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安時: 2018年 3月 2日 (金)

Paul's Second Missionary Journey, 49-52 AD

Illustration Credit: Mission Bible Class, https://missionbibleclass.org

행 16:6-18
지금의 터키의 여러 도시(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서쪽으로 순행하나 어떤 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건나가고 아시아 동쪽으로는 가지않게 되다가 바울의 환상에서 마게도냐의 남자가 그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마게도냐로 향한다. (지금의 터키)드로스에서 마게도냐의 빌립보까지 가서 머물다가 기도하는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옷단을 파는 여자)에게 전도해 그녀가 세례를 받게되고 그녀의 집안또한 구원을 받는다. 기도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바울에게 어떤 점치는 소녀가 몇일을 계속 따라다니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며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고 외치니 바울이 귀찮게 여겨 소녀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낸다.

마게도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을 아시아로 돌리셨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서 중동지방에서 유럽쪽으로 복음이 건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의 터키에서 그리스 북쪽에 있는 나라인 마게도냐를 복음이 정복하는 순간이다. 불과 300년전에 알렉산더 왕이 온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의 나라는 몇 세대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고 없어졌지만 그 위대했던 인간국가의 왕의 모국이였던 마게도냐에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고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아직도 살아있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 그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루디아. 유럽에서의 첫 기독교이되는 영광을 지니게 된다. 단지 기도하러 나왔다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는 상황을 본다. 고넬료처럼 복음을 들으러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의 마음 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밭은 겸허함으로 일궈진 하나님의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곳이다. 루디아는 이 도시의 유명 상품인 옷단을 판매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하인들도 여러 명 거닐며 큰 집도 있던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그 녀의 집을 빌립보의 첫 교회로 세우신다.

귀신들린 소녀. 그 시대에 상업적 목적으로 점을 치는 곳은 많았다. 마치 한국의 무당같이 어떤 귀신을 받아들여 그 어린 삶이 사람들의 돈버는 수단으로 사용됬던 것이다. 귀신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위협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과 성경의 여러가지 예를 보면 귀신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그냥 알고만 있다는 것에 끝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에 있어서 귀신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누구를 따르는 삶을 사는냐에서 달라진다. 귀신은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을 일삼아 살아가는 존제이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무력하지만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지옥으로 대려갈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존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케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주님,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민감하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육신은 너무나 약하나이다, 그러나 육신의 것들은 뒤로하게 하시고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것을 더 먹고 더 중요시 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1日 (木)

행 15:36-16:5
바울은 바나바에게 전에 말씀을 선포한 교회들을 방문하자고 하자 바나바는 요한 (헬라어 이름: 마가) 을 같이 대리고 갈려고 했으나 바울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에게서 떠나 일을 같이 하지 않은 요한을 대리고 가지 않고 싶어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서로 떨어지게 된다. 바나바는 요한을 대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대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를 방문한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할 때 제자 디모데를 만난다.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혼혈아이고 이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막기위해 디모데를 할레를 시키고 같이 사역을 다닌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을 교회들과 나누니 교회들이 믿음에서 격려를 얻고 계속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하였다.

요한을 두고 여태 같이 사역해 왔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다. 사실 요한이 어떤 이유로 밤빌리아에서 그 들을 떠났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이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었다. 바울은 이것을 이유로 요한을 대려가지 말자고 한다. 바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일에나 꾸준하지 못하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조금의 희생도 하지 않을려고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로 대는 사람은 나도 개인적으로 같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같은 사람은 매우 흔하다. 이런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바울과 더 동의하는 편에 있다.

동시에 요한을 받아드리고 다시 한번 찬스를 주는 바나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인물들인지 엿보이게 하는 본문 말씀이기도 하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또한 사역으로 회복했던 인물이다. 바울을 죽일려했던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한 동안 먼 곳으로 가 있었고 바나바가 직접 가서 바울을 대리고 왔서 복음 사역을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다. 이 계기로 요한(마가)는 나중에 바울을 인정을 다시 회복하고 더 나가 후에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된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그냥 사도행전 12장에서 언급이 끝나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보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바나바가 대인배같은 인물인것 같다. 그렇다고 바울이 소인배란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기준이 더 높았던 바울에 비해 바나바같은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회복의 기회를 얻고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대로 사용하시고 준비된 만큼 사용하신다. 좋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지므로 더 많은 교회들이 이들의 사역의 해택을 본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이행. 그리고 그 분의 은혜에 비춰볼때 바나바와 같이 타인에게 챤스를 주고 관계의 회복을 허락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다음은 혼혈아인 디모데가 나온다. 본문 말씀에는 그는 이미 사역에 충실하고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사도들에게 추천받은 인물로 기록되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되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던 바울은 할레를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계속 충돌하고 싶지 않아 디모데에게 할레를 받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주께서 가르치신 것 처럼 우리에게 죄진 자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바나바와 같이 더 큰 은혜로 사람들을 대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8日 (水)

행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와 바울를 다시 안디옥으로 보낼 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하고 같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 내용: “우리가 보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서 너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전할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너희에게 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않아 다음과 같이만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우상에게 주어진 음식과 피가 흐르는 음식 또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며, 음행에서 멀리하라.”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하고 교회에서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아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와 연관해 세가지가의 주동사가 있다. (1) 보냄 (2) 읽음 (3) 가르침.

(1) 실라와 유다가 교회 장로들로부터 선택받아 가게된다. 그들은 형제들중의 인도자라고 나와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교회의 인도자들은 지혜와 성령충만이라는 두가지의 강령에 따라 지정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택될때 이 두가지의 기본적인 강령을 간과하는 것을 너무 흔히 본다.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사회적 지휘가 높거나 유명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교회의 물질적인 것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 다 지혜나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지혜롭다고 말할때는 근본적으로 바른 인신론적 바탕에서 의미하는 지혜이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 누군가 지혜롭다고 말할때와는 다른 지혜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바로 알고 인간의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위에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다. 여우처럼 약아 빠져서 계산에 빠르고 모든 것을 다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세상의 물욕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절대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서의 첫 강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신론적 (epistemic) 바탕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기본적 틀일 뿐이다. 다음은 성령충만. 요 16:8에 성령님의 3가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 의, 그리고 다가올 심판. 그리고 모든 진리로 (v13) 인도하신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 주님의 의를 입은 사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의 기본이라 하겠다. 회계나 주에 대한 믿음은 자연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니 많은 교회가 멍멍이판일수 밖에 없지않는가.

(2) 편지를 읽음. 27권의 신약 중 21권이 편지이다. 서신서라고 한다. 그 중에 바울의 서신이 제일 많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인 것 처럼 편지를 읽고 모두 기뻐하고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날의 교회 또한 이 편지를 읽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딱딱한 틀에 익숙해져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앞에서 읽고 교인들은 모두 다 같이 들으며 그것을 통해 기뻐하는 전통이 없어진 것이다. 구약에서도 제사장 에즈라 하나님의 성전이 제건된 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사람들이 회계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 갈급한 지금이다.

(3) 가르침. 교회의 3가지 대강령중 교육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육. 선교. 친교. 바르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움의 근본이다.

주님, 바른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더 성장해 나가며 순종으로 열매맺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7日 (火)

행 15:12-21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셨는지 말하고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구약의 이사야서와 아모스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림을 받으리라하는 예언의 말씀을 언급하여 이렇게하여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교류를 위해 세가지를 지키기를 권고한다: (1) 우상에게 제사지낼때 사용된 음식을 피한다 (2) 목졸려 죽여진 고기를 피한다 (3) 피가 아직 있는 음식을 피한다. 그리고 권고가 아닌 꼭 지켜야 할 도덕적 법: 음행에서 멀리한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이것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한다. 여기서 공식적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전해졌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야고보. 그는 예수님의 이복형제였다. 이 당시 그가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 역활을 했고 그리고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율법을 꼼꼼이 지키는 유대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었다. 이러한 야고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기독인들이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여겼던 기본적인 음식에 대한 율법과 깨끗한 도덕적 삶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 당시 많은 이방인들은 헬라와 로마 문화와 종교에 배어있던 물란한 요소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요즈음 남색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커져 미국 문화와 교육에 번번히 나타나 교만한 행각을 보이는 것 처럼 그 당시에도 인간의 문화는 여전히 타락의 습성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의 문화만 그럴까… 한국 문화도 보면 과거 술집이나 어두운곳에서나 보였던 것들이 대중문화화 되어 만연히 보여지고 있는 추세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극치로 야비하고 추한 문화가 대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1서 2장에서 나온 것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문화적으로 거리낀다 생각되고 어렵다라고 생각되면 너무 쉽게 구약은 폐지되었다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율법을 폐지시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셨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율법이다. 너무나 더러워져 무엇이 더러운것인지 모르게 하는 대중문화. 복음으로 거듭나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택받았으면 토해내 버린 것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겠다. 주님, 주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6日 (月)

행 15:1-11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전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큰 마찰이 생겨 토론을 하고 이것에 대해 두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갔다오기로 한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선포하지만 바르세인들의 당에 속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믿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토론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역사하사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게 되었고 그 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니 어찌하여 자신들의 조상이 짊어졌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말한다. 자신들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처럼 그들 또한 은혜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Soli gratia. Grace alone. 오로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이 극락에 도달하는 여부나 다음 환생의 상태를 업보라는 것에 의존 되있다고 한다. 엄격히 보면 하나님이 필요없는 구원론들이다.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업으로 인해 어떤 우주적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람의 힘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택과 구원을 엿볼수 있다. 이런것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전적이며 파격적인 은혜를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별함을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또한 다른 세상 종교들 처럼 자신들의 업을 기준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시작서 부터 계획하신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이것이 더 확실해 졌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디어 예수를 통해 완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사람의 이 만든것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회방할려고 한다. 사람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주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5日 (日)

행 14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니 많은 사람들이 믿었으나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제자들을 돌로 쳐죽일려고 하여 떠나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루스드라에서 다리가 불구인 사람을 치유하여 그 사람이 다시 걷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를 헬라의 신으로 여기고 그들의 사제들이 와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번제를 드릴려고 하니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 자신들은 사람이며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며 그들을 말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번제를 할려고 한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부터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이곳까지 따라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죽이고 죽은 줄 알고 바울의 시체를 도시 밖에 버린다. 제자들이 바울 주위에 모이니 바울은 다시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는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거치면서 제자들을 격려하며 많은 핍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교회마다 다니며 기도와 금식을 하고 안수하며 장로들을 세웠다. 몇 도시를 더 순행하며 다시 안디옥에 와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것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을 알렸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지옥에 가두실때까지는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 세상에는 만연할 것이다. 바울은 돌에 맞아 정신을 잃기까지해서 시채처럼 도시 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마다 항상 반대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일에는 항상 어떤 반대하는 세력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역사한다. 즉 사탄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침범하는 자, 즉 싸우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듯이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 싸워나가는 것이다. 육신과 혈육을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즉 사람들과 머리 맞대고 싸워나가는 싸움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우는 싸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홀리었는지 어떤 세력이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영적인 눈이 어둡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사용되는 도구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무리 가까운 혈육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없으며 이 육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온전히 주의 뜻을 바로 인식하고 이루는데 뱀같이 지혜롭게 하시고 비둘기같이 순수하게 하소서. 이 주일을 분별하여 주님에게 연랍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安時: 2018年 2月 23日 (金)

행 13:44-52
다음 안식일에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을 반대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지만 받지 아니하므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해진다.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지도층과 부유층의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만든다. 제자들은 발에 먼지를 털고 이코니엄으로 기쁨과 성령 충만함으로 가게된다.

기쁨이란 나 자신의 것보다 더 큰 것에 대해 나아갈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 얼마나 기쁜 것인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제자들의 마음. 그 가운데 받는 핍박과 적들의 공격은 기쁨을 더하는 화살이요 주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마음은 하늘을 비상하리요. 주님, 땅에 묻혀 썩지 아니하는 씨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주를 위해 나 자신을 잊고 주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저 높은 것과 더 큰 것, 즉 하나님의 비젼을 바라보고 기쁨과 성령충만으로 앞으로 전진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2日 (木)

행 13:32-43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 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이 죄에서 자유케 하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자유케 된다는 복음을 알린다. 회당의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꼭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며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으라고 격려한다.

찬송가 268장
1.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 육체의 정욕을 이길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3. 눈보다 더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4.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산더미 같은 나의 이 영혼을 주의 피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시고 온전히 눈이 주님 만을 바라는 하루가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1日 (水)

행 13:13-31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안식일날 버가의 회당에서 앉아 있으니 회당 지도자가 권할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하자 바울이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선택하사 이집트에서 크게 하셨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사 40년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참으신 후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었다. 이것이 450년 동안의 일이었고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법관들)들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해서 40년동안 사울을 세우셨고 그 이후 다윗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다윗의 자손으로 언약하신대로 구원자 예수를 주셨다. 예수가 오기전에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그가 아니요 나는 그의 신발 끈 조차 매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 하셨다. 이 구원의 메시지 (복음) 이 우리에게 선포되었으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매 안식말마다 예수를 예언하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를 몰라보고 말씀도 이해 못해 그를 처벌함으로 예언의 말씀을 성취시키었다. 죽을 죄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은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에 처해지기를 간구했고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나서 그를 무덤에 옮기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바울의 사역이 시작된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다. 버가에서 선포되었던 바울의 메시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구약과 신약의 너무 깊은 선을 그어버린 이해는 위험한 성경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대한 것들이 구원 역사에 흐름에 일맥 상통하는 것들이고 그 가운데 약속하셨던 것들이 예수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본다. 즉 성경 전체의 하나님을 바로 아는 바탕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 타락했던 인간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은 무리들을 선택하셔서 인류의 진실된 역사의 기록을 보존케 하시고 백성들을 대하시면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시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재일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구약의 성경 말씀을 달달 외우고 있었던 바울 (히브리어 이름: 사울) 이었다. 불과 짧은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에 불을켜 그리스도인들을 다 전멸시켜 죽여버릴려했던 바울. 그 만큼 하나님의 사명을 뜨겁게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지금은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유대인 누구보다도 성경을 더 잘 알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고 어떻게 예수를 통해 그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었는지 설명할 줄 알 수 있었던 사람이 바울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우연이란 없다.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선하시고 좋으신 뜻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주님, 사도 바울을 준비하신 과정을 보며 그 아무리 최악의 상황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 일어나는 일 가운데 불안속에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주관아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승리하게 인도하여 주소서. 주의 나라임하사 주의 뜻을 이 삶을 통해 이루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바울 일행은 도착한 후 첫 안식일 아침에 회당에서 바울의 첫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구약시대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역사하심이 지금까지 어떻게 다윗의 후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까지 어떻게 구원이 역사가 성취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스테반은 모세에 집중하였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구약시대에 행하신 역사와 다윗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복음 성취를 위하여 오신것을 전파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예수를 박해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정반대인 복음 증거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면서 복음 증거에 앞장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삶되게 하시고 모든것을 그리스도인으로써 감당하는 삶되게 하시고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 중심이 되는 삶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도 부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安時: 2018年 2月 20日 (火)

행 13:1-12
안디옥의 교인들이 예배와 금식을 하는 중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신 일을 위해 구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를 하고 보냈다. 실루기아와 구브로를 통해 살라미에 도착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이때 요한이 그들을 도왔다. 바보라는 곳에 도착했을때 서기오 바울이라는 지방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했으나 그와 같이 있던 마술사, 또는 거짓 선지자 바예수 자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반대하여 총독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성령에 충만했던 바울은 그를 똑바로 보고 다음을 말한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즉시 그는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 자신의 손을 잡고 인도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총독은 예수를 영접해 믿기 시작했고 이 기적을 보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워했다.

초기 교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힘을 쓰고 그런 중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교회란 단어는 헤라어 ecclesia 에서 오는 말이다, 즉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건물이 아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은 만인의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라 (이사야 56:7) 말씀을 하셨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마치 구약의 말씀을 알고 따라하는 듯 모일 때마다 같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면 같이 모여 예배하는 중에 잠깐 기도하는 것 빼고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특별 기도회가 아닌 이상 별로 기도를 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행정모임이나, 같이 먹는 친교모임, 아니면 어떤 강사를 듣는 집회 모임, 또는 교육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다 필요한 모임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뜻하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리라” 하는 모임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상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기도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볼일만 하거나 곧장 만날 사람과 대화를 하며 사람의 뜻을 이루어 가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장소로 보여지지 않을때가 있다. 사람들과 같이 모이면 수다만 떠는 것을 더 좋아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 모임의 제일 큰 목적은 같이 모여 기도하라고 있는 것이다. 교회서 성가대 모임, 성경공부 모임, 다 좋지만 모여 더 자주 기도를 같이 하고 그냥 성경 말씀을 돌아가 읽으며 선포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겠다.

바나바와 바울이 간 바보(Paphos)라는 곳에 사탄이 바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뜻은 ‘예수의 아들’, 로마(헬라)식 이름은 엘루마(Elymas)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 당 시대 발음은 예슈와 구약의 여호수아(예호슈아; 뜻: 구원의 하나님)란 이름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Yeho-shua = Ye-shua).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사람을 멀리할려고 하는 일을 볼 수 가 있다. 그는 직업은 마술사라고 소개된다. 옛 개역한글판에는 박수. 즉 고대시대에 흔히 점쟁이 (거짓 선지자)역활을 하면서 치유를 한답시고 무슨 주문을 외우거나 사람에게 약같은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말했다. 여기서 총독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총독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그를 장님으로 만들고 총독은 복음을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설교 들을 종합해 분석해 보면 돈과 물질에 대한 설교가 제일 많으시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란 메시지이시다. 창세기서 하나님은 물질을 다스리라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죄로 인해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서 창조의 질서가 깨진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에서 제일 많이 듣는 것이 자신들의 돈벌이 생활로 바뻐서라는 말이다.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노예.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것 처럼 그것이 당연히 사람살이의 이치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기까지하다. 마법사 엘루마가 당당했던 것 처럼. 헌금에 대해서 아나니아 부부처럼 그 자리에서 죽거나 엘루마처럼 장님이 되는 일이 많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특별히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 같다. 그러나, 죽이시고 장님이 되게 하지 않는다고 거만히 삶을 사는 사람들은 경고를 받고 회계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든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의 눈 앞에 펼쳐저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치 않은 것은 회계하게 하시고 삶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