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安時: 2018年 2月 7日 (水)

행 7:54-8:3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스데반이 구약을 이야기한 것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 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였다란 말을 하기위한 것인 것을 알고 그들은 화가나 이를 가를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것을 보개된다. 이를 말하니 종교지도자들을 스데반을 무력으로 도시 밖으로 끌어나가 돌로 쳐 죽인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와 같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며 죽는다. 이 때부터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의 교회들는 매우 큰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이 핍박을 앞장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울. 집집 마다 다니며 기독교인을 이 잡듯이 찾아네 옥에 가두는 일을 한다. 이 살벌한 사울이 나중에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바울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큰 죄나 작은 죄나 알고 있는 죄나 모르고 있는 죄, 털어보면 먼지 안나는 사람없다는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존제다. 죄가 밝혀졌을때 인간은 자연적으로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진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서 그는 부끄러움에 숨어버린다. 그 부끄러움은 강퍅해진 마음이 아니고 양심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면 아담의 자손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죄책감이라 한다. 이 죄책감은 마음의 안내자이다. 회계하라는 신호이다. 그 신호를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하던지 아니면 부인하고 악마의 편에 서는 것이다. 현시대에 와서 심리학과 사회학이란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둔 인간을 주제로 한 학문들은 이 중대한 신호를 무효화하는데 앞장서서 1960초반부터 인간을 비인격화 하는데 성공했고 우리는 그것을 전 세계적 사회의 매우 빠른 퇴보를 보며 지금에 이르러 왔다.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던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가인이 아벨을 돌로쳐 죽였고,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일려했던 이유를 보면은 다 교만에 눈이 가리워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시와 질투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에 반항에 살인자들로 변했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성스러운 존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 스데반이 구약을 읊으면서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난 그들의 죄. 구약은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이란 교훈의 거울로 우리의 죄를 나타내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반응 중에 이를 갈았다는 말이 나온다. 지옥을 표현할 때 이를 간다고 나온다.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지옥을 향하고 있다하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보좌옆에 예수를 보게 될때 그냥 홧김에 그를 끌어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그들이 예수에게 한 것처럼 역시 율법으로 따지면 처형할 수 있는 권리도 타당한 과정도 거치지 않고 맹수들 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버린다.  신성모독이라 이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무지는 여기에서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죄를 대면했을때 이들은 날뛰는 하이에나들로 변한다.  구약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간통과 살인을 언급하며 죄를 대면하게 했을때 다윗은 날뛰는 하이에나로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옷장같은 골방에 들어가 배옷을 입고 머리에 흙과 재를 뿌리며 몇날 몇일 동안 금식하며 통곡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피눈물이 되게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하였다. 회계를 한다고 해서 죄값을 치루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몇 세대를 걸쳐 심은대로 거두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렸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이라 불리지 않나 생각된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했으면 유대인들의 역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다. 주님, 성령님께서 죄를 인식하게 하시는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회계하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히 못할 죄가 없으면 다시 새롭게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무한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아무리 작은 죄라도 마음이 더 강퍅하게 부인하고 사탄 마귀의 유혹과 어둠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스데반처럼 죽음 맹렬한 순간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간것 처럼 이 하나 밖에 없는 삶또한 주만 따르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6日 (火)

행 7:37-53

스데반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1) 모세는 이스라엘사람중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중재자의 역활을 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숭배를 한다. 하나님은 전의 선지자의 예언 처럼 그들이 계속해 우상을 섬기게 나두셨고 예언의 말씀대로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다.
(2) 다윗의 시대까지 성막에서 하나님의 예배가 이루어졌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건물에 자신의 임재가 국한되어 있지 않다라고 상기 시켰고 백성의 조상처럼 성령을 자꾸 반대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팍한다고 말했다. 오실 의로운자에 대한 예언을 한 사람들을 다 죽이기 까지했다. 그리고 당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배신하고 살해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특별히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역사속에서 비춰진 과거의 행적을 언급하며 스데반은 그 후손인 그 사람들을 향해 너희 아비가 예수님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인 것 처럼 예수님을 죽였다고 분명이 알려준다. 모세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눈 앞에서 체험하면서도 불평하고 불만하고 불신하고 우상을 섬기었다면 지금 과학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더 하면 더 했지 이런 시대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바울이 로마서 6장1절에 언급한 것 처럼 죄가 많을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랴 하고 반문한다. 이 세상이 그 때보다 더 나뻐진 세상이다. 더 거짓된것이 만연한 이 세상.  주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더 특별하고 귀중히 여겨야 하는 지 더 깨워 알게 하여 주소서.  모세는 입밖으로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다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또한 앞에 펼쳐지는 가관앞에서 낙담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시며 가실 길을 걸을 셨습니다.  주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버리고 불신한다해도 오리지 이 한 인생 주님을 향해 끝까지 불타게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5日 (月)

安時: 2018年 2月 5日 (月)

행 7:17-36

스데반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1) 애굽땅의 유대인들이 많아져 새로 임명된 애굽의 바로 왕이 유대인의 아기들을 죽일때 모세가 태어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살게 되어 애굽의 왕실의 자녀들과 같이 교육을 받는다. 마흔이 되어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는 지역을 방문하고 자신의 동족사람들이 애굽 사람에게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인다. 다음 날 모세는 이스라엘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중재할려고 하자 그들은 우리도 죽일꺼냐고 네가 우리의 재판관이냐 지배자이냐며 시비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어제 자신이 행했던 살인이 벌써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이것을 알게된 바로는 모세를 죽일려고 하자 모세는 미디안 사막으로 도망쳐 이방인으로 살게 된다.

(2)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고 나서 하나님께서 시네산 근처에서 떨기나무 불의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 애굽에서 탄압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구원하시겠다고 하며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신다. 네가 재판관이냐 지배자이냐 하며 시비를 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배자이며 재판관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사라엘 사람들은 애굽 땅에서 여러 기적을 통해 나오게 도와 주신다. 홍해를 건너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민들처럼 살게 된다.

 

모세는 120살까지 살고 죽는다. 나이 80살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종으로 쓰신다. 모세는 무슨 휼륭한 사람이 아니다. 어릴때부터 궁전의 모든 호화로운 것들을 즐기며 수백명의 종을 부리며 산 귀족살이를 했었고 마흔정도되어 무슨 업적을 남긴것도 없고 무슨 훌륭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고 화가나서 그냥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되있었던것.  이것을 보면 사람의 생명을 그리 귀하지 않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대로만 행동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빚고 다지는 시간이었을까?  글쎄다. 그 40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거기서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이 있다는 정도까지만 나온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모세. 귀족살이를 하다가 평범한 삶을 살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의 삶의 모든 것을 다 하나 하나 배우고 살다보면 겸손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많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추측이며 견해이다. 아무튼 하나님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애굽땅에서 나와 무슨 철야기도와 심오한 헌신에 감동을 받으셔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기적적으로 음식으로 제공해 주시고 물이 없을때 돌에서 물이 강처럼 솓아져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감사와 찬양은 커녕 불평과 불만을 모세에게 호소할 때 제일 미운짓만 골라할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죽였을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 처럼 사람들의 상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하고 대적하는데 그 앞에서 하나님께서 보란 듯이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모세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 중에 제일 큰 기적은 바로 홍해를 건너는 역사.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제는 침례또는 세례를 통해 물이란 성례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 상기한다. 40년 동안 광야에 있어도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셨던 하나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님의 임재로 자신들의 백성들과 같이 하신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유치원생같은 어이없는 짓을 했을때 속으로 화만 났는데 하나님은 은혜로 그 사람들을 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겠다.  주님, 나의 인간적인 감정으로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루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 그들에게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4日 (日)

2/4/2018 (주일)

행 7:1-16

유언비어의 진실여부에 관한 대제사장의 질문에 스데반은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아브라함의 역사부터 시작해 설명한다.

(1)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 명하신다
(2) 후손이 다른 땅에서 사벽 년 동안 나그네같은 생활을 하리라 예언하시고
(3) 종 삼는 나라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시고
(4) 할례의 언약이 아들 이삭과 야곱을 이어나가 야곱이 열두아들들을 낳았다
(5) 요셉이 자신들의 형제에게서부터 팔려 환난을 거처 애굽의 통치자로 세워지게 되고
(6) 가나안 땅에 흉년으로 요셉과 요셉의 아버지 요셉의 가정은 다시 상봉하여 모두 애굽에서 같이
(7) 살다가 요셉은 죽어 아브라함이 과거에 세겜에서 산 묘지에 장사되었다.

유대인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스데반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최종적으로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지는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 역사의 시초인 아브라함부터 언급한다. 공립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도 귀해 보통 사람들은 성경책도 없는 시대였지만 스데반이 얼마나 상세히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는지 보면은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때 얼마나 상세히 듣고 외웠는지 알 수 가 있다. 요즈음 책도 많고 설교도 많은 시대에 살지만 주위에 많은 교인들은 구약을 언급하면 잘 몰라서 쩔쩔매는 것을 보게 된다. 책이 귀했던 스데반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은 더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요즈음에는 구약은 끝난 하나님의 역사라 그냥 덮어 두어도 괜찮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한 목회자들의 가르침도 있어서 그런거겠지만 이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성경관을 기억하면 된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시고 그것을 기초로 여기시고 가르치시고 삶을 사신 분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의 말씀이 담긴 귀한 보물이다.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과 말씀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초로 삼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역사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깨닳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브라함을 통해하신 언약의 말씀(창12)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요셉이 예수님의 그림자같은 유형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하나 하나 다 언급하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나간다.

성경은 그냥 어떤 사람들이 쓴 소설책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그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므로 내가 이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그리고 삶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다 우연으로 일어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요셉의 자신을 버리고 종으로 판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때 “당신들은 악의로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뜻으로 이렇게 하셨으다” 란 말을 한다. 그냥 성품이 너그러운 사람의 말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말이다. 주님,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더 인지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아가게 하시고 주께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하게 하소서.  이 주일날 말씀을 통해 역사하여 주시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께 신령과 진정으로 합당한 예배를 드리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3日 (土)

2/3/2018 (토)

행 6:1-12

헬라 유대인들이 헬라말하는 과부들이 교회에서 공평이 음식을 못받고 있다고 아람말 하는 유대인들에게 불평하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명의 인도자를 세워 그들이 배급에 관련된 일을 맡기로 하고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부터 예루살렘에는 제사장들을 포함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칠인 인도자들 중에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스데반이란 집사가 있었는데 회당에서 다른 종교파 사람들과 논쟁하다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어서 시기심에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유언비언을 퍼뜨려 스데반을 공회에 세운 후 거짓증언자들을 세워 스데반이 예수가 이곳을 다 무너뜨리고 모세에게서 부터 받은 것들을 다 바꾼다고 말했다고 거짓증언하였으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같았다.

 

미국의 이민교회에는 영어만 하는 사람들 한국어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영어와 한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기독교회 또한 헬라어만 하는 유대인들, 헬라어와 아람어 (당시 지역의 유대인들이 쓰던 말; 히브리어는 고전어 또는 성경의 언어로 인식된 상태), 그리고 아람어(+히브리어)만 하는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로 아람어만 하는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고 헬라어만하는 가난한 과부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자신의 필요를 전달하는데 불편이 있어 배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너무 급속도로 성장한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것을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떤 조직을 형성할 수 있는 틈도 없었다. 이에 배급과 관리를 위한 조직이 형성되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만 힘쓸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날에도 목사나 장로들은 사실 상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많은 사역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본다. 기도와 말씀 이외로는 거의 집사들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목사들이 말씀에 더 시간을 보내고 더 깊게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너무나 자주 설교한다고 앞에서 자신의 철학이나 의견 혹은 자신의 생각을 설교로 착각하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통로로 삼아 전달하는 사람이 설교자의 역활이다.  다음으로는 스데반이 나온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라고 나온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를 받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다. 구약 광야의 모세가 인도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면 (출 18장)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앞에 거룩하면 자신이 내려와 기적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흠이 없이 깨끗한 거룩하면 하나님의 성령깨서 능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는 죄사함으로 깨끗하게 되지만 우리의 죄의 습성을 따라 살면 그 역사에 더러운 것이 끼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삶속의 모든 죄를 멸하여야 한다. 스데반은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이 되었었다. 그리고 진리를 논하는데도 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예수님 당시때와 같이 더러운 영적 세력들은 시기와 질투로 싸여 스데반을 죽일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따르면 세상이 핍박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을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스데반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이 더러운 영적 세력들로 조종받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순종의 길을 걷는다.  주님, 나의 삶속에 언행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것이 있다면 담대히 재거하게 하시고 오로지 성령충만과 말씀의 깊은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여 주께서 능히 역사하실 수 있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말로서 행동으로서 더러운 죄를 범했습니다. 나의 입을 깨끗게 하시고 나의 마음과 행동이 주를 기쁘하는 거룩한 그릇이 될 수 있게 주의 보혈로 씻어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New research says Christianity in US is growing stronger

(英/韓飜 下)
http://thefederalist.com/2018/01/22/new-harvard-research-says-u-s-christianity-not-shrinking-growing-stronger/
 
Before coming back to another Korean church I spent about a decade attending two conservative “white” churches. One was Three Rivers Church in Plainfield, IL, and another was Heritage Christian Fellowship in Albuquerque, NM. When I was a member of those churches, I always thought those churches were exceptions rather than a rule compared to the mainstream society. The commonality in both churches is a glimpse into how broken people of the Great American Experiment is coming back to the fold of Christ’s Church. Simply put, sinners repent and follow Christ. Not all people come from sad backgrounds, but testimonies were being shared by broken families, widowed spouses, ex-addicts, ex-criminals, struggling parents and children, and so on. Heritage was an exceptional church led by a group of people dedicated to the Scripture. You had a board of elders for preaching, teaching, pastoral outreach, and so on, and deacons just like any Biblical church, but along with such leadership, the congregation consisted of families who were homeschooling their children. I witnessed a consistent stream of people coming to accept Christ and getting baptized in front of the congregation. The morning adult bible study class was always packed full. The Biblical church discipline was also put into practice when a couple was trying to have a divorce. The discipline was executed faithfully to what the Scripture had mandated. Even the selection of elders methodically followed the Scripture to its fullest. Of course, people who didn’t agree with such practice would simply disappear from the congregation, but the growth seemed sure — not only numerical growth, but it was easy to feel the spiritual growth of the congregation.
 
Sadly, such experience of Biblical church leadership and growth was not as common with Korean churches. Compared to those English-exclusive American churches, the Korean churches tended to have much more of so-called educated class of people. Few things to note: the unspoken emphasis and implicit theological attitudes still heavily leaned towards a disguised version of prosperity gospel, perhaps as a reactive relic of recent past, historical experience. (e.g. There are many who believe their job is to preach to help find congregants find happiness as a Christian. They might as well start yoga classes at church.) Leadership is usually more concerned about being respectable to outsiders, and their attention to the type of people they want to attract reflects it. There are many healthy churches for sure, but a lot of pastors I had worked with in the past still showed much divided attention with gimmickry of latest church growth trends, rather than spending sufficient time in the Scripture as a faithful servant of the Word. Ironically, at the moment, I’m attending a Korean church associated with a relatively liberal mainline denomination, and there, the pastor is dedicated to studying and preaching from the Word only, in the spirit of sola scriptura, sola fide, and sola gratia (in the most of context). I’m grateful for this. However, as for the many of Korean churches, there isn’t a mass exodus of younger generation from Korean churches, but it has been a consistent evaporative loss. Thanks to a heavy cultural emphasis on worldly success predicated upon a high level of education, a lot of them end up joining the social and intellectual realm and ranks of mainstream elites, thereby inadvertently playing by the rules of those hostile to the Biblical Christianity. Largely, Korean American churches still remain as a subculture of the mainstream, an immigrant church, and thereby catering to the needs of people trying to adapt to the greater, corrupt culture rather than actively encouraging the abandonment and the transformation thereof. We shall see how God will use the Korean and Korean American churches in the years to come, but I think it’d greatly help with Lord’s work if more American churches approached the immigrant churches as Jesus did with those two walking to Emmaus.
 
韓飜
 
새로운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는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다
 
http://thefederalist.com/2018/01/22/new-harvard-research-says-u-s-christianity-not-shrinking-growing-stronger/
 
다시 한인교회로 돌아오기전에는 십년정도동안 두개의 보수적인 백인교회를 다녔었다. 하나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三江 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뉴멕시코주의 헤리테지 (전통유산) 교회 였다. 다니면서 그 교회들은 주류사회의 대부분의 교회에 비해 항상 예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두 교회의 공통된 점은 미국의 대실험 사회의 망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말하면 죄인들이 회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상이다. 다들 어려운 삶의 배경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간증들은 이혼으로 깨진 가정들, 미망인들, 과거 마약 중독자들, 전과범들, 힘들어하고 있는 부모와 자식들 등이었다. 헤리테지는 이례적인것 같아보이는 우수한 교회였다. 지도자들은 다 말씀에 헌신된 장로들이었다. 설교 장로, 가르치는 장로, 목회 장로 등등이 있었고, 그리고 어느 성경적 교회처럼 일하는 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두드러지게 다른 것은 교인들의 다대수 가정이 아이들을 집에서 홈스쿨(학교로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꾸준히 새로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인들 앞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주일 아침 어른 성경공부반은 항상 꽉 차있었다. 어느 가정에서 이혼을 언급하고 있을때 성경적 교회 차원의 징계도 행해지고 있었다. 징계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 따라 이루어졌다. 장로는 선택하는 과정또한 성경말씀 그대로 따라 행해지고 있었고, 어떻게 따라 행해지고 있는 과정 또한 교인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징계나 과정에 동의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적으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성장또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오래다녔던 한인교회에서의 경험을 생각할때 성경적 교회 지도와 성장은 그렇게 자주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백인교회와 비교했을때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한인교회에는 교육수준이 확실히 더 높다는 사실이다. 한인교회에서는 다음이 관찰된다: 무언으로 행해지고 암시적 신학적 경향은 아직까지도 위장된 기복신앙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현시대 과거역사의 유물이지 않나싶다. (e.g. 많은 목사가 자신의 일은 설교를 통해 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행복을 찾는것이라고 믿는다. 그냥 교회서도 요가 수업을 시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지도층은 주로 외부인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모습으로 보이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반영해 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의 형태가 같다. 매우 많은 건강한 한인교회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 같이 일했던 많은 목사들은 아직가지도 최신 교회성장에 대한 술책에 관심이 흩어져 있었고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종으로서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에는 시간투자를 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 비교적으로 진보적인 주류기독교단에 속한 한인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현 목사님은 전통적인 말씀만, 믿음만, 그리고 맥락에 따라 은혜만을 바탕으로 성경말씀만 공부하고 설교하시는 목사님이시다. 이 때문에 감사하다. 그러나, 많은 한인교회에 대해서는 갑작스런 젊은 세대의 출애굽기같은 탈출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 증발되고 있는 현상이다. 고등교육을 통해 세속의 성공에 매우 큰 초점을 두는 문화 때문에 그럴까? 많은 한인들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통해 손 쉽게얻은 신분상승을 통해 주류 엘리트의 사회적 정신적 영역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는 아니겠지만 성경적 기독교 문화에 대적하는 사람들을 따르는 양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크게보면 아직 현제 실존하고 있는 한인교회들은 주류사회속의 小문화적 자리, 즉 이민교회로 있으며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부패된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돕는 것에 비중이 더 가 있고 부패된 사회의 모습을 버리고 더 적극적으로 변화시킬려고 하는 노력은 적어보인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미국에 한인교회들을 어떻게 쓰실지 시간을 두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교회들 또한 엠마오를 가는 두 제자에게 다가갔던 것 처럼 이민교회에 접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安時: 2018年 2月 2日 (金)

2/2/2018 (금)

행 5:27-42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설득시켜 공회앞에 대려와 청문회를 연다. 기본적인 질문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정의를 문제삼기위해 예수의 이름을 가르치느냐 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는바 이며 복음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로 세운바 되었음을 알렸으나 종교 지도자들은 더 크게 화를 내며 죽이려고 할때 가말리엘이라는 율법교사가 과거의 이질적 종교운동도 없어진 것을 참조로 그냥 참고 관망하여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보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진정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도들을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며 밖에 나가 계속해 예수의 이름을 전도한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에 대한 언급을 보면 공회를 연 Sanhedrin의 지도자들은 다 하나같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엄격히 지키는 율법으로도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그 어떤 타당한 것도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었기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무데뽀로 추진한 불법적인것이었고 그것도 모잘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때의 사건을 제조작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당사자들이었다. 이렇기에 죄책감이 목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을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앞에 인간의 반응은 간단해야 한다. 그냥 이실직고하고 자백하여 회계하면 된다. 아무리 큰 죄라도 회개하는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커녕 더 큰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죄로 인한 결과, 즉 죄값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이어져 회계까지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얼마나 슬픈가.  그러나, 우리도 같은 행동을 보일때가 많다. 마치 심리학의 fight or flight 반응처럼 죄책감을 크게 느끼는 와중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담대하게(?) 자포자기식으로 그냥 더 큰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해버린다.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면 이렇게 행동하면 않된다. 회계로 직결해 하나님앞에 이실직고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운바된 사도들은 이러한 핍박과 고난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계속 부르심에 충실하다. 사실 여기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은 이 시대 사는 유대인들의 모든 공간적인 환경, 정신적인 삶과 문화를 지배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제일 잘나가는 드라마, 영화, 정치, 경제적 세력들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때는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었다는 것.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세력들 앞에서도 전혀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기본적인 원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다. 그 어떠한 세속의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너무도 단순한 순종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에 칼이나 총이 들어와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때문이다.  이 세상 하늘이 무너져 머리위에 떨어진다해도 육신은 깨져 죽는다해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있기에 우리는 한 발더나가 기뻐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각오가 되있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모습이고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죽음을 각오하며 복음을 위한 육신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그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기꺼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해 나가는 것이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주님, 너무도 편하게 메마른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정작 육체적 핍박이라도 있으면 잠에서라도 깰텐데요. 이러나 풍족한 삶에서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무뎌져 죄에 빠지지않게 말씀으로 깨워주시고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Self-serving blindspots

Every organization reflects the values and the beliefs of its leader and constituents. And it’s not difficult to observe a gamut of characteristics that flow out of how the organization is run. The best perspective can be gained from inside, of course, regardless how it is viewed from outside. The net effect of an organization and the glow around it is usually not reflected internally. Depending on the purpose of an organization, the externality of net effect of the organization may be of the greater importance than the experience of what is going on internally. However, all organizations concern themselves heavily with the internal experiences of its constituents, especially those with authority and power.

The ideal, Platonic image of a philosopher king may strike as quaint for many, but the health of an organization often depends on it. It seems that the human tendency, unbeknownst to himself, is to set up a multidimensional framework of environment that best serves himself.  Acton’s dictum reminds us that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and we see the effects ubiquitously. With authority, power, and influence is typically taken for granted in a handed-down framework, and constituents become somewhat of a captive audience with assumed roles. In many small scale, we see this playing out in cult groups, and there’s only a paper-thin difference when compared to socially accepted organizations. With the right elemental factors, the organization can sustain itself for a long period of time while remaining remarkably ineffective. In this reality, we often trust our leaders, mere human being, with a great risk.  Integrity is often cited, but not practiced.  Integrity comes with a heavy responsibility that should test the limits of internal conflicts we experience as human beings, but not many individuals are built to withstand such awesome struggle without a sense of abandonment of self.  Without such tension at a highly private mental and spiritual space of leaders, we often get cheap imitations that behind a veil of public image turn out to be self-serving individuals to thrive. This is a sad reality of society we live in, and even though we have few examples in history such as Byzantine empire that groomed royal retainers, the modern society has completely abandoned such ideals to allow untamed, and uncultivated anima in the laissez-faire genius of Enlightenment.

安時: 2018年 2月 1日 (木)

2/1/2018 (목)
행 5:12-26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되지만 시기하던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오게 하고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사도들은 순종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그 들을 잡을려고 하지만 따르는 무리가 많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사도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고 예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원래 사두개파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에 큰 비중을 두어 성전의 제사장의 역활을 신앙의 중점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라 정신적으로 성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더 말씀에 충실할려고 했던 이들이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정 반대편에 앉아 심지어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죽였던 사람들. 그들은 복음의 사자들을 옥에 가두고 기회가 있었으면 죽이기까지 했을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알아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바르고 진실된 것을 보이실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다.  영어로는 teachability.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고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말씀에 대한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배우고 순종의 길을 걷기를 아에 생각조차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알고 거기서 그치는 것도 문제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담대함은 더 곤란한 입장이다. 그냥 책을 읽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마음의 문을 닫아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면 나와 자신이 편히 살고 있는데 왜 와서 방해하는 냐란 태도를 취할 사람들이다. 이런 것을  두고 강퍅하다라고 한어로 표현한다. 강퍅한 마음. 하나님이 사도들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동시에 이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나의 마음은 강퍅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진리가 나를 변화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주여, 너무나도 쉽게 강퍅하게 변하는 마음의 주의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여주시고 뜨겁게 하여 나의 토기장이 되시는 주께서 나를 주가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 될 수 있게 빚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온도의 차이

100여년의 저온도를 기록했다던 한국의 겨울. 가만히 있어도 맨살이 시릴만큼 추웠나 보다. 그러나 여기는 눈 한번 오지 않고 도리어 가을의 선선한 느낌이나서 아직 입동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밤의 온도가 보통때 보다 낮아 춥다란 느낌이 든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방에 있는 휴대용 난방기를 틀어서 따스함 가운데 포근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남쪽에 있는 직역이라서 그런지 대채적으로 아직까지는 따뜻하다. 추우면 체온의 유지를 위해 더 두꺼운 옷을 끼워입고 따뜻하면 그럴 필요없이 편하고 얇은 옷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것이다.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마치 휴대용 난방기처럼 주위 환경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 바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의 기질의 차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40여년 삶을 살면서 경험했던 독특히 따뜻했던 사람들이 있다. 기질의 열이 아니었다. 성격도 아니었다. 시카고에 있는 무디 신학교를 다닐 때 알고 지냈던 이 전도사님이란 사람이 그 독특했던 사람이다.
 
나보다는 몇 살 위셨지만 항상 예절을 지켜 대해 주셨고 만나면 항상 이상하게 과분한것 같은데 과하지 않는 기쁨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학교에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언급만 나와도 환하게 미소를 지게하는 인물이었다. 이 전도사님을 만나면 일단 상대를 진정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 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 만나면 마치 오랬동안 멀리 지내다가 다시 만난 친구처럼 그는 깊은 친근감으로 접근해 가까이 와서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실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는 이런 태도는 당연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儒敎的으로 엄격한 어른들의 무언이 가득했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생소하다 못해 과잉반응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전도사님은 이런 사람을 향한 태도를 매일 뜨는 태양처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나는 무척 궁금했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현실에서 만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와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했었다. 그 온기의 비밀은 다름아닌 은혜앞의 겸손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집에 오면 반겨주는 강아지를 보라. 주인의 과거를 따지거나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집개는 집사람을 마치 재일 사랑하는 사람처럼 반겨준다. 집에 올때 그렇게 반김을 받을 때 얼마나 기쁘고 기분이 좋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이 타인을 집개처럼 반겨주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전도사님은 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라고 일부러 그렇게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사람들을 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 성격은 내성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자신을 개 만큼 낮추었던 이 전도사님이었다. 그렇다. 버려진 개보다도 못한 우리를 구원해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인데 아무데다가도 쓸대없고 구차한 인간적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그리스도의 촛대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찬 바람 쌩쌩끌어오는 냉장고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 전도사님의 따스함은 분명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 같아 더 그립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