坑道 (갱도)

“북한이 폐쇄를 약속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들에서 전선 철거를 시작했다고 미국 CBS 방송이 보도했습니다”  – YTN – (2018年 5月 3日)

갱도 (坑道) 坑 구덩이 , 산등성이 강, 구들 항  道 길

① 땅 속에 뚫어 놓은 길

② 광산(鑛山)이나 탄광(炭鑛)의 갱 안에 뚫어 놓은 길. 사람들이 오가고 광석(鑛石)을 나르며 통풍(通風)ㆍ광석(鑛石) 조사(調査) 등(等)을 하는데에 이용(利用)됨. 수평갱ㆍ사갱(斜坑)ㆍ수직갱 따위가 있음

고려인 3세의 고백: 한국은 고향같아요

“Когда я приезжаю в Корею, я чувствую, что вернулся домой.” (한국을 방문하면 고향에 온 것 같아요.)

사할린 (Сахалин, Sakhalin) 한인 동포 3세.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러시아인으로 엔지니어 일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가면 고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집에서 먹는 것도 한국인과 같이 밥과 간단한 반찬으로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할린 고려인 3세.

나는 미국이란 타국에서 수십년동안 한인 2세들을 대하면서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한인 후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마음 중심에 깊은 우물과 같이 자리 잡아버렸다. 물방울 하나 하나 뚝뚝 떨어지듯이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만 남은 여생 끝나기 전에 완성할려면 더 박차를 가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臣僕 (신복)

“새로운 경영자도 대한항공 조 회장의 신복으로 밝혀졌습니다.”  – KBS News 9, (2018년 4월 24일)

신복 (臣僕) 신하 , 종
[명사] [같은 말] 신하 (臣下) (임금을 섬기어 벼슬하는 사람).

尹東柱의 序詩 (原文)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尹東柱

桐千年老恒藏曲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천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않으며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申欽의 <野言> 中

安時: 2018年 3月 16日 (金)

행 21:17-36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야고보와 다른 교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의 법률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알려주고 모세의 법률의 나온 나실인 서약을 권한다. 바울을 이를 따라 행하여 유대인으로서 지킬 것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보여준다. 바울이 서약을 지키기위해 성전에 있는 동안 유대인들이 바울인것을 알아보고 에베소에서 대리고 온 일행중의 헬라인도 성전에 있는 줄 알고 다른 모든 유대인들도 선동시켜 바울을 잡아 끌어내어 때려 죽일려고 하자 이 소식이 지역구 행정 담당인에게 전해져 군인들을 대리고 바울을 잡아올려 했으나 군중들의 폭력으로 인해 담당인은 군인들로 인해 보호 받으며 돌아가고 군중들은 계속 바울을 쫓아내라고 소리질렀다.

바울은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고 율법아래에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율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할레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장에게 알리어 예식을 거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다 간과해 보이는 바울의 가르침은 회장이 없어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예수를 통해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전통과 무게가 어떤 것인지 바울은 잘 알고 있고 전에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도 존중해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울은 30일동안 이루어지는 나실린 서약을 이행한다. 그러나 이행 중에도 유대인들은 군중을 선동시켜 폭력을 행사하여 바울이 다시 로마 행정관에게 잡혀 들어간다. 비록 수백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지만 아직 까지도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죽였던 때 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반대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의 전통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 이 처럼 사람의 버릇이나 오랫동안 행해 온것이 바뀌는 것이란 쉽지 않는 것이다. 주님, 나의 오래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주의 뜻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때 순종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14日 (水)

행 21:1-16

바울의 일행은 동쪽으로 가며 몇몇 도시에서 제자들의 집에 머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다리거나 움직인다. 이때에 예언하는 자들과 선지자들이 있었으니 유대에서부터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말하기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묶여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라 하고 예언을 한다. 주위 형제들이 바울에게 울며 가지 말라고 하나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니 울지 말라고 한다.

예수님또한 자신의 사명을 위해 십자가 위에 죽음을 이야기했을때 사도들은 그리 안된다며 말리거나 슬퍼했었다. 바울의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며 길을 나선다. 묶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기까지 하노라 하며 자신의 사명을 선언한다. 사실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바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자신이 어떠한 용서를 받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다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았던 사명자였다. 하나님의 주신 하나의 용서에 그 분의 은혜에 모든 것을 다 던진 바울. 우리는 냉냉하고 썩어 없어질 여러가지의 세상것들에 매어 냉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요한계시록 3:15-16

安時: 2018年 3月 8日 (木)

행 18:24-19:7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온 아볼로는 언변에 능하고 성경에 능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의 도를 담대히 가르쳤지만 오로지 요한을 통해서 만 알고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예수에 대해 저 자세히 알려주고 아가야로 갈때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사도들이 그를 환영하며 받아 줄수 있게 편지를 써주었다. 그가 도착하여 능력있게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선포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공개적으로 물리쳤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때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만 알고 있었던 제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믿었을때 성령을 받았냐고 묻자 그들은 들은 적도 없다고 하여 안수하여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방언하며 예언하기 시작했다. 약 12명 정도되는 제자들이었다.

아볼로와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된 제자들이다. 그들은 요한이 가르쳤던 것 처럼 예수가 구약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삶이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쳤던 소리로 부르심을 받았던 요한. “회계하라. 예수 메시야의 시대가 지금 임하였다.”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회계를 통해 예수의 완전한 계시를 받아 드릴 수 있는 준비가 완벽히 되었었다. 아볼로는 인간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왔던 유대인이었다. 그는 이미 구약의 말씀에 능통하여 예수를 전하고 있었으며 이미 1년 반정도 고린도에 있으며 가르쳤던 바울의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면은 하나님은 어떤 유창한 것으로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방이 모여 강을 이르듯 작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사용하시는 것을 본다. 세례요한의 메시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전함에 응하는 아볼로의 겸허함.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드리는 요한의 제자들. 파가르기 좋아하고 어떤 권력체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가 중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만을 받고 순종하는 사도들이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아볼로와 같이 주께서 주신 맑은 정신과 재능은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겸허한 마음으로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7日 (水)

행 18:12-23

아가지역의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들어오자 유대인들이 다시 연합하여 바울을 공격해 재판에 세우며 율법에 어긋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라고 한다. 갈리오는 범죄한 자를 재판에서 보겠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관한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재판에서 몰아내었다. 유대인들은 재판장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리지만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후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 안디옥에 이른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다니며 모든 제자들이 믿음에서 굳건하게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하게 따르고 있다면서 왜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보다는 단지 바울의 복음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이다. 정조때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를 통해 가톨릭교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이유도 유학가의 성리학파들과 실학파들이 권력형태를 유지해 올 수 있던 왕 중심적 사상에 위협을 받아서였지 어떤 유학의 덕치주의 철학과 대립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선의 왕이 아닌 예수를 왕으로 섬기라 하니 자신의 권력체계에 대한 위협이 아니면 무엇인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졌던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바울 또한 계속된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오늘 날 진정히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은 예수보다 더 권위를 세울려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는 정면 충돌할 수 밖에 없게된다. 사탄은 오랜 시간 이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국력을 이용해 핍박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자신들의 뜻대로 살기 편한 환경으로 유도한다. 즉 자가신성화이다. 개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사상. 종교적인 면을 띄고 있지 않지만 자신들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하며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간다.  예수님의 독점적인 선포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대립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주님, 주께서 나의 삶의 진정한 주님이 되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지역주의
  2. 미국을 보는 관점
  3.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4. 북한을 보는 관점
  5.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6.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무속신앙
  2. 유교
  3. 불교
  4.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