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엽적 (枝葉的)
지엽적:
枝: 가지 지
葉: 입 엽
的: 과녁 적
[관형사·명사] 본질적이거나 중요하지 아니하고 부차적인. 또는 그런 것.
minor, unessential
The Sad State of Korean American Churches
23년전 부터 한인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하며 제일 기억나는 톱 7.
- 목사A 가 주는 메시지: “자기 자식은 공부와 대학 입학을 위한 자원봉사등의 준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있는 중고등부 행사에는 참여를 못한다.” 두 자녀 고등학교 9학년부터 시작해 4년동안 주일만 빼고 다른 모임에는 눈코도 안보였다. 무슨 공부를 훨씬 더 잘해서 이름 난 학교에 들어간것도 아니었다.
- 목사B 가 주는 메시지: “교회를 오래 섬겼던 장로의 아들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고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 장로의 아들을 교회에서 더 적극 지원하겠으나 너 같이 더 도움이 필요한 전도사는 그냥 모른체 하고 이해해 주시기를 바람. 떠나주면 얼씨구나 더 좋지, 장로 아들이 중고등부를 섬기고 그 이유 삼아 돈을 그에게 줄 수 있으니까.” 떠나주니 곧 바로 장로가 원하던데로 근대한 식과 함께 장로의 아들이 전도사로 임명된다.
- 학부모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 “왜 부모가 일에 시달려 힘들어하는 가정의 아이들을 픽업나가서 교회에 대리고 오느냐? 내가 직접 대리고 온 아이들에게 신경을 더 써달라. 이왕이면 부모가 교회에 대려오지 않으면 그냥 픽업을 나가지 말라. 부모가 대리고 오는 아이들에게만 신경을 써달라.”
- 권사A 왈: 너가 무엇인데 감히 권사의 손녀딸이 성적으로 물란한 것에 회계하라고 중고등부 지도권에서 임시로 탈퇴를 시키냐? 손녀가 죄를 짓던 말던 너 같은 전도사 주재에 무슨 상관이냐? 그 아이의 죄를 공개하는 것아니냐? 미래 아이의 시집을 망칠 생각이냐? (아이의 죄를 공개한 적은 없음)
- 권사에게 화풀이를 듣고 목사가 와서 하는 말: 일부러 공개할려는 것이 의도가 아니었느냐? (헐…)
- 나이드신 목사C 가 한 말: “요즈음 남자들은 다 포르노를 보면서 자란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꾸 죄책감을 주고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말라. 그런식으로 교육하는 것 아니다.” (헐~~)
- 헌금을 재일 많이 내는 성도의 말이 조용한 절대권위를 누린다. 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이라면 교회 지도층은 쩔쩔매고 끌려다닌다.
- 몇명 안되는 미국 (보통 한인 남편들) 교인이 있으면 그들의 말은 보통 한인교인들의 의견보다 더 특별한 우대를 받는다.
지상성공주의, 물질주의, 내로남불, 죄는 죄라고 부르지 말기 운동,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만 말하고 죄는 눈감아주기 운동,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부락 정신으로 단체유지하기와 우리가족이나 잘되자 하는 것이 주 목적인 교회가 판이하다.
Top 7 of what I remember as a youth pastor who had started 23 years ago in Korean American churches
- A message coming across from Pastor A: “My children have to focus on their studies and getting prepared to go to college, so they won’t be participating in most of youth group events.” Two of his children never showed up for any other meeting during weekdays (Fridays, or Saturday special meetings) or special events, save Sunday service for all 4 years of high school. Did they go to some Ivy League school and got excellent grades? No.
- A message coming across from Pastor B: “One of the sons of a long-time elder at the church is now attending a seminary, and even though I can’t say it to you explicitly, the church will be supporting him more willingly, so even though you have needs for more support of the church please zip your mouth and understand the situation. It’d be of course much better if you left, since we can put him as youth pastor and have a better rationale to give money to him.” After I leave, they throw a big party of ceremony of his appointment and then elder’s son is appointed the next youth pastor just as the elder had wished.
- Parents saying this: “Why are you picking up kids from families that have hardships and bringing them to church? Please focus more on our own children. If parents don’t bring them to church, don’t pick them up all together. Please focus on children whose parents come to the church only.”
- Exhorter A says, “Who do you think you are to discipline my daughter who has been sexually promiscuous by having her taken out from the leadership of the youth group? What does it matter to you, a mere youth pastor, whether she commits a sin or not? Aren’t you trying to publicize her sin? Are you trying to ruin her future?” (I’ve never publicly revealed her sin)
- After hearing an angry rhetoric from Exhorter A, the pastor comes and says: “Weren’t you trying to reveal what she had done wrong?” (WTH…)
- an aged pastor C says: “Guys these days all watch porn as they grow. That isn’t something strange. Don’t try to make them feel guilty and don’t say it’s a wrong thing to do. You don’t educate boys that way.” (WTH…)
- Whoever gives the most offering usually enjoys a quiet, but absolute authority in the church. His or her words and opinions always have the ears of the leadership of the church.
- If there are few white, American members of the church (who are often husbands of Korean women) their opinions are somehow treated with a special preference compared to regular Korean American members of the church.
The objective of worldly success, material success, hypocritical practices, or the movement of calling sin something else, or the movement of saying everything that feels good and positive and winking at sin have become commonplace. Churches that are about teaching the Bible and trying hard to live according to the Biblical worldview seem no longer in existence among Korean Americans. So many Korean American churches operate around a tribal mindset to merely be sustainable, and just trying to gain multidimensional benefits for one’s own family, but very little else.
What not to do as a new IT director
- Devalue existing employees
- by promoting someone that do not deserve promotions
- by putting forth product ideas that do not consider products already in use
- by hearing out all other inputs except the existing team directly reporting
- Promote a new product that “I” will be making
- with no due consideration of existing products because they are inferior to whatever product that “I” am going to be introducing
- Have existing developers resign or make exits through the means of attrition
- by giving all new, significant responsibilities to newer crew
- by reinforcing a false idea to the upper echelon of (IT) ignorant management that existing developers are incapable, and somehow out-of-date
- by continually reinforcing a message that someone new and better will be hired that will do the job better
- by continuing to hold meaningless weekly meetings that shut down all meaningful and creative inputs by repeatedly telling people that new, and more capable person will come in
旅情
사람은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
외로운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싸우다
쓸쓸히 홀로 떠나게 된다.
가까이 하여 마음 깊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란
이상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법.
인생이란 외로움 그 자체.
A man is born into the world alone
Fights the battles of life alone
And leaves this world by himself.
A close person that you can talk
about the deepest matters of the heart
only exists in a plane of ideals.
Life is but a lonely comma.
銀産分離 (은산분리)
“문재인 대통령은 인터넷 은행 분야에서 대기업의 은행진출을 제한하는 이른바 은산분리 문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JTBC (circa 2018年 9月)
① 산업자본(기업)이 은행을 소유하지 못하다록 막아놓은 제도 산업자본은 4%까지만 은행지분 소유가능
평정심을 잃은 모습은 꼴보기 싫은 모습
지금은 새벽 2시. 한국에서 제17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이제 막 끝났다. 내일이 주일이기는 하지만 실시간으로 시청하기 위해 일부러 오후때 늦잠도 잤었다. 마지막으로 남자 단체전이 있었다. 매 대회마다 똑같이 일본, 한국, 미국, 대만 순으로 끝났다. 매 대회와 똑같이 한국은 일본을 이기겠노라하는 기세로 시합에 임했지만 매 대회와 똑같이 한국은 다시 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마지막 한국 단체전의 경기 모습은 참으로 낯뜨거운 작면이 연출되었다. 세계가 보는 앞에서 한국 선수는 계속해서 드러눕고 한번도 아닌 세번씩이나 이런 저런 문제를 삼으며 나가서 시간벌이를 하고 머리수건까지 다시 매는 작면에 끝에 몇 초 안남은 시간 중 발에 태입을 다시 하겠다고 나가고… 2대 1로 지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혹이라도 이길 수 있는 틈이 있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구차한 행보였다. 다들 경악을 하는 건 물론이다. 그러면서 나름 한국팀이니까 누워서 침뱃기하지 않기위해 한국인으로서 그냥 무조건적으로 상대의 잘못만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더 높은 기준이 있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치사하게 나와도 존심을 지키며 야비하거나 구차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 모습. 누구든 다 원하는 모습이며 스스로에게도 원하는 모습이겠지만 혈투극의 극치에 도달할때는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일까? 한국은 이길 수 있다란 가능성에 모든 것을 바치듯보였다. 벌써 실력으로 판가름이 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운좋게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려고 하는 모습. 평정심을 잃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매우 추한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승리란 우상앞에 절하는 선수들. 물론 올림픽에서는 이기는 자에게만 월계관이 주어지지만 이런 시합에서는 이기면 그냥 타인에게 우쭐할 수 있는 권리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 뿐. 검도의 목적이라도 들먹이는 것과는 상관 없는 것이다. 인격향상. 아무리 칼이 오고가는 중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인격을 단련시키는 무도. 씁씁할 마음이다. 나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 어쩌겠는가. 하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고 최고를 상징하는 선수들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은 어쩔 수 없나보다.
쉬운 것이 과소 평가되서는 안됩니다
Easy is not to be underestimated. Easy taps the pool of talent and ideas out there that were turned off by hard.
쉬운 것이 과소 평가되서는 안됩니다. 쉬운 것이 어려운 것으로 인해 귀도 기울이지 않게 했던 재능들과 아이디어들을 실용할 수 있게 합니다.
– Chris Anderson (크리스 안더슨)
Deception is worse
Oh, I see your intent,
but out of courtesy, we won’t speak of it.
We know to assume best intentions,
and that often means we wink at apparently bad intentions
because, after all, we are imperfect, you and I.
Yes, let’s be kind towards each other,
but, please, I plea, let’s not deceive ourselves, or each other,
because deception is worse,
and it pierces deeper than a spear.
항상 기뻐하라
너무나 많은 교회가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긍적적인 생각운동에 잡혀있다. 교회들이 말씀화하는데 있어 중심되는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의 “항상 기뻐하라” 이다. 어떤 일을 단체적으로 추구하는데 있어서 불평이 많으면 장애물이 되는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불필요한 불평은 사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물론 믿음을 가진 자의 관점으로 참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대인배같은 마음도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사람들도 긍정적인 사고를 좋게 보고 있고 대기업에서는 이것을 종교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같은 현상이 보인다. 사람들이 현실을 보고 화가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느끼는 것들이다. 그런데 나름 어떤 단체적 더 큰 목적을 위해 사람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사고와 감정을 요구하는 것은 수준높은 인력 착취의 또 다른 형태일뿐이다. 세상과 같이 더 큰 긍정의 나팔을 교회에서 불기보다는 죄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회계하라는 나팔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회계가 있는 곳에는 어떤 얕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인력보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보여지게 되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은 인간의 얕은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더 이상한 인간들
기분이 상하더라도
앞에서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해주는 사람보다
기분 상할까봐
다른 수법으로 접하는 인간이
더 이상한 인간인것같다.
제시하는 목적은 허위인데
마치 중심적인 것처럼 거짓을 말하면서
상대와 의논도 하지 않은체
상대의 머리위에서 서서
상대를 위하는 선행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성적인 사람인데
상대를 무슨 동물로 보는
쓰레기같은 下手로 생각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생각한다고
나름 생각하는 生物.
어느 사이에 세월에 다시 두둥실 (Afloat on a cloud of time)
세월에 흘러 다시 무디어져 간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고
알뜻 모를뜻 마음이 해어져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구나.
뱃살이 나오고
마음도 찌고
정신도 찌니
그럴 수 밖에.
칼로 베어내야, 무디어진 것을 잘라내야 정신이 차려지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의 묻쳐 같이 두둥실 흘려가니 무디어지는 것.
절제와 검약을 다시 기본으로 삼고
지금부터 하나 둘씩 불필요한 것들은 다시 배어버리자.
The time floats to make dull once again.
Not just getting long in the tooth;
One can’t help but feel the fraying edges of the heart in subtle ways.
The belly sags,
but also the heart and mind,
so how could I not feel this way.
The invigorating of the mind comes from cutting away the dullness.
We become dull when we’re afloat on a cloud of time.
Get back to the basics of restraint and frugality,
and let us cut away the unnecessary wastes from our lives.
평생 버릇
어릴 적부터 받는데만 익숙한 사람은 주는데 인색하고
주는데 익숙한 사람은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영재의 배움의 특징
노뉴식 박사 曰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 자꾸 생각한다 (구 & 신 지식의 연결).
- 열정적 끈기가 있다 (밥도 안먹고 ___ 을 한다).
- 전두엽이 발달한 사람
- 다산 정약용 (1762-1836)
- 공부법 (한 단어의 의미를 바로 알고 넘어가기)
- 메타인지 학습법 (John Provil)
-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 — 효율적인 생각
- 임마뉴엘 칸트 (1724-1804)
- 46세에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 칸트의 노트
- 백색 간지를 사이에 넣어 제본
- 행 사이를 넓게
- 좌우 가장 자리도 많이 비움
- 디테일한 정리
- Benjamin Franklin (1706-1790)
- 행동관리계획서
- 시간, 인격, 버릇
- 절제
- 침묵
- 시간, 인격, 버릇
- 행동관리계획서
- 다산 정약용 (1762-1836)
-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공부를 해치운다.
- 이것을 통해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 모른다.
- 자신의 노트로 공부하라.
- 전두엽의 실행기능
- 계획하기
- 조직화하기
- 우선순위 정하기
- 기억하기
- 복습하기
- 사고의 유연성
- 공부 유형
- 큰그림
- 큰 그림은 빨리 이해를 하나 시험에 100점은 안나옴
-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면 보지 않음
- 반복하기를 싫어함
- 레고블럭
- 앞 부분이 안되면 다음 부분으로 가지를 못함
- 순서가 바뀌면 처음보는 것처럼 봄
- 시각형
- 페이지를 잘 기억함
- 청각형
- 말로 들은 것을 기억함
- 큰그림
야채죽 만들기
- 다시마, 멸치, 버섯으로 육수를 낸다.
- 들기름을 넉넉히 쳐서 야채 (양파, 호박, 당근)을 올려 볶다가 30분 동안 뿔린 쌀을 넣고 투명해 질때까지 볶는다.
- 육수를 넣고 팔팔 끓여주고 약불에서 20분정도 더 끓이 다가 걸죽해지면 새우젓 (1/2 TSP) 을 넣는다.
- 김, 깨등을 솔솔 넣어준다.
직원 수양회의 오류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회사에서 직원 수양회를 매년마다 시작하게 되었다. 첫 두해 정도 참석하고는 수양회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조다단이 무슨 큰 변화에 대한 뉴스를 듣기위해서라도 참석해 달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주제들은 특권, 문화적 겸손등 근본적으로 어용과 관용을 최고 가치관으로 두는 주제들. 어떻게 보면 서로들의 차이점이라는 것을 다 무너뜨리기위한 노력이다. 영락없이 사업분야에서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들과의 이해관계를 높이기 위해 오래동안 개발된 것들의 도입에 불과한 것들. 이런 가치관이 중요하다 생각되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다들 소비자들의 정신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과반수의 준비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며 소수민족이나 소수파의 억압이란 사상적 관점에서 세계관을 개발시키고 자신들의 사상을 팔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자연적 현상으로도 보겠지만 10억의 환자들을 위한 단체로 만들자는 목표을 주시하면 왜 이런 것들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 알수 있다. 이런 단체는 실패하게 되있다. 큰 목적을 두고서 어떻게 목적을 이루자는 주제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의 다른점을 부각시키면서 벽을 낮추자는 이상한 방법과 주제를 가지고 와서 서로 편안 한 공간을 만들자는데에 핵심적인 목적이있다. 혼자이면서도 편하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더불어 같이 공유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것이다. 불편함을 기본으로 삼고 목적지향적인 사고로 앞으로 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단체들의 기본적 성공비법이다.
그런데 지금 무슨 단체 문화 상의자를 도입해 이상한 짓거리만 한것이 4년째.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은 서로 서로 다른 점들을 다 평등화 시켜 다들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다른 점속에서 흘러나오는 강점들이 서로 서로 융합해 모여 앞으로 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되어 나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봤을때는 자신이 중심적으로 강하게 가지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믿음같은 곳에서 부터 힘든 것들을 극복하는 힘을 얻어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서의 자신의 현실 파악이며 절대적 믿음이며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능력이다.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남의 감정이 상할까봐 말을 못하게 만드는 단체문화를 만들어 개개인의 강점이 숨겨져가게 되있다. 서로 맞지않아도 언성이 높아지고 모임이 험악한 분위기라도 할말을 하며 개개인의 강점이 나와서 그것이 용납되고 감정과 무관하게 융합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지금 조성되는 분위기는 그냥 다들 서로 서로 조심해 주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이런 병신같은 분위기에서 무슨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단체가 되겠는가? 그냥 이력서만 위대해 보이는 거짓 전문가들이 들어와 전에 기민히 만들어졌던 팀들을 다 붕괴시키고 자신들의 업적세우기에 전념하고 있는 상황.
거짓이 난무하고 있고 큰 돈을 준다고 하면 간도 빼주고 있는 상태이다. 4년째 계속 이런 골빠진 소리들만 늘어내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냥 지내들 하고 싶은대로 모든 결정을 하고 있다. 그들에겐 어떤 근본이 되는 도덕적 이해란 빨리 붕괴될 수록 좋고 그럴수록 바른 말하는 사람들이 없고 세뇌교육을 통해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질문하게 만드는 분위기로 조성한다. 그 전 10년의 발전에 비해 4년째 계속되는 지금의 변화는 무슨 실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몇몇 교부금 작가들의 작업으로 들어오는 수입으로 회사가 돌아가고 있다. 어떤 실적과 전혀 무관한 등치만 큰 마케팅 회사로 변해있다.
큰 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일어나는 현상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원하는 단체 문화가 이런 것이겠다 싶다. 자신들의 무능력에 입닥쳐줄 수 있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되고 중요한 결정과는 무관한 “단체 문화적 만들기”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는 미치광이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만 서로 의논하게 하면서 단체는 추진력을 잃어가며 이상짓만 하게 해서 낭비와 낭비의 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병든 기업화 만들기의 제일 큰 힘을 쓰고 있다. 지금부터 5년 안으로 자체적으로 맥이 빠져 붕괴 단계로 가 있을것이다.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이제 출구전략을 세워나가기 시작해야 겠다.
북한용어: 괴로도당
“전에는 남조선 사람들을 괴뢰도당이라고 불렀습니다.” – 탈북자 2018/5/3
괴뢰:
[명사] : 꼭두각시
도당:
[명사] 집단을 이룬 무리
坑道 (갱도)
“북한이 폐쇄를 약속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들에서 전선 철거를 시작했다고 미국 CBS 방송이 보도했습니다” – YTN – (2018年 5月 3日)
갱도 (坑道) 坑 구덩이 갱, 산등성이 강, 구들 항 道 길 도
① 땅 속에 뚫어 놓은 길
② 광산(鑛山)이나 탄광(炭鑛)의 갱 안에 뚫어 놓은 길. 사람들이 오가고 광석(鑛石)을 나르며 통풍(通風)ㆍ광석(鑛石) 조사(調査) 등(等)을 하는데에 이용(利用)됨. 수평갱ㆍ사갱(斜坑)ㆍ수직갱 따위가 있음
고려인 3세의 고백: 한국은 고향같아요
“Когда я приезжаю в Корею, я чувствую, что вернулся домой.” (한국을 방문하면 고향에 온 것 같아요.)
사할린 (Сахалин, Sakhalin) 한인 동포 3세.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러시아인으로 엔지니어 일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가면 고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집에서 먹는 것도 한국인과 같이 밥과 간단한 반찬으로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할린 고려인 3세.
나는 미국이란 타국에서 수십년동안 한인 2세들을 대하면서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한인 후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마음 중심에 깊은 우물과 같이 자리 잡아버렸다. 물방울 하나 하나 뚝뚝 떨어지듯이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만 남은 여생 끝나기 전에 완성할려면 더 박차를 가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臣僕 (신복)
“새로운 경영자도 대한항공 조 회장의 신복으로 밝혀졌습니다.” – KBS News 9, (2018년 4월 24일)
신복 (臣僕) 신하 신, 종 복
[명사] [같은 말] 신하 (臣下) (임금을 섬기어 벼슬하는 사람).
尹東柱의 序詩 (原文)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尹東柱
桐千年老恒藏曲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천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않으며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申欽의 <野言> 中
安時: 2018年 3月 16日 (金)
행 21:17-36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야고보와 다른 교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의 법률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알려주고 모세의 법률의 나온 나실인 서약을 권한다. 바울을 이를 따라 행하여 유대인으로서 지킬 것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보여준다. 바울이 서약을 지키기위해 성전에 있는 동안 유대인들이 바울인것을 알아보고 에베소에서 대리고 온 일행중의 헬라인도 성전에 있는 줄 알고 다른 모든 유대인들도 선동시켜 바울을 잡아 끌어내어 때려 죽일려고 하자 이 소식이 지역구 행정 담당인에게 전해져 군인들을 대리고 바울을 잡아올려 했으나 군중들의 폭력으로 인해 담당인은 군인들로 인해 보호 받으며 돌아가고 군중들은 계속 바울을 쫓아내라고 소리질렀다.
바울은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고 율법아래에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율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할레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장에게 알리어 예식을 거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다 간과해 보이는 바울의 가르침은 회장이 없어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예수를 통해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전통과 무게가 어떤 것인지 바울은 잘 알고 있고 전에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도 존중해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울은 30일동안 이루어지는 나실린 서약을 이행한다. 그러나 이행 중에도 유대인들은 군중을 선동시켜 폭력을 행사하여 바울이 다시 로마 행정관에게 잡혀 들어간다. 비록 수백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지만 아직 까지도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죽였던 때 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반대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의 전통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 이 처럼 사람의 버릇이나 오랫동안 행해 온것이 바뀌는 것이란 쉽지 않는 것이다. 주님, 나의 오래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주의 뜻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때 순종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14日 (水)
행 21:1-16
바울의 일행은 동쪽으로 가며 몇몇 도시에서 제자들의 집에 머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다리거나 움직인다. 이때에 예언하는 자들과 선지자들이 있었으니 유대에서부터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말하기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묶여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라 하고 예언을 한다. 주위 형제들이 바울에게 울며 가지 말라고 하나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니 울지 말라고 한다.
예수님또한 자신의 사명을 위해 십자가 위에 죽음을 이야기했을때 사도들은 그리 안된다며 말리거나 슬퍼했었다. 바울의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며 길을 나선다. 묶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기까지 하노라 하며 자신의 사명을 선언한다. 사실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바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자신이 어떠한 용서를 받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다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았던 사명자였다. 하나님의 주신 하나의 용서에 그 분의 은혜에 모든 것을 다 던진 바울. 우리는 냉냉하고 썩어 없어질 여러가지의 세상것들에 매어 냉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요한계시록 3:15-16
安時: 2018年 3月 8日 (木)
행 18:24-19:7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온 아볼로는 언변에 능하고 성경에 능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의 도를 담대히 가르쳤지만 오로지 요한을 통해서 만 알고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예수에 대해 저 자세히 알려주고 아가야로 갈때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사도들이 그를 환영하며 받아 줄수 있게 편지를 써주었다. 그가 도착하여 능력있게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선포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공개적으로 물리쳤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때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만 알고 있었던 제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믿었을때 성령을 받았냐고 묻자 그들은 들은 적도 없다고 하여 안수하여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방언하며 예언하기 시작했다. 약 12명 정도되는 제자들이었다.
아볼로와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된 제자들이다. 그들은 요한이 가르쳤던 것 처럼 예수가 구약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삶이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쳤던 소리로 부르심을 받았던 요한. “회계하라. 예수 메시야의 시대가 지금 임하였다.”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회계를 통해 예수의 완전한 계시를 받아 드릴 수 있는 준비가 완벽히 되었었다. 아볼로는 인간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왔던 유대인이었다. 그는 이미 구약의 말씀에 능통하여 예수를 전하고 있었으며 이미 1년 반정도 고린도에 있으며 가르쳤던 바울의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면은 하나님은 어떤 유창한 것으로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방이 모여 강을 이르듯 작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사용하시는 것을 본다. 세례요한의 메시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전함에 응하는 아볼로의 겸허함.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드리는 요한의 제자들. 파가르기 좋아하고 어떤 권력체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가 중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만을 받고 순종하는 사도들이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아볼로와 같이 주께서 주신 맑은 정신과 재능은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겸허한 마음으로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7日 (水)
행 18:12-23
아가지역의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들어오자 유대인들이 다시 연합하여 바울을 공격해 재판에 세우며 율법에 어긋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라고 한다. 갈리오는 범죄한 자를 재판에서 보겠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관한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재판에서 몰아내었다. 유대인들은 재판장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리지만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후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 안디옥에 이른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다니며 모든 제자들이 믿음에서 굳건하게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하게 따르고 있다면서 왜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보다는 단지 바울의 복음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이다. 정조때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를 통해 가톨릭교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이유도 유학가의 성리학파들과 실학파들이 권력형태를 유지해 올 수 있던 왕 중심적 사상에 위협을 받아서였지 어떤 유학의 덕치주의 철학과 대립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선의 왕이 아닌 예수를 왕으로 섬기라 하니 자신의 권력체계에 대한 위협이 아니면 무엇인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졌던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바울 또한 계속된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오늘 날 진정히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은 예수보다 더 권위를 세울려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는 정면 충돌할 수 밖에 없게된다. 사탄은 오랜 시간 이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국력을 이용해 핍박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자신들의 뜻대로 살기 편한 환경으로 유도한다. 즉 자가신성화이다. 개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사상. 종교적인 면을 띄고 있지 않지만 자신들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하며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간다. 예수님의 독점적인 선포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대립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주님, 주께서 나의 삶의 진정한 주님이 되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 지역주의
- 미국을 보는 관점
-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 북한을 보는 관점
-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무속신앙
- 유교
- 불교
-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安時: 2018年 3月 6日 (火)
(16:19 ~ 17:34) 바울은 데살로니아, 베뢰아, 아덴(Athens)에서 복음을 전한다. 데살로니아의 유대인들은 계속해 따라다니며 군중들을 격분시켜 복음을 반대하였고,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아덴의 사람을 쟁론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행 18:1-11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간다. 같은 업종(장막만들기)에서 일하던 이탈리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같이 있으며 매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바울과 합류하였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매도하자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며 이제부터는 유대인들에게 가지않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며 회당을 나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니 회당의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신 후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아굴라는 로마에서 전도를 받은 유대 기독교인이며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 로마에서는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서로 분쟁이 심화되서 그런지 아니면 복음으로 많은 도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해서 그런지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그냥 다 몰아낸다. 이 때 나오게 된 아굴라다. 나중에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까봐 사역자로서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교회에서 중세때부터 시작된 성직자들은 교회 사역에만 전념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인간이 만들어넨 종교적 행위이며 인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될려면 사역자들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담당하는게 교회라는 인식에서 나와야 하고 교인들도 다른 업종에서 일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을 완전한 사역자로 받아드리지 않는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일단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의해 사역이 되고 안되고라는 썩은 인식이 자리잡혀 있는 한 교회는 계속 썩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는 행위는 옷을 털며 그들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피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의 나와 있는 파수군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할일을 다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해진 말씀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 들의 (영적인) 죽음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뜻. 그렇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언급 된 것 처럼 제일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나가 멀리 간 것도 아니라 바로 옆집에 머물게 된 바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감정이었겠는지는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이것에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던 바울은 얼굴이 철판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 너를 지키겠다는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 끝날때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바울과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5日 (月)
행 17:16-34
아덴에 온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숭배로 가득찬 것을 보고 매일 회당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전도하였다. 에비구레오(epicureans)와 스도이고(stoics) 철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바울을 아레오바고(Aeropagus)로 대리고와 쟁론한다. 바울은 그 들이 모시고 있던 무명의 신을 소개한다고 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를 들은 자 중에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이 있엇고 바울은 여기서 떠난다.
安時: 2018年 3月 4日 (日)
행 16:19-17:15
무당 소녀의 주인이 소녀에게서 귀신이 나간것을 보고 더 이상 돈을 벌수 없게된 것을 알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로마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둔다. 한밤중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사슬이 풀렸다. 지키고 있던 교도소장이 이것을 보고 자살을 할려 할때 바울이 우리가 다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그를 중단 시키자 그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다. 다음 날 교도소장에게 어제 옥에 가둔 사람들을 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두었으니 그들이 직접와서 풀으라고 반박하자 명령을 전한 경찰들이 다시 돌아가 이것을 전하니 바울의 일행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듣고 상관들이 두려워했다. 상관들이 직접와서 사과하고 그들을 옥에서 나가게 한다. 일행은 루디어 도시에 들려 교회를 격려하고 몇 도시들을 통과해 데살로니가로 온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카이저말고 예수가 왕이라한다고 하며 도시 전체를 격분하게 만들어 일행을 초청했던 야손을 잡아왔다. 야손을 돈을 주고 야손과 야손의 사람들이 풀려났다. 바울의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베뢰아의 사람들은 열심을 내어 말씀을 받고 성경 말씀을 매일 보며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 것인지 공부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사람들을 격분시키니 일행은 바울을 아덴에 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