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安時 2017-8-24

요 4:43-5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신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만왕의 왕에게 우리또한 얼마나 조건을 걸고 믿고 있는가? 구약의 Gideon 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처럼 우리또한 어떤것에 대한 조건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해주시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관계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감히 누가 설 수 있는가? 사실 죄로 인해 항상 악한 생각만 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죽음뿐이다. 댐같이 나의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임제할 자리도 없는 것이 인간아닌가? 지렁이보다 못한 인간을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사 십자가위에 몸을 던지셨던 말인가?

신하또한 그런 조건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접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측은히 여기셔서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아버지. 주여, 주께서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를 바라며 살게 하여주소서.

 

C. 아들이 빵을 달라고 물으면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겠느냐? 마7.9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소홀하고 아버지를 예의없이 대하는데 어찌 감히 아버지께서 마구 무엇을 달라고 짜증을 내면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관계 상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평화를 달라고 안정을 달라고 기도의 응답만을 요구하고 있다. 타종교의 미신을 믿으며 날마다 복을 위해 기도하는 이교도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인가? 다른이에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간구하고, 다른이에게 친절과 자비를 배풀지 않았는데 자비를 간구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를 만년 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인가? 종이위에 입으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神 앞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 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어떤 감정만의 표현이 아니고 무슨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기도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 좋지 않은 가치관으로 생긴 빚, 그리고 내 맘대로 성질낸것들. 교회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차려입고 영적으로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 것처럼 아니면 잘 내외로 갖춰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깊숙히 다 보고 계신다.

A. XXII. 자신의 내적 빈곤함과 얼마나 자신이 하찬은 사람인지 깊이 느낄 수록 평안을 찾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한 것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이 세상에서 낮은 자에게 눈을 돌리시며 그 들을 올리시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낮추신다. 심지어 동양의 역사에서도 의와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던 자들의 이름들이 기억되고 있으며 존귀함을 받고 있지 당 시대 부와 특권을 누리며 악을 행했던 자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지는 않는다. 세상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 다르겠는가? 의라는 개념자체위에 계시며 온전하며 완벽한 의를 표출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의만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보다 더 존귀한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과분할 정도로의 영광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왕중의 왕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왕을 위해 목숨을 다한 과거의 사신들은 불온전한 인간 왕들을 위해 목숨을 다했기에 왕이 불의한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신실했던 사신이라 한 들 왕의 의를 넘지 못한 것. 우리는 완벽한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 보다 더 큰 평강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는 왕이다. 그 섬긴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지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은혜와 기쁨이 넘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의 의와 사랑과 영광이 먼저가 되게 하소서. 주께서 주시는 그 어떤 축복보다 주만이 나의 평강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기쁨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영광이시나이다.

安時 2017-8-23

Chambers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Matt. 6:6

기도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기도하라고 한다. 기도는 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의식적으로 해야하는 것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혼자 기도할 때 잡념이 문제이다. 儒家의 율곡 이이도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가르침에서도 잡념이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때가 아닌 생각을 잡념이라고 가르쳤다. 잡념을 이기는 방법은 잡념을 싫어하게 되는 마음까지도 잡념이라 간주되니 가볍게 여기고 그냥 지나가야 한다는 것. 새가 날라와 머리위에 똥을 싸고 둥지를 지게 하지 않으면 된다. 의외로 쉽지만 의식적으로 나의 생각을 다스리지 않으면 잡초처럼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식으로 discipline of the mind, 아니면 정신적 훈련이란 매일 같이 반복해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그 만큼 우리의 내부를 자극시키는 것들이 많으므로 이런 훈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필수인 것이다.

장농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위에 계시다. 비밀리 계시는 곳의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나의 감정이 나를 조종하지 못하게 내적 잡음에서로 부터도 문을 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임제의 장소, 지성소이다. 예수님은 눈을 뜨자마자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제속에 거하시며 기도하셨다. 이런 기도 생활이 유지되고 하나님의 임제속에 거하는 생활이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A’Kempis, XXI

儒家의 大學의 세가지의 가르침 중 한가지가 인품을 갖춰 그 위에 쉼을 찾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서의 아무리 좋아보여도 내가 만든 허상위에 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고 온전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들보다 주를 갈망하나이다. 온전하시고 최고가 되시는 주여. 주가 아닌 그 어떤 것이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나이다.

주께서 은혜로 임제하시기 전까지는 나는 그 어떤 평안도 찾지 않을 것이고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나이다.

이 地上의 최고의 것도 하나님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나의 입, 영혼, 그리고 온 만물이 다 주를 찬양하리이다.

요 3:9-21

  1.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4.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7.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12.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3.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로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영접하는 자이다. 진리를 멀리하게 하는 것은 악이다.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악의 결과이며, 믿음으로 영접치 못하게 하는 것은 지옥의 문턱에 온것이다.

安時 2017-8-22

Chambers. “I indeed baptize you with water…but He…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Ghost and fire.”  Matt 3:11

나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 나의 것이 나의 자아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내면에서 역사하지 않으신다.  나의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완전히 양보 했을때 그 순간부터 역사하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

A’Kempis.

…fondness for evil pleasures overcometh the mind of him who is addicted to the world; and he esteemeth it a delight to be under thorns, because he hath not seen or tasted the sweetness of God, and the inward pleasantness of virtue.

…they who perfectly despise the world, and study to live to God under holy discipline, these are not ignorant of the divine sweetness promised to those who truly forsake the world; they also very clearly see how grievously the world is mistaken, and how it is in many ways deceived.

세상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대립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세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것과 대립하게 되고 하나님의 것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대립하게 된다. 마음을 다지고 하나님의 것을 담대히 받고 행하라.

安時 2017-8-21

Chambers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We can be taken up with the issue of volition, or on the overt emphasis of what we do with our time, talent, and resources. Being poor in spirit is not something that is easily noticed, and yet the seemingly passive state of being–in need–is the condition for God’s blessings.

We’re way too armed with ourselves, for our future.  We need to lay down our arms.  우리는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해 너무나 많은 무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무기들을 내려놔야 한다.

A’Kempis

인간은 자신의 고통이 크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의 고통이 더가깝고 아프고 重한 고통이고 지금과 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는 남이 더 큰 고통을 느끼거나 말건 상관이 없다. 타인의 고통의 소리에까지 진저리를 친다. 남의 고통의 소리는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오디오일뿐.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다른이의 고통을 초래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의식으로 변했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나에게 타당치 않은 것으로 고소를 했거나 거짓 증거를 하는 것 같으면 도저히 참지를 못한다.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 사람에게 당하고는 절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불리한 상황속에서 남자답게 담대히 타인에게 더 미련한 사람에게 밟힐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 아니었는가.  忍으로 부름을 받은자 아닌가 (고전13).  우리의 싸움은 우리를 직접 괴롭게 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아니고 자신의 고통만을 보게 하고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생각조차하게 하지 않는 고체된 마음 상태이다.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 이기주의, 극적인 나르시시즘의 표출일 뿐이다. 이런 싸움없이 어찌 승리가 있겠는가? 이런 노력없이 어찌 심적 평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神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고 밟히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영혼을 위한 高度의 영양분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남자답게 싸워이겨 나가라.

List of One Thousand Characters completed (천자문, 千字文 수록 끝)

천자문 한자 풀이와 설명 모집이 이제 끝났다.  1년 넘게 조금씩 해오다가 절반 이상을 다음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한꺼번에 다 끝내 버렸다.  링크는 여기에.

I’ve completed the list of One Thousand Characters including all of the available, sound explanations in Korean.  I’m not sure how much of English translations I will be able to provide, but I’m thinking of completing it very slowly.  I have been completing little bit at a time, and then I’ve gone ahead and finished more than half of it before the start of a class next week.  You can find the listing here.

Contrasting foundations for morality (대조되는 도덕의 정의)

— English

In the West, the classical philosophers, post-Christianity, thought of morality as a core part of virtue in reflection of the belief of imago dei.  However, in the East Asia, the morality is now more often seen as a part of statecraft, a code only intended to make people more obedient to their rulers. This Machiavellian juxtaposition of Confucian ideals has been tacitly accepted by the populace, and I think that i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the social changes have been so swift. Without a full appreciation for Confucianism as a theory, ignorant progressives have done much to throw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 Social changes are often hinged by a philosophical, and referential, position that society holds to, and the fact that Asian countries seem to have been following the West, almost mindlessly, without due consideration of traditional moral implications (but accommodating to Western influences under the banner of progress) is evidenced by the fact that traditional views have been heavily labeled as being backward and generally antithetical to any progress in all aspects of life. This was sparked by Meiji Reformation in Japan, which happened among a people-group living in an island long oppressed by self-doubt about its own identity and self-worth, always compared against the continental culture.

As seen in Korea, it doesn’t help that most of classical literature were written in hanja and the disciplines of philosophy or classical literature is simply marginalized as being “non-productive” discipline. This kind of trend is deeply troubling, given the fact that young people are increasingly adopting materialistic view of life, whilst studying hard in philosophical disciplines, which was a harsh experience for them when they had to memorize in a rote fashion to pass a test.  Knowledge without seeing no relevance to their lives has led to resentment towards the very knowledge that can allow them genuine change and progress towards the future.

— 한글

기독교 이후의 서양의 고전 철학자들은 도덕을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중요한 미덕으로 생각왔어으나 동양에서는 도덕이 치국책의 용도로 사람들을 더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하나의 규범으로만 간주되어가고 있다.  이런 식의 마키아벨리 풍으로 유교적 이념이 암묵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고, 이로 인해 사회적 변화가 상당히 빨리 일어난 것 같다.  유교를 하나의 이론으로 평가하는 것 보다 무지의 진보주의자들은 아기를 아기 씻는 물과 함께 버린을 일을 주도해왔다. 사회적 변화는 사회가 지니고있는 철학적, 참고적 위치를 반영해 일어나게 된다.  아시아 많은 국가들이 자신의 전통적 관점의 도적적 결과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발전이란 이름아래 서양의 모든것을 수용하며) 얼마나 전통적 관점이 뒤떨어지며 일반적으로 모든 삶의 면에서 발전과 상반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진이 점화시킨 것이다. 오랫동안 자기회의와 대륙풍의와 대조되는 자신들의 열등감에 억업받았던 자들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나 고전문학이나 철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다라 하여 단순하게 하찮은 분야로 인식되어 버렸다. 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물질주의적 관점의 삶을 반영할때 이러한 추세는 매우 심각한 추세이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철학이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외워두는 지식이었지 도구이었을 뿐이었다. 삶과 아무런 연결이 없이 습득되는 지식은 미래를 위한 진정한 변화와 발전을 줄 수 있는 지식에 대해 분노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Issues with South Korea, from investor’s point of view (투자자가 본 한국의 문제들)

(한국어는 밑에, Korean translation available in the bottom)

— English

There were some memorable points that Jim Rogers, a well-known American investor, has pointed out about Korea, and why there would be no future for it if it continues this way. (Sub-points are my personal reflections.)

  • 3 companies hold the 50% of the national GDP.
    • In the early days of post-war modernization, the political leaders allowed a full government support of only a handful companies, and those companies have managed to maintain a tight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and monopolize on the Korean economy.
  • Too many young people are only seeking to get a government job. There’s future only if young people are willing to challenge the status quo with new ideas.
    • Two to three generations of people have experienced how unstable the market has been, so Korean people in general have been tamed to believe that the government job is the only stable job for their children to have.
  • The birthrate is too low and it will have a significant effect in the labor market.

 

— 한국어

유명한 미국의 투자자  짐 로저스가 최근에 한국의 문제들에 대해 몇 가지를 언급했고 계속 유지되면 미래가 없다고 했다. (밑에 있는 포인트들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3개의 회사가 나라의 GDP 의 50%를 가지고 있다.
    • 한국전쟁이후 정치적 지도자들은 몇몇 되지 않는 회사에게 전적인 정부지원을 허락하였고 그 회사들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경제를 독점할 수 있었다.
  • 너무나 많은 청년들이 안정적인 공무원직만을 추구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을 하는 곳에만 미래가 있다.
    • 2 ~ 3 세대의 사람들이 시장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경험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자녀들이 가질 수있는 유일한 안정적인 일이라고 믿고있다.
  • 출생률이 너무 낮아 미래 노동률에 큰 타격이 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두보의 시에서 나온 구절이다. 원래는 장자가 친구 혜시의 장서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요즘식으로 해석해보면 ‘남아’는 장자 자신을 말한 것이니 꼭 ‘남자’라는 의미보다 그냥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고, 다섯 수레의 책이라 함은 당시 책이 죽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다섯 수레’ 개념 보다는 그 시대 거의 모든 책의 양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양으로 꼭 환산해 본다면 대략 3천 권 정도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라는 말을 ‘사람이 태어나 죽기 전에 3천 권의 책은 읽어야 한다’ 쯤으로 해석해도 될 듯하다.
‘문사철 600’이라는 말도 있다. ‘문사철 600’은 문학 책 300권, 역사 책 200권, 철학 책 100권을 의미한다. 극작가이자 역사소설가인 신봉승 작가는 제대로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문사철 600’을 30대에 마쳐야 하며 이것이 힘들다면 일생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마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30대까지 다독을 통해 세상사는 이치를 깨우치고 있어야 함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11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월평균 독서량은 1권이 안 되는 0.8권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 6.6권, 일본 6.1권, 중국 2.6권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지 말해주는 지표다. 월평균 독서량이 1권도 안 되는 0.8권이라는 숫자는 한류를 얘기하고 문화선진국을 꿈꾼다는 나라로서 부끄러운 숫자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이니, IT 발달에 의한 현상이니 하면서 독서하지 않는 이유를 대지만 변명치고는 궁색하다. 물론 통계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자료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에서 불과 60여 년 만에 경제대국으로의 놀라운 성장에 세계가 박수를 보내지만 책을 읽지 않는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직장인들의 평균독서량도 연 15권 정도라고 하니 월평균으로 따지면 1.25권으로 2권이 안 된다. 다른 OECD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제대로 된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보가 ‘남아수독오거서’를 통해 강조했듯이 평생 3천 권의 책을 읽어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문사철 600’은 40대 이전에 마스터하고 만일 지금 40대인데도 넘지 못하였다면 향후 10년 안에 반드시 ‘문사철 600’을 마스터 해 볼 것을 권한다. 책을 많이 읽어 제대로 된 지식인이 많아 져야 사회의 수준이 올라가고 국가의 수준도 올라간다. 정치인들은 말로만 일류국가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독서량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의 대안을 내놓는 공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도 군포시청의 독서 전담부서인 ‘책 읽는 군포실’ 운영은 지방 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우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자치단체장 한 사람의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독서의 힘은 흔히 모죽이라는 대나무에 비교하곤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자생하는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난 후 죽순이 나오는 것 말고는 5년 동안은 아무 변화가 없다고 한다. 5년째 되는 해 갑자기 자라기 시작하여 어떤 것은 하루 70센티씩 자라 거의 30미터까지 자란다. 그러니까 모죽은 5년 동안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땅속에서 넓게 뿌리를 뻗어 양분을 흡수하고 도약을 준비한 것이다. 독서를 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한 두 권 읽었다고 바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죽의 세월처럼 일정 정도 지식의 양이 찰 때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죽의 세월을 견디고 도약하는 시점이 바로 3천 권의 독서다. 마치 물이 99도까지는 끓지 않다가 임계점인 100도를 넘으면 끓어서 기체가 될 수 있듯이 독서를 통한 깨달음의 임계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3천 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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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한 3천 권의 기준은 그냥 한 말이 아니다. 실제 이런 기준으로 책을 통해 이치를 깨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다독가들의 경험담에 기초한 것이다. 목사였던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소장은 이혼 후 나락에 떨어졌다.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 도서관에서 온 종일 책 읽기였다. 그는 2년 동안 매일 도서관에서 무려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다. 그 후 포장마차를 시작해 종자돈을 벌어 민들레영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 이지성 작가는 2천권의 책을 읽고서야 뭔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트였다고 말한다. 일본 IT업계의 신화가 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6살에 간염으로 3년 동안 입원하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읽기 시작한 책이 3년 동안 4천 권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그 3년 동안의 독서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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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 설립자 신창제 회장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책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책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게 해준다. 책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준다. 미래가 불안한 그대여 책을 믿어라. 책을 읽어라. 독서가 불안한 미래에 답을 줄 것이며, 독서가 그대의 끝나지 않은 꿈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하여도 잠을 거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말해도 식사를 거르는 사람은 없다. 독서를 잠을 자듯이 생각해 보자. 독서를 식사 하듯이 해야 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3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몇 권을 읽었는가? ‘문사철 600’ 30대에 마스터해야 한다는데, 그대는 지금 어디까지 도달하였는가? 지금 당장 근처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가자. 3천 권이라는 숫자는 평생 이루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이다. 1년에 100권씩 10년을 읽어야 1천 권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3천 권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것을 감안하여 누구나 50살이 되기 전에 ‘문사철 600’은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00권이라는 책도 1년에 50권씩 12년을 읽어야 하는 숫자이다. 지금 당장 100권 읽기에 도전을 시작한다면 50살이 되기 전에 문사철 600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한 번쯤 1년 100권을 달성해보면 책 읽기에 눈이 트인다. 책 읽기에 눈이 트이게 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근 20여 년을 자녀교육 컨설턴트로 살아왔다. 교육 현장에서 누구보다 독서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였고, 독서를 통해 아이들이 얼마나 바뀌는지 지켜보았다. 나는 신이 인류에게 준 가장 보배로운 선물은 언어 문자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책이 그 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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