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時: 2018年 3月 7日 (水)

행 18:12-23

아가지역의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들어오자 유대인들이 다시 연합하여 바울을 공격해 재판에 세우며 율법에 어긋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라고 한다. 갈리오는 범죄한 자를 재판에서 보겠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관한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재판에서 몰아내었다. 유대인들은 재판장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리지만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후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 안디옥에 이른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다니며 모든 제자들이 믿음에서 굳건하게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하게 따르고 있다면서 왜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보다는 단지 바울의 복음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이다. 정조때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를 통해 가톨릭교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이유도 유학가의 성리학파들과 실학파들이 권력형태를 유지해 올 수 있던 왕 중심적 사상에 위협을 받아서였지 어떤 유학의 덕치주의 철학과 대립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선의 왕이 아닌 예수를 왕으로 섬기라 하니 자신의 권력체계에 대한 위협이 아니면 무엇인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졌던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바울 또한 계속된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오늘 날 진정히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은 예수보다 더 권위를 세울려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는 정면 충돌할 수 밖에 없게된다. 사탄은 오랜 시간 이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국력을 이용해 핍박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자신들의 뜻대로 살기 편한 환경으로 유도한다. 즉 자가신성화이다. 개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사상. 종교적인 면을 띄고 있지 않지만 자신들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하며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간다.  예수님의 독점적인 선포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대립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주님, 주께서 나의 삶의 진정한 주님이 되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지역주의
  2. 미국을 보는 관점
  3.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4. 북한을 보는 관점
  5.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6.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무속신앙
  2. 유교
  3. 불교
  4.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安時: 2018年 3月 6日 (火)

(16:19 ~ 17:34) 바울은 데살로니아, 베뢰아, 아덴(Athens)에서 복음을 전한다. 데살로니아의 유대인들은 계속해 따라다니며 군중들을 격분시켜 복음을 반대하였고,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아덴의 사람을 쟁론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행 18:1-11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간다. 같은 업종(장막만들기)에서 일하던 이탈리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같이 있으며 매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바울과 합류하였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매도하자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며 이제부터는 유대인들에게 가지않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며 회당을 나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니 회당의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신 후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아굴라는 로마에서 전도를 받은 유대 기독교인이며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 로마에서는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서로 분쟁이 심화되서 그런지 아니면 복음으로 많은 도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해서 그런지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그냥 다 몰아낸다. 이 때 나오게 된 아굴라다. 나중에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까봐 사역자로서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교회에서 중세때부터 시작된 성직자들은 교회 사역에만 전념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인간이 만들어넨 종교적 행위이며 인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될려면 사역자들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담당하는게 교회라는 인식에서 나와야 하고 교인들도 다른 업종에서 일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을 완전한 사역자로 받아드리지 않는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일단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의해 사역이 되고 안되고라는 썩은 인식이 자리잡혀 있는 한 교회는 계속 썩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는 행위는 옷을 털며 그들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피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의 나와 있는 파수군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할일을 다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해진 말씀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 들의 (영적인) 죽음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뜻. 그렇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언급 된 것 처럼 제일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나가 멀리 간 것도 아니라 바로 옆집에 머물게 된 바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감정이었겠는지는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이것에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던 바울은 얼굴이 철판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 너를 지키겠다는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 끝날때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바울과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5日 (月)

행 17:16-34

아덴에 온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숭배로 가득찬 것을 보고 매일 회당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전도하였다. 에비구레오(epicureans)와 스도이고(stoics) 철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바울을 아레오바고(Aeropagus)로 대리고와 쟁론한다. 바울은 그 들이 모시고 있던 무명의 신을 소개한다고 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를 들은 자 중에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이 있엇고 바울은 여기서 떠난다.

安時: 2018年 3月 4日 (日)

행 16:19-17:15

무당 소녀의 주인이 소녀에게서 귀신이 나간것을 보고 더 이상 돈을 벌수 없게된 것을 알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로마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둔다. 한밤중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사슬이 풀렸다. 지키고 있던 교도소장이 이것을 보고 자살을 할려 할때 바울이 우리가 다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그를 중단 시키자 그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다. 다음 날 교도소장에게 어제 옥에 가둔 사람들을 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두었으니 그들이 직접와서 풀으라고 반박하자 명령을 전한 경찰들이 다시 돌아가 이것을 전하니 바울의 일행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듣고 상관들이 두려워했다. 상관들이 직접와서 사과하고 그들을 옥에서 나가게 한다. 일행은 루디어 도시에 들려 교회를 격려하고 몇 도시들을 통과해 데살로니가로 온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카이저말고 예수가 왕이라한다고 하며 도시 전체를 격분하게 만들어 일행을 초청했던 야손을 잡아왔다. 야손을 돈을 주고 야손과 야손의 사람들이 풀려났다. 바울의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베뢰아의 사람들은 열심을 내어 말씀을 받고 성경 말씀을 매일 보며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 것인지 공부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사람들을 격분시키니 일행은 바울을 아덴에 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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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示: 大學之道 八條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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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時: 2018年 3月 2日 (金)

Paul's Second Missionary Journey, 49-52 AD

Illustration Credit: Mission Bible Class, https://missionbibleclass.org

행 16:6-18
지금의 터키의 여러 도시(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서쪽으로 순행하나 어떤 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건나가고 아시아 동쪽으로는 가지않게 되다가 바울의 환상에서 마게도냐의 남자가 그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마게도냐로 향한다. (지금의 터키)드로스에서 마게도냐의 빌립보까지 가서 머물다가 기도하는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옷단을 파는 여자)에게 전도해 그녀가 세례를 받게되고 그녀의 집안또한 구원을 받는다. 기도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바울에게 어떤 점치는 소녀가 몇일을 계속 따라다니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며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고 외치니 바울이 귀찮게 여겨 소녀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낸다.

마게도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을 아시아로 돌리셨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서 중동지방에서 유럽쪽으로 복음이 건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의 터키에서 그리스 북쪽에 있는 나라인 마게도냐를 복음이 정복하는 순간이다. 불과 300년전에 알렉산더 왕이 온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의 나라는 몇 세대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고 없어졌지만 그 위대했던 인간국가의 왕의 모국이였던 마게도냐에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고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아직도 살아있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 그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루디아. 유럽에서의 첫 기독교이되는 영광을 지니게 된다. 단지 기도하러 나왔다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는 상황을 본다. 고넬료처럼 복음을 들으러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의 마음 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밭은 겸허함으로 일궈진 하나님의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곳이다. 루디아는 이 도시의 유명 상품인 옷단을 판매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하인들도 여러 명 거닐며 큰 집도 있던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그 녀의 집을 빌립보의 첫 교회로 세우신다.

귀신들린 소녀. 그 시대에 상업적 목적으로 점을 치는 곳은 많았다. 마치 한국의 무당같이 어떤 귀신을 받아들여 그 어린 삶이 사람들의 돈버는 수단으로 사용됬던 것이다. 귀신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위협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과 성경의 여러가지 예를 보면 귀신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그냥 알고만 있다는 것에 끝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에 있어서 귀신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누구를 따르는 삶을 사는냐에서 달라진다. 귀신은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을 일삼아 살아가는 존제이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무력하지만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지옥으로 대려갈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존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케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주님,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민감하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육신은 너무나 약하나이다, 그러나 육신의 것들은 뒤로하게 하시고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것을 더 먹고 더 중요시 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직장에서도 이런 거짓을 자주 보는데 그 때부터는 그 당사자가 쓰레기처럼 보이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安時: 2018年 3月 1日 (木)

행 15:36-16:5
바울은 바나바에게 전에 말씀을 선포한 교회들을 방문하자고 하자 바나바는 요한 (헬라어 이름: 마가) 을 같이 대리고 갈려고 했으나 바울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에게서 떠나 일을 같이 하지 않은 요한을 대리고 가지 않고 싶어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서로 떨어지게 된다. 바나바는 요한을 대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대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를 방문한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할 때 제자 디모데를 만난다.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혼혈아이고 이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막기위해 디모데를 할레를 시키고 같이 사역을 다닌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을 교회들과 나누니 교회들이 믿음에서 격려를 얻고 계속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하였다.

요한을 두고 여태 같이 사역해 왔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다. 사실 요한이 어떤 이유로 밤빌리아에서 그 들을 떠났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이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었다. 바울은 이것을 이유로 요한을 대려가지 말자고 한다. 바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일에나 꾸준하지 못하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조금의 희생도 하지 않을려고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로 대는 사람은 나도 개인적으로 같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같은 사람은 매우 흔하다. 이런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바울과 더 동의하는 편에 있다.

동시에 요한을 받아드리고 다시 한번 찬스를 주는 바나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인물들인지 엿보이게 하는 본문 말씀이기도 하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또한 사역으로 회복했던 인물이다. 바울을 죽일려했던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한 동안 먼 곳으로 가 있었고 바나바가 직접 가서 바울을 대리고 왔서 복음 사역을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다. 이 계기로 요한(마가)는 나중에 바울을 인정을 다시 회복하고 더 나가 후에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된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그냥 사도행전 12장에서 언급이 끝나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보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바나바가 대인배같은 인물인것 같다. 그렇다고 바울이 소인배란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기준이 더 높았던 바울에 비해 바나바같은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회복의 기회를 얻고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대로 사용하시고 준비된 만큼 사용하신다. 좋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지므로 더 많은 교회들이 이들의 사역의 해택을 본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이행. 그리고 그 분의 은혜에 비춰볼때 바나바와 같이 타인에게 챤스를 주고 관계의 회복을 허락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다음은 혼혈아인 디모데가 나온다. 본문 말씀에는 그는 이미 사역에 충실하고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사도들에게 추천받은 인물로 기록되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되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던 바울은 할레를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계속 충돌하고 싶지 않아 디모데에게 할레를 받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주께서 가르치신 것 처럼 우리에게 죄진 자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바나바와 같이 더 큰 은혜로 사람들을 대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8日 (水)

행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와 바울를 다시 안디옥으로 보낼 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하고 같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 내용: “우리가 보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서 너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전할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너희에게 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않아 다음과 같이만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우상에게 주어진 음식과 피가 흐르는 음식 또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며, 음행에서 멀리하라.”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하고 교회에서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아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와 연관해 세가지가의 주동사가 있다. (1) 보냄 (2) 읽음 (3) 가르침.

(1) 실라와 유다가 교회 장로들로부터 선택받아 가게된다. 그들은 형제들중의 인도자라고 나와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교회의 인도자들은 지혜와 성령충만이라는 두가지의 강령에 따라 지정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택될때 이 두가지의 기본적인 강령을 간과하는 것을 너무 흔히 본다.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사회적 지휘가 높거나 유명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교회의 물질적인 것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 다 지혜나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지혜롭다고 말할때는 근본적으로 바른 인신론적 바탕에서 의미하는 지혜이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 누군가 지혜롭다고 말할때와는 다른 지혜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바로 알고 인간의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위에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다. 여우처럼 약아 빠져서 계산에 빠르고 모든 것을 다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세상의 물욕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절대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서의 첫 강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신론적 (epistemic) 바탕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기본적 틀일 뿐이다. 다음은 성령충만. 요 16:8에 성령님의 3가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 의, 그리고 다가올 심판. 그리고 모든 진리로 (v13) 인도하신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 주님의 의를 입은 사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의 기본이라 하겠다. 회계나 주에 대한 믿음은 자연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니 많은 교회가 멍멍이판일수 밖에 없지않는가.

(2) 편지를 읽음. 27권의 신약 중 21권이 편지이다. 서신서라고 한다. 그 중에 바울의 서신이 제일 많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인 것 처럼 편지를 읽고 모두 기뻐하고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날의 교회 또한 이 편지를 읽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딱딱한 틀에 익숙해져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앞에서 읽고 교인들은 모두 다 같이 들으며 그것을 통해 기뻐하는 전통이 없어진 것이다. 구약에서도 제사장 에즈라 하나님의 성전이 제건된 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사람들이 회계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 갈급한 지금이다.

(3) 가르침. 교회의 3가지 대강령중 교육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육. 선교. 친교. 바르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움의 근본이다.

주님, 바른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더 성장해 나가며 순종으로 열매맺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