改新敎의 改革을 否認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今生人들만이 最高의 생각을 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것 마냥 傲慢함을 보이니 더 以上 숨을 쉬지 않는 祖上들이 남긴 글들은 外面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래서 現代 西洋의 hermeneutics 또는 exegetical studies 에서 아무런 疏도 없이 文法의 바른 理解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基本으로 하지만 다음 段階에서는 訓詁學을 適用하는 것도 必要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猶太人들의 聖書學의 基本的인 方法이기도 하다. 改新敎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이유는 不正한 解釋이 아우러져 獨自的이거나 個人的인 解釋들이 主流가 되며 亂舞하여지기 때문이다. 루터의 宣言文 “Here I Stand”는 훌륭했던 것이지만 時間과 같이 바뀌는 文化的 觀點을 통한 聖書解釋은 答보다 問題를 더 불러오고 있다. 基本的으로 過去를 尊重하며 나아가는 聖書訓詁學이 必要한 理由이다.
Author Archives: mhan
TIL 2023-11-13
기지국가론(基地国家論)이 바탕되는 인도태평양전략은 日의 전략판; 미중패권전쟁 (인태전략 > 첨단기술경쟁)
2010 Shock: Japan gave 2nd place in world economy to China; Senkaku
2012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일본은 극우로 탈바꿈 > 아베가 2012년말에 당선됨
Towards a more volitional ministry, rather than only-emotion ministry
The constant is the proclivity to win people to our point of view on metaphysical aspects of our faith that we hold dear rather than leading them to Christ.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calling is our own closeness to Christ, and thereby knowing where to lead others to. “You can’t make disciple of others without being a disciple yourself.” So, the commands of the Great Commission makes the prerequisite rather crystal clear. It’s given to someone who is already a disciple. Without following the footsteps of Christ, it can only be a confusing journey of halfhearted mediocrity.
As soon as Adam compromised on the word of God, everything fell apart. Just as we can’t even make the tiniest particle to split on our own, we can’t hold together what’s broken. It takes a miracle and God is more than capable of that. As Thomas a’Kempis reminds us, we must read His words humbly, simply, and honestly, and be cautious of being caught up in our greed of learning rather than obeying the words simply once the essential message is grasped.
Reflection on https://utmost.org/the-method-of-missions/ and TK I-IV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중고등부 사역 시절때 자주 불렀던 찬양 중 Steve Green 의 People Need the Lord 가 있었다. 절망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좋은 메시지이다. 실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해서 가는 것 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가사가 더 주님의 사역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주님의 사역에서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전제하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님의 감정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에는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는 정도이지 그것이 주님의 사역을 특징짓는 구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나는 순종할 뿐이란 사역이 중심을 이룬다. 사도들을 보내실 때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가라고 하셨지 측은지심으로 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라는 어떤 인간의 깊은 감정에 호소하시는 말씀은 전혀 없다. 밀물처럼 등락달락 거리는 인간의 감정을 따라 가는 사역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포장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사람들과의 의견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르치지 말라고 말하고 심지어 사역자체에서도 그것이 반영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보다 인간의 감정을 따르는 사역은 이미 죽은 사역이고 하나님의 관점보다 인간의 관점을 더 중요히 여기는 잘못된 사역이다.
Just as Father had sent me
There’s a praise song called People Need the Lord by Steve Green which I had sung often as a youth pastor. It has a good message of the fact that we need to reach out to people who are in despair and lost. However, the message that we are go to people because of God’s command is probably closer to the Lord’s ministry than the one that focuses on the needs of people. Even though there was no direct mention of the need of people in Lord’s ministry, it is one that is generally assumed in the background. When it comes to appeal to emotion, the gospels only go as far as mentioning that Jesus had compassion on people, but that does not characterize his ministry as a whole. Jesus merely mentions that he is only doing what he does because God had sent him and that God had commanded him and not much more. When Jesus sends his disciples out he tells them that he is sending them just as God had sent him, not because they ought to feel deep compassion for the lost people and fill their needs. There is no profound appeal to emotion that rises from compassion. Is there a greater sin than packaging one’s ministry as being led by the Spirit when it is merely obeying the ebb and flow of one’s own emotional states?
Sometimes, I see some saying you shouldn’t try to teach people in order to avoid some conflicts of opinion, and that is also reflected in the ministry as well. The ministry that puts people’s emotions above the command to teach that everything Jesus had taught is already a dead ministry, and a wrongheaded one for sure if it values the opinions of men above God’s.
Reflection from https://utmost.org/classic/what-is-a-missionary-classic/
모스트모던 시대의 모임
(序文: 요즘 학계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現代에 맞춰진 정치문화적 요구에 반영되는 재건주의적 가치관에 기반을 둔 것들이 많고 인간 역사 대대로 내려온 것들의 충분한 이해와 지속성의 필요성은 시야에서 없어진지는 근 70여년이 되고 있는 現時代精神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과거와 맥을 이루는 관점을 제시한다.) 여자의 조언을 따르거나 여성적 인도자는 최대한 의견의 충돌을 줄이는 방향을 잡는다. 여성적인 성격은 근본적으로 감정적 충돌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집단 나르시시즘의 요소가 강해서 상대를 타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벽 밖에서 만들어지는 그 어떤한 견해는 벽안의 가족들과만 화평하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우물과 같은 조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은 그릇이 작은 것과 비교되어 왔던 것이다. 인도자의 역활은 기본적으로 의견의 충돌을 회피하는게 아니고 충분히 양면의 의견을 이해하고 가운데서 만날 수 있게 돕는 역활이다. 자신이 그 대화의 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해야하며 기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충분히 열린 대화의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렇게까지 확고한 의견이라면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하는데 사람을 설득시키는 방법의 첫 단계는 먼저 충분히 이해하고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받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에 있다. 이 또한 쉽게 어떤 얕은 수단으로만 이해하고 실행한다면 인간적인 기본이 미숙한 사람이라고 봐야겠다. 교회라는 배경안에서는 여성적 인도자는 아주 간단하고 제일 강력한 회피 전략으로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면 천사 자신의 마음에 안들면 악마로 만들어 버리는 전략이 비일비재하니 교회가 계속 세속의 단체들보다 못한다 말을 듣는 것이다. 남성적인 인도자는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되 상대가 자신의 의견이 존중을 받았다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 부족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상당히 높은 이상을 품고 있다하더라도 제일 먼저 더 높이 계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첫 단계이고 그 다음은 사람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에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확고한데 인간의 다른 의견과 생각을 두려워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개인적인 의견이 옳다 생각되면 그 만큼 상대방의 다른 의견을 통해 더 완성도 있는 의견으로 다져지거나 바뀌어지거나 확인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충분한 검토와 생각이 뒷밭침되는 의견은 강하게 내세워야 할 책임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충돌이 있으면 잘 이겨나가면 된다. 옹알이도 충분히 들어주다보면 이해하는 경지까지 갈 수 있다.
어느 회의라든지 모임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 극적인 표현은 하지 않는다.
- 상대방 생각을 다 아는 것 처럼 말하지 않는다.
-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 “나” 아니면 “제 생각으로는” 라는 단어를 더 많이쓰고 상대방의 헛점이나 잘못된 것은 가능한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구분화 시켜서 확실하고 자세히 지적한다.
- 용건이 있으면 종합적으로 말하지 말고 상세히 말한다.
- 참을성있게 상대가 무엇을 길게 말해도 끝까지 듣고 더 듣고 싶다는 인상을 남겨주어야 한다.
- 어떠한 불평이라도 방어적 태세를 취하지 않고 들어준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해 주는 최소한의 방법이고 내용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포스트모던 가치관에서는 개인의 감정이 어떤 사실의 절대성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잘못된 가치관이지만 미성숙한 사람이 더 많아진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모임진행법으로 생각된다.
- 모임을 인도하거나 사회를 본다면 중립을 유지하고 안건을 내지 않고 오로지 사회와 중재에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회자의 말은 자동으로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안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동일한 무게의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평한 제의라는 감정과 의견이 고체되기 쉬워지고 분열이 나온 안건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만은 더 증가할 수 밖에 없어진다.
TIL 2023-10-09
世는 숫자 30을 의미하는 卅에 가로 휙 둘을 더하면 세대를 의미하는 세 자가 된다. 고대에서도 대략 30이면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いくつかの日本食堂では週末だけ割引メニューがある。 週末と平日の区分をしっかり知って食堂に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
TIL 2023-10-08
The presider of the meeting should not be impatient, and better to restrict to only to moderate so that the attendees could be attentive to the speaker, who should be the only one speaking.
Oscar Wilde’s most famous works were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1), Lady Windermere’s Fan (1892) and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1895).
People typically have strong affinity for the institutional names that have passed down regardless of literal, semantic significance, rationale, and relevance.
TIL 2023-10-07
Mohamed Ghassen Nouira of Tunisia restored the ancient purple from oysters. It used to be called Tyrian Purple after the city of Tyre.
Japanese, Momotaro denims is handmade from real indigo and usually costs over $300 as of 2023. https://momotaro-jeans.com/
Damascus steel can made by folding steel over 1,500 or 3,000 times. Real ones cost at least $1,000. Cheaper counterfeits imprint on a regular steel and they can cost under $100.
Eggs has a highest quality protein and provides all kinds of nutrients that are missing in other friends.
37년만에 아시안게임에서 양궁 임시현 선수 3관왕
13년만에 역도 금메달, 박혜정, 인상 125kg, 용상 169kg, 합계 294kg
In the old days, sailors used to get scurvies due to the lack of vitamin C in their diets.
(Note: TIL = Today I Learned)
멋있게 꾸며온 포장
많은 역경을 이겨내어 왔다고 하는 이들의 말은 자신이 그렇게 비춰지고 싶어하는 포장일 뿐 그 속엔 진실이 아닌 것들로 득실거린다. 남에게 마치 훌륭한 사람인양 멋있는 사람인양 보이기위한 포장일뿐이다. 인생이란 바르게 살면 살수록 단순한 것이고 자신의 정욕(欲)을 따라 산 인생일수록 복잡한 인생으로 꼬이게 된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냥 인간이면 당연히 해야할 것을 한 것 뿐이라고 여기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한 사람은 꾸며낸 것을 말해주는데에 급급하다. 당연한 길을 걸은 사람과 자신의 잘못으로 아쉬움과 후회만 날리던 길을 걸은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인것이다. 긴 여정인데 자신의 잘못은 없고 다 누구 누구의 잘못으로 인생이 꼬였다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시초부터 진실하지 않을 확율이 크다. 소설에서나 피 터지는 전장속의 진정한 영웅이 있지 현실 세계에서의 진정한 영웅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꺼져가는 불 하나 지켜 나간 사람들 뿐이다.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튼 보든 말든 바른 길을 나간 사람들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누구나 있다. 그런 피해라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어 냈으리라 생각하고 당연한 자세로 극복해나간다. 그러나 거짓으로 포장되고 속이 비어있는 사람일수록 남에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풀어낸다. 포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에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부지런하다. 타인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굴곡을 겪었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그냥 소설 하나 들은 듯 들어주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길 밖에 없어보인다.
목숨을 다해도…
목숨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승리와 승리를 거둔 다윗 왕.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지만 그가 성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하였다. 그가 진정히 위대한 이유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대단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않고 벌거벗은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두리하나의 천기원 목사가 있다. 아시아의 쉰들러라고 불리며 목숨을 다해 천여명에 달하는 사람들, 특히 여인들과 여자아이들의 탈북을 도와준 인물이다. 그러나, 10여년전부터 이상한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성폭행으로 고소를 받고 고소를 한 탈북 여인의 오빠는 자살까지 한다. 당연히 천 목사는 목숨을 다해 부인해오고 있다.
여기 남서부 지역에 까지 탈북 여자 아이들을 대리고 와서 교회를 방문을 했었다. 식당에 가서 같이 점심을 했는데 상당히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등학생 즈음 되는 여자아이가 와서 목사님의 어깨를 마사지 해주더니 천 목사가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감싸 안아 주는 광경이었다. 내 딸아이였으면 당장 일어나 아이 손을 잡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고 이상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세 딸의 아버지로 나의 딸이 그 어떤 목사라 하는 사람이 저렇게 대한다면… 이라는 생각에 나는 상당히 불쾌해서 인터넷에서 조금 찾아봤다. 전에 성폭행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후 교회 두 대표 장로님들에게도 알려드렸다. 최소한 나의 교회에서는 직접적으로 도와 주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20여년 전도사들과 목사들 사이에 끼어 일하며 여러가지를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여자아이들을 대할 때는 악수조차 하지 않고 신체를 가까이서 만지지도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사역을 담당해 왔었다. 어떻게 그 탈북 아이들을 보호할 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담임 목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목사라고 하고 나중엔 심지어 원래 사람들을 잘 만지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며 추호도 성적인 의도가 없다고 말하는데 또 순진한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목사에다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변호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에 또 뉴스에 올랐다. 이번엔 그냥 작은 신문이 아니라 KBS 9시 뉴스. 아이들의 증언가 주변의 여러사람들의 증언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담임 목사는 자신이 직접 천 목사와 통화해 그런게 아니며 천 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고 있다.
그렇게 먼 옛날이 아닌 90년까지만 해도 미국 경찰들 중에 Blue Wall of Silence 란 것이 있다. 경찰들끼리는 아무리 무엇으로 잘못해도 모른 체 해주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법원에서 까지도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파랑색의 침묵의 벽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 목사들 사이에도 이런 것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