 본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이행. 그리고 그 분의 은혜에 비춰볼때 바나바와 같이 타인에게 챤스를 주고 관계의 회복을 허락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다음은 혼혈아인 디모데가 나온다. 본문 말씀에는 그는 이미 사역에 충실하고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사도들에게 추천받은 인물로 기록되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되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던 바울은 할레를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계속 충돌하고 싶지 않아 디모데에게 할레를 받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주께서 가르치신 것 처럼 우리에게 죄진 자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바나바와 같이 더 큰 은혜로 사람들을 대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8日 (水)

행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와 바울를 다시 안디옥으로 보낼 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하고 같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 내용: “우리가 보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서 너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전할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너희에게 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않아 다음과 같이만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우상에게 주어진 음식과 피가 흐르는 음식 또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며, 음행에서 멀리하라.”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하고 교회에서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아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와 연관해 세가지가의 주동사가 있다. (1) 보냄 (2) 읽음 (3) 가르침.

(1) 실라와 유다가 교회 장로들로부터 선택받아 가게된다. 그들은 형제들중의 인도자라고 나와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교회의 인도자들은 지혜와 성령충만이라는 두가지의 강령에 따라 지정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택될때 이 두가지의 기본적인 강령을 간과하는 것을 너무 흔히 본다.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사회적 지휘가 높거나 유명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교회의 물질적인 것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 다 지혜나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지혜롭다고 말할때는 근본적으로 바른 인신론적 바탕에서 의미하는 지혜이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 누군가 지혜롭다고 말할때와는 다른 지혜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바로 알고 인간의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위에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다. 여우처럼 약아 빠져서 계산에 빠르고 모든 것을 다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세상의 물욕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절대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서의 첫 강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신론적 (epistemic) 바탕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기본적 틀일 뿐이다. 다음은 성령충만. 요 16:8에 성령님의 3가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 의, 그리고 다가올 심판. 그리고 모든 진리로 (v13) 인도하신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 주님의 의를 입은 사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의 기본이라 하겠다. 회계나 주에 대한 믿음은 자연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니 많은 교회가 멍멍이판일수 밖에 없지않는가.

(2) 편지를 읽음. 27권의 신약 중 21권이 편지이다. 서신서라고 한다. 그 중에 바울의 서신이 제일 많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인 것 처럼 편지를 읽고 모두 기뻐하고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날의 교회 또한 이 편지를 읽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딱딱한 틀에 익숙해져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앞에서 읽고 교인들은 모두 다 같이 들으며 그것을 통해 기뻐하는 전통이 없어진 것이다. 구약에서도 제사장 에즈라 하나님의 성전이 제건된 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사람들이 회계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 갈급한 지금이다.

(3) 가르침. 교회의 3가지 대강령중 교육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육. 선교. 친교. 바르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움의 근본이다.

주님, 바른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더 성장해 나가며 순종으로 열매맺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7日 (火)

행 15:12-21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셨는지 말하고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구약의 이사야서와 아모스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림을 받으리라하는 예언의 말씀을 언급하여 이렇게하여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교류를 위해 세가지를 지키기를 권고한다: (1) 우상에게 제사지낼때 사용된 음식을 피한다 (2) 목졸려 죽여진 고기를 피한다 (3) 피가 아직 있는 음식을 피한다. 그리고 권고가 아닌 꼭 지켜야 할 도덕적 법: 음행에서 멀리한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이것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한다. 여기서 공식적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전해졌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야고보. 그는 예수님의 이복형제였다. 이 당시 그가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 역활을 했고 그리고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율법을 꼼꼼이 지키는 유대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었다. 이러한 야고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기독인들이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여겼던 기본적인 음식에 대한 율법과 깨끗한 도덕적 삶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 당시 많은 이방인들은 헬라와 로마 문화와 종교에 배어있던 물란한 요소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요즈음 남색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커져 미국 문화와 교육에 번번히 나타나 교만한 행각을 보이는 것 처럼 그 당시에도 인간의 문화는 여전히 타락의 습성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의 문화만 그럴까… 한국 문화도 보면 과거 술집이나 어두운곳에서나 보였던 것들이 대중문화화 되어 만연히 보여지고 있는 추세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극치로 야비하고 추한 문화가 대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1서 2장에서 나온 것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문화적으로 거리낀다 생각되고 어렵다라고 생각되면 너무 쉽게 구약은 폐지되었다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율법을 폐지시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셨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율법이다. 너무나 더러워져 무엇이 더러운것인지 모르게 하는 대중문화. 복음으로 거듭나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택받았으면 토해내 버린 것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겠다. 주님, 주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6日 (月)

행 15:1-11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전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큰 마찰이 생겨 토론을 하고 이것에 대해 두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갔다오기로 한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선포하지만 바르세인들의 당에 속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믿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토론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역사하사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게 되었고 그 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니 어찌하여 자신들의 조상이 짊어졌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말한다. 자신들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처럼 그들 또한 은혜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Soli gratia. Grace alone. 오로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이 극락에 도달하는 여부나 다음 환생의 상태를 업보라는 것에 의존 되있다고 한다. 엄격히 보면 하나님이 필요없는 구원론들이다.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업으로 인해 어떤 우주적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람의 힘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택과 구원을 엿볼수 있다. 이런것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전적이며 파격적인 은혜를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별함을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또한 다른 세상 종교들 처럼 자신들의 업을 기준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시작서 부터 계획하신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이것이 더 확실해 졌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디어 예수를 통해 완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사람의 이 만든것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회방할려고 한다. 사람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주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