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비겁한 和의 문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라는 말은 성경에서도 나온다 (롬 12:18). 특히 같은 교인끼리는 더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는 매우 많이 나온다. 화목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미덕이다. 그러나 화목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은 아니다. 진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예수를 잘못할 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아픔을 겪으면서 까지도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대 화목을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특히 삶이 더 풍요로와진 요즈음엔 더 그렇다. 진리는 뒷 자석에 앉혔다.

예수가 어떻게 和목하게 돈 바꾸는 이들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덕과 인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푸덤직한 웃음을 얼굴에 띄고 털털한 마음으로 “다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며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측은히 여기실꺼야” 하며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며 나름 고난위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사장들과 협조와 돈 바꾸는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뤄내었을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和 문화적으로 그린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되풀이 돼는 고전부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들리면서 상대의 기분만을 위해 상황을 모면하는 비겁한 문화이다. 그래서 대화 방법도 윗 사람의 기분을 위한 것으로 상단한 발전이 돼어 있고 일본 같이 和를 신격화 시키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공공 장소에서 지켜본적이 있는가? 돌팔매질 안받으면 다행이다. 너 혼자만의 생각을 왜 남에게 억지로 파느냐 부터 시작해서 비논리적인 언론의 자유까지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앞에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와서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지킬 필요까지 있냐? 도리어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 등까지 예수라는 이름에 증오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 많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더 지혜롭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를 전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밟혀도 사람들끼리 화목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욕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리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런한 비겁한 문화 때문에 일제시대에서도 목숨이 아깝지 않았던 극소수의 예수쟁이들만 빼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다 일본 천황의 신전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예수 귀한 그 이름 이란 찬양을 한번이라도 불렀다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면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和를 도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타협할 수 있는 비겁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신앙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禍를 입게된다.

Pastor Shaan Sloan’s website

Pastor Shaan Sloan is a teaching pastor at Heritage Christian Fellowship church, which I had privilege of being a member for nearly 6 years before I joined a local Korean church. His website is http://heavenslight.org and it has a ton of Bible study materials that are easy to read and access.  It is highly recommended for anyone who is looking for an accessible material on the Bible.

安時 2017-10-05

C.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먼 조상 아담와 하와로 부터 죄를 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 성향이란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나의 삶의 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죄의 근본적인 성향이다.

예수님은 원죄를 물려받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셨다. 물려받은 것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렇게 살 지 않는 순간 부터는 우리는 심판에서 벋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A. XXV. 모두 평강을 원하지만 진정한 평강에 이루게 하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주를 기쁘게 하기에 전념을 다하는 것이 평강의 길이다.

골 1:9-14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하루게 되게 인도하여주소서. 오로지 주의 은혜속에서 주의 이름을 잊지 안으며 한 순간 한 순간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日語: だんしゃり (断捨離)

A recent word referring to the trending idea of minimal life.

Cutting off (断) the unnecessary, throw away (捨), and get out (離) of being attached to things. Started circa 2010. The actual words originated from Hinduism, specifically from practices of yoga.

불필요한 것을 끊고(断), 버리고(捨), 집착에서 벗어나는(離) 것을 지향하는 정리법[삶의 방식, 처세술]. (단사리, 단샤리)

요가의 행법인 단행(斷行), 사행(捨行), 이행(離行)이라는 사고방식을 응용한 것으로, 인생이나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볍고 쾌적한 삶을 살고자 함.

安時 2017-09-05

CWatch with me. 너희가 나와 함께 한 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Matt. 26:40)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만 익숙하지 우리가 주와 함께 하기에는 익숙치 않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러나, 항상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잠시 만이라도 함께 해 달라고 하시면 우리는 한 時도 못버티고 잠에 들어버린다. 주의 관점보다는 우리의 관점. 주와 같은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특별히 긴 시간의 인생을 소비한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不測한 주님.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믿음의 실행이다.

우리의 자연적 한계로서는 사도들과 같이 잠을 자고 주가 어떤 목적을 이루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께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실때는 우리는 그를 버리고 사도들과 같이 도망을 간다.  우리가 가진것으로 주님과 함께하기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다:

오직 聖靈이 너희에게 臨하시면 너희가 權能을 받고 … 내 證人이 되리라 (행 1:8)

한국어 인터넷문자 자료의 문제성

오래 전 수년동안 한/영 번역을 하면서 느낀 점을 글로 옮긴 적이 있다.  어떤면에서 일관성이 없어 불편함 점들을 요약해 쓴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즈음 인터넷에 있는 한국어 자료들을 조금 더 많이 대하면서 느끼는 점인데 문서 기록 구성 방식을 존중하지 않고 개인의 취향대로 기록을 하고 문서형태를 바꾼다는 것이다. 같은 전자식 형태이기때문에 비유한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워드 사용시 탭을 사용하지 않고 스페이스를 여러번 눌러서 들여 쓴 자리를 만든다거나 혹은 문서 여백을 조정해 바꾸기 보다는 그냥 줄 마다 엔터를 처서 오른 쪽 문서의 선을 맞춘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전자 문서 편집에 대한 무식이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인터넷에 너무나 많이 있다.  네이버나 다움또는 어떤 플랫폼에서 그런 것들을 부추켜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너무 많이 본다.  예를 들어 문장마다 끝에 엔터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옛 인쇄시대에 더 익숙했던 첫 줄 단락 여백을 만들어 주기 까지 한다. 내용과 그 내용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DTP (전자출판)에 익숙하신 분들은 이런 것을 잘 이해한다. 그리고 문서작성을 어느 정도 배우신 분들도 이런 것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전자 문서 제작시, 그것이 이메일이나 문서작성이든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해 본다.

  1. 여백을 만들때 스페이스는 스페이스 바(Space bar)로 만들지 말라.

    HTML도 문서처리시에도 스페이스는 완전 무시된다. 예를 들어 일부러 어떤 여백을 만들기 위해 스페이스를 바를 사용해 20칸을 만들었다 하자.  그것은 1칸으로 간주되어 버리며 웹상으로 볼때 19칸은 보이지도 않는다.과거의 편지 및 문서 형태에서 단락의 첫 줄에서 스페이스를 준다.  위에 언급했듯이 웹상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칸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이스보다 단락을 시작할때 엔터키를 두번 처서 두 줄로 만든다.

  2. 줄로 여백을 만들라.

    과거의 편지 및 문서 형태에서 단락의 첫 줄에서 스페이스를 준다.  위에 언급했듯이 웹상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칸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이스보다 단락을 시작할때 엔터키를 두번 처서 두 줄로 만든다. 줄로 여백을 주는 것이 눈에도 더 편하다.

    제삼의 눈은 또한 인도의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바의 눈(The eye of Shiva)과
동일시된다 인도의 시바신은 호루스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이다
뉴에이저들은 이 시바신의 눈이 인간의 이마에 있다고 주장한다.
    시바신의 눈이 있는 지점은 차크라(뉴에이저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있는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 가운데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에 해당된다.
뉴에이저들은 아즈나 차크라는 왕관 차크라라고 하는데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뇌의 상부와 오른쪽 눈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이 차크라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신과의 일체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이보다는 …

제삼의 눈은 또한 인도의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바의 눈(The eye of Shiva)과
동일시된다 인도의 시바신은 호루스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이다
뉴에이저들은 이 시바신의 눈이 인간의 이마에 있다고 주장한다.

시바신의 눈이 있는 지점은 차크라(뉴에이저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있는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 가운데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에 해당된다.
뉴에이저들은 아즈나 차크라는 왕관 차크라라고 하는데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뇌의 상부와 오른쪽 눈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이 차크라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신과의 일체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1. Enter 를 처서 문단을 자르지 말라.
  2. 밑에 출처를 확실히 하고, 출처 날짜도 포함하라.

    학계에서 논문이나 글을 쓸때는 인터넷 출처 날짜는 기본이다.  1998년 출처한 인터넷 문서가 2017년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터넷 자료를 자동 저장하는 전자창고에서 날짜를 알면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링크만으로는 다시 찾기가 어렵다.

  3. 예시를 포함할때는 환경의 대한 내용도 포함하라.

    어떤 컴퓨터 환경에서 어떤 플렛폼으로 어떤 콤파일러를 썼는 지 아무런 언급없이 예시만 올리는 사람이 많다.  JavaScript 과 같이 표준화된 고급언어를 사용시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겠지만 JavaScript 도 더 깊이 들어가면 V8, Spidermonkey, Chakra 와 다른 엔진의 syntax 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安時 2017-8-30

요 8:42-51

주님은 自稱(자칭)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는 顯顯(현현)이라고 하신다. 主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말씀하신하고 계신다. (1) 아비 마귀에게 났음 (2)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함 (3) 마귀의 거짓을 믿고 삶

(1) 났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귀의 것을 숭상하고 받들어 올려 살고 있다는 것.  마귀의 사상과 이상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고 사는 삶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립되는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2)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인간의 썩은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오며 마귀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오게하여 지옥으로 고피를 달고 끌고간다.

(3) 진리를 듣지도 알지도 믿지도 못하게 하는 재일 큰 이유는 마귀의 거짓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C.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19-20

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한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세상과 별반 다른 것 없이 어떤 큰 업을 남기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그래서, 빌리 그래햄같이 하나님께서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을 우상화의 수준으로 높이 취급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구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곳에 두 신것이다. 자신의 서비스에 비중을 두고 항소할려는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큰 업을 남길려는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큰 업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런 의지가 배경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른 것도 어떤 큰 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서비스 중심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제일 큰 실패자인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가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지 성도의 서비스에 있지 않다. 상업주의 능력주의 학벌주의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마귀의 자식들을 경계하라.
A. XXIII. 마음에 큰 평화를 주는 4가지.
(1) 자신의 의지를 펼치기 보다는 다른 이의 의지를 행하기에 힘쓰라.
(2) 항상 많은 것보다 더 작게가지기를 추구하라.
(3) 낮은 곳을 찾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아래에 있어라.
(4)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항상 기도하라.
마음에 번뇌가 많아지고 걱정과 근심이 많아질때는 이 4가지 중 하나라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반대되는 것을 살펴보자.
(1)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모두 올인하라.
(2) 자신의 것을 축척하고 더 많은 것을 쌓아라.
(3) 경쟁에서 지지않기 위해 남보다 자기개발을 통해 앞서야하고 위에 있어야 한다.
(4)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 주야로 힘써라.
세상의 만연한 가르침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도에 멀어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것들을 따르면서 현대인들은 항상 왜 자신의 내면에 불안이 가득차 있는지 모르고 있다.
주님, 욕구불만으로 가득찬 나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인간적인 정욕을 주앞에 내려놓게 하시고 오로지 주의 뜻을 이루는 주의 그릇이 되게 하시고 번뇌로 힘든 이 마음을 주의 평강으로 채워주소서.

People aren’t changing?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가?

답답하다.  주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면 그러나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라는 것.

율곡의 자경문(自警文) 中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즉 한 집안 사람들이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It’s stifling sometimes to see how people are so resistant to change towards better, but the reason for that is none other than myself.

Here’s a line from Yi I‘s Self-Reflection (自警文)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The reason that my family member does not change for better is only because there is a lack in my sincerity of effort.

There is no other reason for it. It’s because of me.

安時 2017-8-24

요 4:43-5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신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만왕의 왕에게 우리또한 얼마나 조건을 걸고 믿고 있는가? 구약의 Gideon 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처럼 우리또한 어떤것에 대한 조건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해주시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관계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감히 누가 설 수 있는가? 사실 죄로 인해 항상 악한 생각만 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죽음뿐이다. 댐같이 나의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임제할 자리도 없는 것이 인간아닌가? 지렁이보다 못한 인간을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사 십자가위에 몸을 던지셨던 말인가?

신하또한 그런 조건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접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측은히 여기셔서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아버지. 주여, 주께서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를 바라며 살게 하여주소서.

 

C. 아들이 빵을 달라고 물으면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겠느냐? 마7.9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소홀하고 아버지를 예의없이 대하는데 어찌 감히 아버지께서 마구 무엇을 달라고 짜증을 내면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관계 상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평화를 달라고 안정을 달라고 기도의 응답만을 요구하고 있다. 타종교의 미신을 믿으며 날마다 복을 위해 기도하는 이교도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인가? 다른이에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간구하고, 다른이에게 친절과 자비를 배풀지 않았는데 자비를 간구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를 만년 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인가? 종이위에 입으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神 앞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 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어떤 감정만의 표현이 아니고 무슨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기도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 좋지 않은 가치관으로 생긴 빚, 그리고 내 맘대로 성질낸것들. 교회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차려입고 영적으로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 것처럼 아니면 잘 내외로 갖춰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깊숙히 다 보고 계신다.

A. XXII. 자신의 내적 빈곤함과 얼마나 자신이 하찬은 사람인지 깊이 느낄 수록 평안을 찾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한 것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이 세상에서 낮은 자에게 눈을 돌리시며 그 들을 올리시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낮추신다. 심지어 동양의 역사에서도 의와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던 자들의 이름들이 기억되고 있으며 존귀함을 받고 있지 당 시대 부와 특권을 누리며 악을 행했던 자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지는 않는다. 세상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 다르겠는가? 의라는 개념자체위에 계시며 온전하며 완벽한 의를 표출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의만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보다 더 존귀한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과분할 정도로의 영광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왕중의 왕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왕을 위해 목숨을 다한 과거의 사신들은 불온전한 인간 왕들을 위해 목숨을 다했기에 왕이 불의한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신실했던 사신이라 한 들 왕의 의를 넘지 못한 것. 우리는 완벽한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 보다 더 큰 평강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는 왕이다. 그 섬긴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지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은혜와 기쁨이 넘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의 의와 사랑과 영광이 먼저가 되게 하소서. 주께서 주시는 그 어떤 축복보다 주만이 나의 평강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기쁨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영광이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