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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이란 바탕위의 믿음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친척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리브가에게 간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창 15:2에서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자신의 종의 이름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면은 24장에 나오는 종이 엘리에셀일 확율이 높다. 아브라함의 집안의 사람들은 동쪽 끝 지방에서 파생된 사람들이고 다메섹은 서쪽지방의 사람이라 생김세도 다를 수 있겠다. 아무튼, 리브가는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배푼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타인을 위해 배려와 친절을 배푸는 인격이 갖춰진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샘이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자신의 하인을 위해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과거 노예제도 하에 있던 노예들이 무조건적으로 무슨 동물 처럼 학대만 받고 살아갔던 것 처럼 흑백논리로 세뇌받고 있는 현대이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평민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치우치지 않은 정상적인 관점이다. (성서적 질서보다는 평등주의를 더 중요시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 흑백논리를 이용해 주인/종 관계를 무슨 윤리적인 악으로 풀이하며 구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아무튼, 이 백부장도 인격이 갖춰진 주인으로서 자신의 하인의 문제에대해 주님께 고하는 것을 본다. 하인을 자신의 하찮은 소유물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을 베푸는 모습이다.

친절은 배푸는대로 돌아오게 되있다. 타인에게 친절하면 그 친절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하인같은 사람이라 할찌라도 인격을 갖춰 대하면 그것이 후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그러나, 타인을 비인간적으로, 하나의 소유물 처럼 대하면 꼭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기본도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익숙하고 친밀해질수록 더욱 禮를 갖춰 대하는 것이 理이다. 인격이 덜 된 사람일수록 처음보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익숙해지면 無禮로 대하게된다. 아무리 작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소중한 인간이다. 아무리 가치관이 꺼꾸로된 세상이라 해도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소중히 여기고 禮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

Ref: 창 24, 마 8:1-17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 7:21

30여년전에 섬겼던 한 교회의 목사님은 한국 신학대 총장의 아들로서 호주에서 목회하다가 버지니아에 와서 목회를 하는 중이었다. 그 목사님이 언급했던 Søren Kierkegaard 의 책 Fear & Trembling 을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은 매우 자주 언급한다. 실존주의적인 철학적인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리고 모리아 산에 가는 과정을 한 개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관찰되는 아브라함은 단순명료한 순종의 모습만 보인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마음이 어떠할지 실존주의적 해석등 여러가지 관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따라하는 그 행함에 포인트가 있다. 순종이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경로는 요나의 삶에 보였던 것 처럼 불순종함의 징표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누구시인줄 바로 알고 그의 말씀을 바로 파악했다면 일단 순종이 결단된 후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철학적인 관점의 가치에 부여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에서도 보이듯 그리 성서적인 관점과 실질적인 믿음의 삶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실존주의적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인 목사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면 마치 Azusa 부흥 전의 기독교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던것으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Vineyard movement 나 Pentecostalism 등 예배 동안의 체험을 강조했던 여러 기류에 대해 그들의 열매를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여부를 제공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들의 열매를 보아라.

마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께서도 같은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오늘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많지만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에서만 오는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두 사람 다 말씀을 귀로 듣지만 순종하는 자만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 처럼, 모두다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있고 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말하고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싸구려 신앙이되니 교회 다니는 것을 무슨 사치품 하나 구입해 놓은 것 처럼 구원을 받아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되어 버렸다. 열매없는 것에 대해 탄식하거나 죄를 밥먹듯이 지며 살아도 회계없는 신앙 소비자들만 많아진 세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내 한 마음만 편하면 만사 오케이하며 살아간다. 구약에서 네 다섯 시간동안 피비린내나는 번제물 앞에서 예배를 드린 이스라엘인이 아니더라도 주일 1시간을 드리는 예배가 최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사이로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f: 창 22-23, 마 7:15-29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구제 –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기도 –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금식 –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보물 – 마 6:20, ” 하늘에 쌓아 두라”; 삶 –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갈래의 길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더 풍성해 보이는 지상낙원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있는 천상낙원을 바라보았다. 롯의 지상낙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질서를 어기는 죄의 極의 징후인 동성연애가 만연한 곳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유황불로 타 없어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죄가 어느 정도 차면 그로 인한 결과는 순식간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았던 그의 딸들도 롯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지속성을 중시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보면 이미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의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 의식 세계를 점령했는지 알 수 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 땅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즉 초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인정 받을 수 있는 구제가 필요한 것은 구제의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영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기위한 구제 사업은 구제를 하는 사람의 명성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지 진정 구제가 필요한 대상을 위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주제 측의 어려운 희생이 요구가 된다 하거나 명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제 대상의 필요와 상관없이 쉽게 구제가 단절되는 것을 본다. 진정한 구제 같은 구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 희생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그 아무도 희생의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도와 금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도 않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타인들을 성공적으로 잘 속여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된 다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정신을 삶의 중심 가치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세상의 강력한 힘보다는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용하다. 그의 마음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것들은 육신을 위한 것 들보다 더 중요한 것에 있다.

창세기 -21장, 마태복음 -7:14의 묵상

Get a Biblical life

Instead of another happy new year, please, please get a Biblical life this New Year.

If you believe the Word of God to be the highest authority, the world, including those within the church, will ridicule you for being bigoted, patriarchal, and even discriminatory, but living a Biblical life means that you follow the footsteps of Christ. The Church has, and should NEVER be a platform for preaching egalitarianism, women’s rights, social justice, or ANY OTHER agendas of this world. Only the Word of God is to be upheld as the RULE and the STANDARD for ALL Christians, and also proclaimed in churches. All other social consequences are mere byproducts of the Word of God. There is only ONE true version of Christianity, and that is a Biblical Christianity, just as our Lord Jesus Christ had believed and lived in accordance to the Word of God. Fakes are the pastors who has to give apologies for simply believing the Word of God as is, and those who claim to believe in the Word of God and yet deny its relevance and power in our own lives.

1 By the humility and gentleness of Christ, I appeal to you—I, Paul, who am “timid” when face to face with you, but “bold” toward you when away! 2 I beg you that when I come I may not have to be as bold as I expect to be toward some people who think that we live by the standards of this world. 3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 4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5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6 And we will be ready to punish every act of disobedience, once your obedience is complete. – 2 Corinthians 10:1-6

18 If the world hates you, keep in mind that it hated me first. 19 If you belonged to the world, it would love you as its own. As it is,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but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That is why the world hates you. 20 Remember what I told you: ‘A servant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a]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If they obeyed my teaching, they will obey yours also. 21 They will treat you this way because of my name, for they do not know the one who sent me. – John 15:18-21

어느 언어학 교수의 설명을 듣고…

글쎄… 지난 40여년 동안 본인 이름 하에 논문 하나 없는 사람이 콜롬비아 대학 교수였다고? 학계와 역사는 이상한 렌즈(Churchward의 무제국의 인간언어시發 이론을 기본으로 함)로 해석하고 자신만이 언어의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고 흔한 표절문제 때문에 그 마스터 키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러한 사고가 평생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의 태도란게 조금 非人間的이고 동국대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 치고는 弘益精神에 위반되는 것이니 아무리 설명을 해도 信賴가 가지 않고 오히려 학교 이름의 위상만 떨어뜨리는 것 같다. (e.g. Inca의 어원을 in (사람)+ca (태양) 나누어 태양의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inca는 Quechuan語로 왕족이란 뜻일뿐이다. 지금 중국어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어 Mandarin(中之宮臣) 의 어원과 비슷한 형태이다. 오히려 더 나은 설명으로 잉카의 태양신인 inti 의 ‘in’ 을 태양으로 설정했다면 모르나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은 사람人과 억지스러운 연결을 하기 위한 해석이라 밖에 설명이 안된다.) 보수적 신학으로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고 보수적인 교단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이 오랜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창조론을 부인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커녕 사람들이 만든 신화라 믿는 믿음없음을 신앙고백으로 삼으면서 표면적으로만 성서적 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학교를 판단하기는 조금 억지라고는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슬퍼하고 회계로 나가는 조짐이 안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들을 떠났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팔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뿐이다. 아무튼, 배움을 갈급해 하는 한국의 수만명이 이런 분을 따르고 있는 선생이라 하니 아쉬운 마음뿐이다.

마스터 키를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란 주장 또한 지금 온 세상을 휘덮고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급격히 발전해 (via Derrida, Foucault, Lyotard, Baudrillard, etc.) 서양에서 보이는 형태는 절대진리와 가치의 근거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전통파괴적형이 더 강조되고 있음.) 거의 모든 해석 자체도 주관적인 짜집기 식이니 訓詁學의 기본 조차도 무시하고 있다 (e.g. 산스크리트어와의 유사성은 불교경전의 번역으로 인한 어원에 대한 배경연구나 가능성에 대한 관심 자체가 두드러지게 빠져있다.) 성서해석학에서도 이런 사람이 어처구니 없이 많으니 (via 성서비평학의 Hase > Wellhausen, Budde, Eissfeldt, etc.) 어떻게 傲慢함으로 무너진 이런 학계의 기본 토대부터 바르게 잡을 수 있는지가 다음 일세기의 숙제이다. (e.g. 고고학: Mt. Ebal에서 발견된 Paleo-Hebrew form 이 페니키아어의 사용보다 더 오래되거나 또는 同時用된 것을 간주하면 메소포타미아文化發/바벨론發說을 기반으로 하는 비평적 고고학과 언어학의 교과서들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經驗主義에 입해 證據를 따라 해석한다고 하면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In his pocket

The rabbis advised:
keep two truths in your pocket,
one should read:
I am but dust and ashes
and the other should read:
the entire world was created for me

An 8-year-old has
something else in his pocket.

Confetti.

Why?

It’s his emergency confetti,
he says,
during these raw days
he carries it with him
everywhere
just in case
there is good news.

그의 주머니 속엔

라비들은 조언했다:
주머니에 두 가지 진실을 간직하라,
하나는 이렇게 적혀 있어야 한다:
나는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적혀 있어야 한다:
온 세상은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

8살짜리 아이의 주머니 속엔 다른 것이 있다.

컨페티.

왜?

그것은 비상 컨페티라고 그는 말한다,
이 험한 날들에
그는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어디를 가든지
그것을 가지고 다닌다.


聖書訓詁學

改新敎의 改革을 否認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今生人들만이 最高의 생각을 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것 마냥 傲慢함을 보이니 더 以上 숨을 쉬지 않는 祖上들이 남긴 글들은 外面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래서 現代 西洋의 hermeneutics 또는 exegetical studies 에서 아무런 疏도 없이 文法의 바른 理解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基本으로 하지만 다음 段階에서는 訓詁學을 適用하는 것도 必要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猶太人들의 聖書學의 基本的인 方法이기도 하다. 改新敎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이유는 不正한 解釋이 아우러져 獨自的이거나 個人的인 解釋들이 主流가 되며 亂舞하여지기 때문이다. 루터의 宣言文 “Here I Stand”는 훌륭했던 것이지만 時間과 같이 바뀌는 文化的 觀點을 통한 聖書解釋은 答보다 問題를 더 불러오고 있다. 基本的으로 過去를 尊重하며 나아가는 聖書訓詁學이 必要한 理由이다.

TIL 2023-11-13

기지국가론(基地国家論)이 바탕되는 인도태평양전략은 日의 전략판; 미중패권전쟁 (인태전략 > 첨단기술경쟁)

2010 Shock: Japan gave 2nd place in world economy to China; Senkaku

2012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일본은 극우로 탈바꿈 > 아베가 2012년말에 당선됨

Towards a more volitional ministry, rather than only-emotion ministry

The constant is the proclivity to win people to our point of view on metaphysical aspects of our faith that we hold dear rather than leading them to Christ.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calling is our own closeness to Christ, and thereby knowing where to lead others to. “You can’t make disciple of others without being a disciple yourself.” So, the commands of the Great Commission makes the prerequisite rather crystal clear. It’s given to someone who is already a disciple. Without following the footsteps of Christ, it can only be a confusing journey of halfhearted mediocrity.

As soon as Adam compromised on the word of God, everything fell apart. Just as we can’t even make the tiniest particle to split on our own, we can’t hold together what’s broken. It takes a miracle and God is more than capable of that. As Thomas a’Kempis reminds us, we must read His words humbly, simply, and honestly, and be cautious of being caught up in our greed of learning rather than obeying the words simply once the essential message is grasped.

Reflection on https://utmost.org/the-method-of-missions/ and TK I-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