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Self-serving blindspots

Every organization reflects the values and the beliefs of its leader and constituents. And it’s not difficult to observe a gamut of characteristics that flow out of how the organization is run. The best perspective can be gained from inside, of course, regardless how it is viewed from outside. The net effect of an organization and the glow around it is usually not reflected internally. Depending on the purpose of an organization, the externality of net effect of the organization may be of the greater importance than the experience of what is going on internally. However, all organizations concern themselves heavily with the internal experiences of its constituents, especially those with authority and power.

The ideal, Platonic image of a philosopher king may strike as quaint for many, but the health of an organization often depends on it. It seems that the human tendency, unbeknownst to himself, is to set up a multidimensional framework of environment that best serves himself.  Acton’s dictum reminds us that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and we see the effects ubiquitously. With authority, power, and influence is typically taken for granted in a handed-down framework, and constituents become somewhat of a captive audience with assumed roles. In many small scale, we see this playing out in cult groups, and there’s only a paper-thin difference when compared to socially accepted organizations. With the right elemental factors, the organization can sustain itself for a long period of time while remaining remarkably ineffective. In this reality, we often trust our leaders, mere human being, with a great risk.  Integrity is often cited, but not practiced.  Integrity comes with a heavy responsibility that should test the limits of internal conflicts we experience as human beings, but not many individuals are built to withstand such awesome struggle without a sense of abandonment of self.  Without such tension at a highly private mental and spiritual space of leaders, we often get cheap imitations that behind a veil of public image turn out to be self-serving individuals to thrive. This is a sad reality of society we live in, and even though we have few examples in history such as Byzantine empire that groomed royal retainers, the modern society has completely abandoned such ideals to allow untamed, and uncultivated anima in the laissez-faire genius of Enlightenment.

安時: 2018年 2月 1日 (木)

2/1/2018 (목)
행 5:12-26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되지만 시기하던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오게 하고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사도들은 순종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그 들을 잡을려고 하지만 따르는 무리가 많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사도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고 예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원래 사두개파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에 큰 비중을 두어 성전의 제사장의 역활을 신앙의 중점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라 정신적으로 성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더 말씀에 충실할려고 했던 이들이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정 반대편에 앉아 심지어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죽였던 사람들. 그들은 복음의 사자들을 옥에 가두고 기회가 있었으면 죽이기까지 했을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알아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바르고 진실된 것을 보이실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다.  영어로는 teachability.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고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말씀에 대한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배우고 순종의 길을 걷기를 아에 생각조차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알고 거기서 그치는 것도 문제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담대함은 더 곤란한 입장이다. 그냥 책을 읽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마음의 문을 닫아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면 나와 자신이 편히 살고 있는데 왜 와서 방해하는 냐란 태도를 취할 사람들이다. 이런 것을  두고 강퍅하다라고 한어로 표현한다. 강퍅한 마음. 하나님이 사도들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동시에 이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나의 마음은 강퍅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진리가 나를 변화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주여, 너무나도 쉽게 강퍅하게 변하는 마음의 주의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여주시고 뜨겁게 하여 나의 토기장이 되시는 주께서 나를 주가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 될 수 있게 빚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온도의 차이

100여년의 저온도를 기록했다던 한국의 겨울. 가만히 있어도 맨살이 시릴만큼 추웠나 보다. 그러나 여기는 눈 한번 오지 않고 도리어 가을의 선선한 느낌이나서 아직 입동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밤의 온도가 보통때 보다 낮아 춥다란 느낌이 든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방에 있는 휴대용 난방기를 틀어서 따스함 가운데 포근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남쪽에 있는 직역이라서 그런지 대채적으로 아직까지는 따뜻하다. 추우면 체온의 유지를 위해 더 두꺼운 옷을 끼워입고 따뜻하면 그럴 필요없이 편하고 얇은 옷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것이다.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마치 휴대용 난방기처럼 주위 환경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 바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의 기질의 차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40여년 삶을 살면서 경험했던 독특히 따뜻했던 사람들이 있다. 기질의 열이 아니었다. 성격도 아니었다. 시카고에 있는 무디 신학교를 다닐 때 알고 지냈던 이 전도사님이란 사람이 그 독특했던 사람이다.
 
나보다는 몇 살 위셨지만 항상 예절을 지켜 대해 주셨고 만나면 항상 이상하게 과분한것 같은데 과하지 않는 기쁨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학교에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언급만 나와도 환하게 미소를 지게하는 인물이었다. 이 전도사님을 만나면 일단 상대를 진정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 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 만나면 마치 오랬동안 멀리 지내다가 다시 만난 친구처럼 그는 깊은 친근감으로 접근해 가까이 와서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실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는 이런 태도는 당연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儒敎的으로 엄격한 어른들의 무언이 가득했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생소하다 못해 과잉반응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전도사님은 이런 사람을 향한 태도를 매일 뜨는 태양처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나는 무척 궁금했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현실에서 만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와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했었다. 그 온기의 비밀은 다름아닌 은혜앞의 겸손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집에 오면 반겨주는 강아지를 보라. 주인의 과거를 따지거나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집개는 집사람을 마치 재일 사랑하는 사람처럼 반겨준다. 집에 올때 그렇게 반김을 받을 때 얼마나 기쁘고 기분이 좋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이 타인을 집개처럼 반겨주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전도사님은 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라고 일부러 그렇게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사람들을 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 성격은 내성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자신을 개 만큼 낮추었던 이 전도사님이었다. 그렇다. 버려진 개보다도 못한 우리를 구원해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인데 아무데다가도 쓸대없고 구차한 인간적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그리스도의 촛대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찬 바람 쌩쌩끌어오는 냉장고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 전도사님의 따스함은 분명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 같아 더 그립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죄인 중에 괴수

현대인들은 번뇌가 많다. 관계에서나 자신이 무엇이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이다. 여기서 해방은 쉽다. 자신이 최악이며 자신 보다 더 상태가 나쁜이가 없다고 알고 인정하면 된다. 儒家의 中樞되는 가르침은 인간성의 회복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아실현을 위한 자아과민증에 취약하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거룩함에만 집중하면 비슷한 병에 빠지는 것 같다. 무모하게 십자가 보혈의 은혜앞에 자신을 맡겨 버릴 수 있어야 해방된다. 자신은 없어지고 십자가 앞에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하고 순수한 경배를 드리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b

비겁한 和의 문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라는 말은 성경에서도 나온다 (롬 12:18). 특히 같은 교인끼리는 더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는 매우 많이 나온다. 화목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미덕이다. 그러나 화목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은 아니다. 진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예수를 잘못할 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아픔을 겪으면서 까지도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대 화목을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특히 삶이 더 풍요로와진 요즈음엔 더 그렇다. 진리는 뒷 자석에 앉혔다.

예수가 어떻게 和목하게 돈 바꾸는 이들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덕과 인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푸덤직한 웃음을 얼굴에 띄고 털털한 마음으로 “다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며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측은히 여기실꺼야” 하며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며 나름 고난위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사장들과 협조와 돈 바꾸는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뤄내었을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和 문화적으로 그린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되풀이 돼는 고전부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들리면서 상대의 기분만을 위해 상황을 모면하는 비겁한 문화이다. 그래서 대화 방법도 윗 사람의 기분을 위한 것으로 상단한 발전이 돼어 있고 일본 같이 和를 신격화 시키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공공 장소에서 지켜본적이 있는가? 돌팔매질 안받으면 다행이다. 너 혼자만의 생각을 왜 남에게 억지로 파느냐 부터 시작해서 비논리적인 언론의 자유까지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앞에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와서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지킬 필요까지 있냐? 도리어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 등까지 예수라는 이름에 증오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 많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더 지혜롭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를 전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밟혀도 사람들끼리 화목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욕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리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런한 비겁한 문화 때문에 일제시대에서도 목숨이 아깝지 않았던 극소수의 예수쟁이들만 빼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다 일본 천황의 신전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예수 귀한 그 이름 이란 찬양을 한번이라도 불렀다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면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和를 도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타협할 수 있는 비겁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신앙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禍를 입게된다.

Pastor Shaan Sloan’s website

Pastor Shaan Sloan is a teaching pastor at Heritage Christian Fellowship church, which I had privilege of being a member for nearly 6 years before I joined a local Korean church. His website is http://heavenslight.org and it has a ton of Bible study materials that are easy to read and access.  It is highly recommended for anyone who is looking for an accessible material on the Bible.

安時 2017-10-05

C.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먼 조상 아담와 하와로 부터 죄를 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 성향이란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나의 삶의 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죄의 근본적인 성향이다.

예수님은 원죄를 물려받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셨다. 물려받은 것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렇게 살 지 않는 순간 부터는 우리는 심판에서 벋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A. XXV. 모두 평강을 원하지만 진정한 평강에 이루게 하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주를 기쁘게 하기에 전념을 다하는 것이 평강의 길이다.

골 1:9-14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하루게 되게 인도하여주소서. 오로지 주의 은혜속에서 주의 이름을 잊지 안으며 한 순간 한 순간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日語: だんしゃり (断捨離)

A recent word referring to the trending idea of minimal life.

Cutting off (断) the unnecessary, throw away (捨), and get out (離) of being attached to things. Started circa 2010. The actual words originated from Hinduism, specifically from practices of yoga.

불필요한 것을 끊고(断), 버리고(捨), 집착에서 벗어나는(離) 것을 지향하는 정리법[삶의 방식, 처세술]. (단사리, 단샤리)

요가의 행법인 단행(斷行), 사행(捨行), 이행(離行)이라는 사고방식을 응용한 것으로, 인생이나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볍고 쾌적한 삶을 살고자 함.

安時 2017-09-05

CWatch with me. 너희가 나와 함께 한 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Matt. 26:40)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만 익숙하지 우리가 주와 함께 하기에는 익숙치 않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러나, 항상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잠시 만이라도 함께 해 달라고 하시면 우리는 한 時도 못버티고 잠에 들어버린다. 주의 관점보다는 우리의 관점. 주와 같은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특별히 긴 시간의 인생을 소비한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不測한 주님.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믿음의 실행이다.

우리의 자연적 한계로서는 사도들과 같이 잠을 자고 주가 어떤 목적을 이루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께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실때는 우리는 그를 버리고 사도들과 같이 도망을 간다.  우리가 가진것으로 주님과 함께하기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다:

오직 聖靈이 너희에게 臨하시면 너희가 權能을 받고 … 내 證人이 되리라 (행 1:8)

한국어 인터넷문자 자료의 문제성

오래 전 수년동안 한/영 번역을 하면서 느낀 점을 글로 옮긴 적이 있다.  어떤면에서 일관성이 없어 불편함 점들을 요약해 쓴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즈음 인터넷에 있는 한국어 자료들을 조금 더 많이 대하면서 느끼는 점인데 문서 기록 구성 방식을 존중하지 않고 개인의 취향대로 기록을 하고 문서형태를 바꾼다는 것이다. 같은 전자식 형태이기때문에 비유한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워드 사용시 탭을 사용하지 않고 스페이스를 여러번 눌러서 들여 쓴 자리를 만든다거나 혹은 문서 여백을 조정해 바꾸기 보다는 그냥 줄 마다 엔터를 처서 오른 쪽 문서의 선을 맞춘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전자 문서 편집에 대한 무식이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인터넷에 너무나 많이 있다.  네이버나 다움또는 어떤 플랫폼에서 그런 것들을 부추켜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너무 많이 본다.  예를 들어 문장마다 끝에 엔터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옛 인쇄시대에 더 익숙했던 첫 줄 단락 여백을 만들어 주기 까지 한다. 내용과 그 내용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DTP (전자출판)에 익숙하신 분들은 이런 것을 잘 이해한다. 그리고 문서작성을 어느 정도 배우신 분들도 이런 것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전자 문서 제작시, 그것이 이메일이나 문서작성이든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해 본다.

  1. 여백을 만들때 스페이스는 스페이스 바(Space bar)로 만들지 말라.

    HTML도 문서처리시에도 스페이스는 완전 무시된다. 예를 들어 일부러 어떤 여백을 만들기 위해 스페이스를 바를 사용해 20칸을 만들었다 하자.  그것은 1칸으로 간주되어 버리며 웹상으로 볼때 19칸은 보이지도 않는다.과거의 편지 및 문서 형태에서 단락의 첫 줄에서 스페이스를 준다.  위에 언급했듯이 웹상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칸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이스보다 단락을 시작할때 엔터키를 두번 처서 두 줄로 만든다.

  2. 줄로 여백을 만들라.

    과거의 편지 및 문서 형태에서 단락의 첫 줄에서 스페이스를 준다.  위에 언급했듯이 웹상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칸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이스보다 단락을 시작할때 엔터키를 두번 처서 두 줄로 만든다. 줄로 여백을 주는 것이 눈에도 더 편하다.

    제삼의 눈은 또한 인도의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바의 눈(The eye of Shiva)과
동일시된다 인도의 시바신은 호루스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이다
뉴에이저들은 이 시바신의 눈이 인간의 이마에 있다고 주장한다.
    시바신의 눈이 있는 지점은 차크라(뉴에이저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있는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 가운데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에 해당된다.
뉴에이저들은 아즈나 차크라는 왕관 차크라라고 하는데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뇌의 상부와 오른쪽 눈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이 차크라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신과의 일체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이보다는 …

제삼의 눈은 또한 인도의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바의 눈(The eye of Shiva)과
동일시된다 인도의 시바신은 호루스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이다
뉴에이저들은 이 시바신의 눈이 인간의 이마에 있다고 주장한다.

시바신의 눈이 있는 지점은 차크라(뉴에이저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있는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 가운데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에 해당된다.
뉴에이저들은 아즈나 차크라는 왕관 차크라라고 하는데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뇌의 상부와 오른쪽 눈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이 차크라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신과의 일체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1. Enter 를 처서 문단을 자르지 말라.
  2. 밑에 출처를 확실히 하고, 출처 날짜도 포함하라.

    학계에서 논문이나 글을 쓸때는 인터넷 출처 날짜는 기본이다.  1998년 출처한 인터넷 문서가 2017년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터넷 자료를 자동 저장하는 전자창고에서 날짜를 알면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링크만으로는 다시 찾기가 어렵다.

  3. 예시를 포함할때는 환경의 대한 내용도 포함하라.

    어떤 컴퓨터 환경에서 어떤 플렛폼으로 어떤 콤파일러를 썼는 지 아무런 언급없이 예시만 올리는 사람이 많다.  JavaScript 과 같이 표준화된 고급언어를 사용시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겠지만 JavaScript 도 더 깊이 들어가면 V8, Spidermonkey, Chakra 와 다른 엔진의 syntax 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安時 2017-8-30

요 8:42-51

주님은 自稱(자칭)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는 顯顯(현현)이라고 하신다. 主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말씀하신하고 계신다. (1) 아비 마귀에게 났음 (2)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함 (3) 마귀의 거짓을 믿고 삶

(1) 났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귀의 것을 숭상하고 받들어 올려 살고 있다는 것.  마귀의 사상과 이상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고 사는 삶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립되는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2)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인간의 썩은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오며 마귀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오게하여 지옥으로 고피를 달고 끌고간다.

(3) 진리를 듣지도 알지도 믿지도 못하게 하는 재일 큰 이유는 마귀의 거짓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C.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19-20

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한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세상과 별반 다른 것 없이 어떤 큰 업을 남기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그래서, 빌리 그래햄같이 하나님께서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을 우상화의 수준으로 높이 취급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구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곳에 두 신것이다. 자신의 서비스에 비중을 두고 항소할려는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큰 업을 남길려는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큰 업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런 의지가 배경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른 것도 어떤 큰 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서비스 중심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제일 큰 실패자인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가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지 성도의 서비스에 있지 않다. 상업주의 능력주의 학벌주의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마귀의 자식들을 경계하라.
A. XXIII. 마음에 큰 평화를 주는 4가지.
(1) 자신의 의지를 펼치기 보다는 다른 이의 의지를 행하기에 힘쓰라.
(2) 항상 많은 것보다 더 작게가지기를 추구하라.
(3) 낮은 곳을 찾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아래에 있어라.
(4)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항상 기도하라.
마음에 번뇌가 많아지고 걱정과 근심이 많아질때는 이 4가지 중 하나라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반대되는 것을 살펴보자.
(1)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모두 올인하라.
(2) 자신의 것을 축척하고 더 많은 것을 쌓아라.
(3) 경쟁에서 지지않기 위해 남보다 자기개발을 통해 앞서야하고 위에 있어야 한다.
(4)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 주야로 힘써라.
세상의 만연한 가르침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도에 멀어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것들을 따르면서 현대인들은 항상 왜 자신의 내면에 불안이 가득차 있는지 모르고 있다.
주님, 욕구불만으로 가득찬 나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인간적인 정욕을 주앞에 내려놓게 하시고 오로지 주의 뜻을 이루는 주의 그릇이 되게 하시고 번뇌로 힘든 이 마음을 주의 평강으로 채워주소서.

People aren’t changing?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가?

답답하다.  주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면 그러나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라는 것.

율곡의 자경문(自警文) 中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즉 한 집안 사람들이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It’s stifling sometimes to see how people are so resistant to change towards better, but the reason for that is none other than myself.

Here’s a line from Yi I‘s Self-Reflection (自警文)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The reason that my family member does not change for better is only because there is a lack in my sincerity of effort.

There is no other reason for it. It’s because of me.

安時 2017-8-24

요 4:43-5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신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만왕의 왕에게 우리또한 얼마나 조건을 걸고 믿고 있는가? 구약의 Gideon 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처럼 우리또한 어떤것에 대한 조건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해주시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관계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감히 누가 설 수 있는가? 사실 죄로 인해 항상 악한 생각만 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죽음뿐이다. 댐같이 나의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임제할 자리도 없는 것이 인간아닌가? 지렁이보다 못한 인간을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사 십자가위에 몸을 던지셨던 말인가?

신하또한 그런 조건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접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측은히 여기셔서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아버지. 주여, 주께서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를 바라며 살게 하여주소서.

 

C. 아들이 빵을 달라고 물으면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겠느냐? 마7.9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소홀하고 아버지를 예의없이 대하는데 어찌 감히 아버지께서 마구 무엇을 달라고 짜증을 내면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관계 상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평화를 달라고 안정을 달라고 기도의 응답만을 요구하고 있다. 타종교의 미신을 믿으며 날마다 복을 위해 기도하는 이교도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인가? 다른이에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간구하고, 다른이에게 친절과 자비를 배풀지 않았는데 자비를 간구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를 만년 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인가? 종이위에 입으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神 앞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 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어떤 감정만의 표현이 아니고 무슨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기도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 좋지 않은 가치관으로 생긴 빚, 그리고 내 맘대로 성질낸것들. 교회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차려입고 영적으로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 것처럼 아니면 잘 내외로 갖춰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깊숙히 다 보고 계신다.

A. XXII. 자신의 내적 빈곤함과 얼마나 자신이 하찬은 사람인지 깊이 느낄 수록 평안을 찾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한 것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이 세상에서 낮은 자에게 눈을 돌리시며 그 들을 올리시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낮추신다. 심지어 동양의 역사에서도 의와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던 자들의 이름들이 기억되고 있으며 존귀함을 받고 있지 당 시대 부와 특권을 누리며 악을 행했던 자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지는 않는다. 세상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 다르겠는가? 의라는 개념자체위에 계시며 온전하며 완벽한 의를 표출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의만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보다 더 존귀한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과분할 정도로의 영광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왕중의 왕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왕을 위해 목숨을 다한 과거의 사신들은 불온전한 인간 왕들을 위해 목숨을 다했기에 왕이 불의한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신실했던 사신이라 한 들 왕의 의를 넘지 못한 것. 우리는 완벽한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 보다 더 큰 평강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는 왕이다. 그 섬긴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지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은혜와 기쁨이 넘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의 의와 사랑과 영광이 먼저가 되게 하소서. 주께서 주시는 그 어떤 축복보다 주만이 나의 평강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기쁨이 되시고 주만이 나의 영광이시나이다.

安時 2017-8-23

Chambers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Matt. 6:6

기도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기도하라고 한다. 기도는 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의식적으로 해야하는 것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혼자 기도할 때 잡념이 문제이다. 儒家의 율곡 이이도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가르침에서도 잡념이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때가 아닌 생각을 잡념이라고 가르쳤다. 잡념을 이기는 방법은 잡념을 싫어하게 되는 마음까지도 잡념이라 간주되니 가볍게 여기고 그냥 지나가야 한다는 것. 새가 날라와 머리위에 똥을 싸고 둥지를 지게 하지 않으면 된다. 의외로 쉽지만 의식적으로 나의 생각을 다스리지 않으면 잡초처럼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식으로 discipline of the mind, 아니면 정신적 훈련이란 매일 같이 반복해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그 만큼 우리의 내부를 자극시키는 것들이 많으므로 이런 훈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필수인 것이다.

장농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위에 계시다. 비밀리 계시는 곳의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나의 감정이 나를 조종하지 못하게 내적 잡음에서로 부터도 문을 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임제의 장소, 지성소이다. 예수님은 눈을 뜨자마자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제속에 거하시며 기도하셨다. 이런 기도 생활이 유지되고 하나님의 임제속에 거하는 생활이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A’Kempis, XXI

儒家의 大學의 세가지의 가르침 중 한가지가 인품을 갖춰 그 위에 쉼을 찾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서의 아무리 좋아보여도 내가 만든 허상위에 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고 온전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들보다 주를 갈망하나이다. 온전하시고 최고가 되시는 주여. 주가 아닌 그 어떤 것이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나이다.

주께서 은혜로 임제하시기 전까지는 나는 그 어떤 평안도 찾지 않을 것이고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나이다.

이 地上의 최고의 것도 하나님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나의 입, 영혼, 그리고 온 만물이 다 주를 찬양하리이다.

요 3:9-21

  1.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4.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7.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12.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3.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로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영접하는 자이다. 진리를 멀리하게 하는 것은 악이다.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악의 결과이며, 믿음으로 영접치 못하게 하는 것은 지옥의 문턱에 온것이다.

安時 2017-8-22

Chambers. “I indeed baptize you with water…but He…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Ghost and fire.”  Matt 3:11

나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 나의 것이 나의 자아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내면에서 역사하지 않으신다.  나의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완전히 양보 했을때 그 순간부터 역사하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

A’Kempis.

…fondness for evil pleasures overcometh the mind of him who is addicted to the world; and he esteemeth it a delight to be under thorns, because he hath not seen or tasted the sweetness of God, and the inward pleasantness of virtue.

…they who perfectly despise the world, and study to live to God under holy discipline, these are not ignorant of the divine sweetness promised to those who truly forsake the world; they also very clearly see how grievously the world is mistaken, and how it is in many ways deceived.

세상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대립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세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것과 대립하게 되고 하나님의 것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대립하게 된다. 마음을 다지고 하나님의 것을 담대히 받고 행하라.

安時 2017-8-21

Chambers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We can be taken up with the issue of volition, or on the overt emphasis of what we do with our time, talent, and resources. Being poor in spirit is not something that is easily noticed, and yet the seemingly passive state of being–in need–is the condition for God’s blessings.

We’re way too armed with ourselves, for our future.  We need to lay down our arms.  우리는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해 너무나 많은 무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무기들을 내려놔야 한다.

A’Kempis

인간은 자신의 고통이 크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의 고통이 더가깝고 아프고 重한 고통이고 지금과 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는 남이 더 큰 고통을 느끼거나 말건 상관이 없다. 타인의 고통의 소리에까지 진저리를 친다. 남의 고통의 소리는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오디오일뿐.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다른이의 고통을 초래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의식으로 변했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나에게 타당치 않은 것으로 고소를 했거나 거짓 증거를 하는 것 같으면 도저히 참지를 못한다.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 사람에게 당하고는 절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불리한 상황속에서 남자답게 담대히 타인에게 더 미련한 사람에게 밟힐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 아니었는가.  忍으로 부름을 받은자 아닌가 (고전13).  우리의 싸움은 우리를 직접 괴롭게 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아니고 자신의 고통만을 보게 하고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생각조차하게 하지 않는 고체된 마음 상태이다.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 이기주의, 극적인 나르시시즘의 표출일 뿐이다. 이런 싸움없이 어찌 승리가 있겠는가? 이런 노력없이 어찌 심적 평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神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고 밟히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영혼을 위한 高度의 영양분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남자답게 싸워이겨 나가라.

List of One Thousand Characters completed (천자문, 千字文 수록 끝)

천자문 한자 풀이와 설명 모집이 이제 끝났다.  1년 넘게 조금씩 해오다가 절반 이상을 다음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한꺼번에 다 끝내 버렸다.  링크는 여기에.

I’ve completed the list of One Thousand Characters including all of the available, sound explanations in Korean.  I’m not sure how much of English translations I will be able to provide, but I’m thinking of completing it very slowly.  I have been completing little bit at a time, and then I’ve gone ahead and finished more than half of it before the start of a class next week.  You can find the listing here.

Contrasting foundations for morality (대조되는 도덕의 정의)

— English

In the West, the classical philosophers, post-Christianity, thought of morality as a core part of virtue in reflection of the belief of imago dei.  However, in the East Asia, the morality is now more often seen as a part of statecraft, a code only intended to make people more obedient to their rulers. This Machiavellian juxtaposition of Confucian ideals has been tacitly accepted by the populace, and I think that i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the social changes have been so swift. Without a full appreciation for Confucianism as a theory, ignorant progressives have done much to throw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 Social changes are often hinged by a philosophical, and referential, position that society holds to, and the fact that Asian countries seem to have been following the West, almost mindlessly, without due consideration of traditional moral implications (but accommodating to Western influences under the banner of progress) is evidenced by the fact that traditional views have been heavily labeled as being backward and generally antithetical to any progress in all aspects of life. This was sparked by Meiji Reformation in Japan, which happened among a people-group living in an island long oppressed by self-doubt about its own identity and self-worth, always compared against the continental culture.

As seen in Korea, it doesn’t help that most of classical literature were written in hanja and the disciplines of philosophy or classical literature is simply marginalized as being “non-productive” discipline. This kind of trend is deeply troubling, given the fact that young people are increasingly adopting materialistic view of life, whilst studying hard in philosophical disciplines, which was a harsh experience for them when they had to memorize in a rote fashion to pass a test.  Knowledge without seeing no relevance to their lives has led to resentment towards the very knowledge that can allow them genuine change and progress towards the future.

— 한글

기독교 이후의 서양의 고전 철학자들은 도덕을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중요한 미덕으로 생각왔어으나 동양에서는 도덕이 치국책의 용도로 사람들을 더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하나의 규범으로만 간주되어가고 있다.  이런 식의 마키아벨리 풍으로 유교적 이념이 암묵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고, 이로 인해 사회적 변화가 상당히 빨리 일어난 것 같다.  유교를 하나의 이론으로 평가하는 것 보다 무지의 진보주의자들은 아기를 아기 씻는 물과 함께 버린을 일을 주도해왔다. 사회적 변화는 사회가 지니고있는 철학적, 참고적 위치를 반영해 일어나게 된다.  아시아 많은 국가들이 자신의 전통적 관점의 도적적 결과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발전이란 이름아래 서양의 모든것을 수용하며) 얼마나 전통적 관점이 뒤떨어지며 일반적으로 모든 삶의 면에서 발전과 상반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진이 점화시킨 것이다. 오랫동안 자기회의와 대륙풍의와 대조되는 자신들의 열등감에 억업받았던 자들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나 고전문학이나 철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다라 하여 단순하게 하찮은 분야로 인식되어 버렸다. 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물질주의적 관점의 삶을 반영할때 이러한 추세는 매우 심각한 추세이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철학이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외워두는 지식이었지 도구이었을 뿐이었다. 삶과 아무런 연결이 없이 습득되는 지식은 미래를 위한 진정한 변화와 발전을 줄 수 있는 지식에 대해 분노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Issues with South Korea, from investor’s point of view (투자자가 본 한국의 문제들)

(한국어는 밑에, Korean translation available in the bottom)

— English

There were some memorable points that Jim Rogers, a well-known American investor, has pointed out about Korea, and why there would be no future for it if it continues this way. (Sub-points are my personal reflections.)

  • 3 companies hold the 50% of the national GDP.
    • In the early days of post-war modernization, the political leaders allowed a full government support of only a handful companies, and those companies have managed to maintain a tight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and monopolize on the Korean economy.
  • Too many young people are only seeking to get a government job. There’s future only if young people are willing to challenge the status quo with new ideas.
    • Two to three generations of people have experienced how unstable the market has been, so Korean people in general have been tamed to believe that the government job is the only stable job for their children to have.
  • The birthrate is too low and it will have a significant effect in the labor market.

 

— 한국어

유명한 미국의 투자자  짐 로저스가 최근에 한국의 문제들에 대해 몇 가지를 언급했고 계속 유지되면 미래가 없다고 했다. (밑에 있는 포인트들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3개의 회사가 나라의 GDP 의 50%를 가지고 있다.
    • 한국전쟁이후 정치적 지도자들은 몇몇 되지 않는 회사에게 전적인 정부지원을 허락하였고 그 회사들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경제를 독점할 수 있었다.
  • 너무나 많은 청년들이 안정적인 공무원직만을 추구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을 하는 곳에만 미래가 있다.
    • 2 ~ 3 세대의 사람들이 시장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경험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자녀들이 가질 수있는 유일한 안정적인 일이라고 믿고있다.
  • 출생률이 너무 낮아 미래 노동률에 큰 타격이 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두보의 시에서 나온 구절이다. 원래는 장자가 친구 혜시의 장서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요즘식으로 해석해보면 ‘남아’는 장자 자신을 말한 것이니 꼭 ‘남자’라는 의미보다 그냥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고, 다섯 수레의 책이라 함은 당시 책이 죽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다섯 수레’ 개념 보다는 그 시대 거의 모든 책의 양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양으로 꼭 환산해 본다면 대략 3천 권 정도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라는 말을 ‘사람이 태어나 죽기 전에 3천 권의 책은 읽어야 한다’ 쯤으로 해석해도 될 듯하다.
‘문사철 600’이라는 말도 있다. ‘문사철 600’은 문학 책 300권, 역사 책 200권, 철학 책 100권을 의미한다. 극작가이자 역사소설가인 신봉승 작가는 제대로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문사철 600’을 30대에 마쳐야 하며 이것이 힘들다면 일생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마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30대까지 다독을 통해 세상사는 이치를 깨우치고 있어야 함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11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월평균 독서량은 1권이 안 되는 0.8권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 6.6권, 일본 6.1권, 중국 2.6권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지 말해주는 지표다. 월평균 독서량이 1권도 안 되는 0.8권이라는 숫자는 한류를 얘기하고 문화선진국을 꿈꾼다는 나라로서 부끄러운 숫자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이니, IT 발달에 의한 현상이니 하면서 독서하지 않는 이유를 대지만 변명치고는 궁색하다. 물론 통계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자료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에서 불과 60여 년 만에 경제대국으로의 놀라운 성장에 세계가 박수를 보내지만 책을 읽지 않는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직장인들의 평균독서량도 연 15권 정도라고 하니 월평균으로 따지면 1.25권으로 2권이 안 된다. 다른 OECD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제대로 된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보가 ‘남아수독오거서’를 통해 강조했듯이 평생 3천 권의 책을 읽어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문사철 600’은 40대 이전에 마스터하고 만일 지금 40대인데도 넘지 못하였다면 향후 10년 안에 반드시 ‘문사철 600’을 마스터 해 볼 것을 권한다. 책을 많이 읽어 제대로 된 지식인이 많아 져야 사회의 수준이 올라가고 국가의 수준도 올라간다. 정치인들은 말로만 일류국가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독서량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의 대안을 내놓는 공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도 군포시청의 독서 전담부서인 ‘책 읽는 군포실’ 운영은 지방 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우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자치단체장 한 사람의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독서의 힘은 흔히 모죽이라는 대나무에 비교하곤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자생하는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난 후 죽순이 나오는 것 말고는 5년 동안은 아무 변화가 없다고 한다. 5년째 되는 해 갑자기 자라기 시작하여 어떤 것은 하루 70센티씩 자라 거의 30미터까지 자란다. 그러니까 모죽은 5년 동안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땅속에서 넓게 뿌리를 뻗어 양분을 흡수하고 도약을 준비한 것이다. 독서를 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한 두 권 읽었다고 바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죽의 세월처럼 일정 정도 지식의 양이 찰 때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죽의 세월을 견디고 도약하는 시점이 바로 3천 권의 독서다. 마치 물이 99도까지는 끓지 않다가 임계점인 100도를 넘으면 끓어서 기체가 될 수 있듯이 독서를 통한 깨달음의 임계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3천 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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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한 3천 권의 기준은 그냥 한 말이 아니다. 실제 이런 기준으로 책을 통해 이치를 깨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다독가들의 경험담에 기초한 것이다. 목사였던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소장은 이혼 후 나락에 떨어졌다.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 도서관에서 온 종일 책 읽기였다. 그는 2년 동안 매일 도서관에서 무려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다. 그 후 포장마차를 시작해 종자돈을 벌어 민들레영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 이지성 작가는 2천권의 책을 읽고서야 뭔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트였다고 말한다. 일본 IT업계의 신화가 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6살에 간염으로 3년 동안 입원하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읽기 시작한 책이 3년 동안 4천 권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그 3년 동안의 독서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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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 설립자 신창제 회장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책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책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게 해준다. 책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준다. 미래가 불안한 그대여 책을 믿어라. 책을 읽어라. 독서가 불안한 미래에 답을 줄 것이며, 독서가 그대의 끝나지 않은 꿈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하여도 잠을 거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말해도 식사를 거르는 사람은 없다. 독서를 잠을 자듯이 생각해 보자. 독서를 식사 하듯이 해야 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3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몇 권을 읽었는가? ‘문사철 600’ 30대에 마스터해야 한다는데, 그대는 지금 어디까지 도달하였는가? 지금 당장 근처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가자. 3천 권이라는 숫자는 평생 이루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이다. 1년에 100권씩 10년을 읽어야 1천 권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3천 권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것을 감안하여 누구나 50살이 되기 전에 ‘문사철 600’은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00권이라는 책도 1년에 50권씩 12년을 읽어야 하는 숫자이다. 지금 당장 100권 읽기에 도전을 시작한다면 50살이 되기 전에 문사철 600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한 번쯤 1년 100권을 달성해보면 책 읽기에 눈이 트인다. 책 읽기에 눈이 트이게 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근 20여 년을 자녀교육 컨설턴트로 살아왔다. 교육 현장에서 누구보다 독서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였고, 독서를 통해 아이들이 얼마나 바뀌는지 지켜보았다. 나는 신이 인류에게 준 가장 보배로운 선물은 언어 문자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책이 그 신의 선물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nbh1&logNo=220646783779

귀성 (歸省)

연어나 홍어 같은 어류는 알을 낳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간다.

온 힘을 다하여 온 몸이 부딪쳐 만신창이가 되가면서 귀성한다.

본향의 자리에서 죽어 새로 부활하는 고기.

본향을 잊고 물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물을 앞서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현시대의 우리의 모습이다.

저 고향의 냄새를 맡고 돌아가자, 우리.

한국어: 정경유착

2017/2/17 KBS News

“한국의 정경유착을 끊을 중요한 시기”

政經癒着
政 정사 정/칠 정
經 지날 경/글 경
癒 병 나을 유
着 붙을 착, 나타날 저

기업가(企業家)는 정치인(政治人)에게 정치(政治) 자금(資金)을 제공(提供)하고 정치인(政治人)은 반대(反對) 급부(給付)로 기업가(企業家)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인(政治人)과 기업가(企業家) 사이의 부도덕(不道德)한 밀착(密着) 관계(關係

한국어: 지양, 추경

출처: 2017년 1월 17일 뉴스

반기문 왈: “죽기살기식으로 정권만을 잡겠다는 행태는 지양돼야한다”

止揚 (지양) – reject [for the sake of improving]

①더 높은 단계(段階)로 오르기 위(爲)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②어떤 사물(事物)에 관(關)한 모순이나 대립(對立)을 부정(否定)하면서 도리어 한층 더 높은 단계(段階)에서 이것을 긍정(肯定)하여 살려 가는 일

 

출처: 2017년 1월 11일 뉴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로 추경 편성이 급류를 타고 있다”

追更 (추경) => 追加更正豫算의 약자 – supplementary budget

예산(豫算) 작성(作成) 후(後)에 생긴 사유(事由)로 해서 기정 예산(豫算) 경비(經費)에 부족(不足)이 생겼을 경우(境遇), 이에 추가(追加)하여 작성(作成)된 예산(豫算)

20 Rules for a Knight and comparative notes from Bushido (Part 1/2)

Recently, Shane posted a recovered letter by Sir Thomas Lemuel Hawkes of Cornwall (c.a. late 15th century) regarding 20 rules for a knight, which was written to his children.  I found that in essence the virtues outlined here coincide with classical virtues of Confucianism, which the Japanese bushido (code of warriors) had adopted.  Here’s a quick association and notes on each of the rules from Shane’s original post.  This is part 1 of 2.

  1. Solitude
    • “Create time alone with yourself. When seeking the wisdom and clarity of your own mind, silence is a helpful tool. The voice of our spirit is gentle and cannot be heard when it has to compete with others. Just as it is impossible to see your reflection in troubled water, so too is it with the soul. In silence, we can sense eternity sleeping inside us.”
    • 男兒一言 重千金 = the word of a man should be as heavy as a ton of metal
      This is the complement of the old proverb that says a mistake in inevitable with many words.  Hawkes’ purpose of solitude is as a meditative means to grasp a better reality of things through introspection, whereas the context for the promotion of solitude is in the context of relationship with others, reinforcing the wholistic notion of relational universe in Confucianism. The value of solitude is as an instrument of integrity (信 trustworthiness).
  2. Humility
    • “Never announce that you are a knight, simply behave as one. You are better than no one, and no one is better than you.”
    • 禮/礼 (rei) or 礼儀 (reigi in Japanese) = politeness or manners
      In Bushido, the essence of politeness is that of humility. This is often considered to be the external manifestation of 義 (righteousness), which could be expressed as a moral expression of one’s responsibility to others as a member of a society.
  3. Gratitude
    • “The only intelligent response to the ongoing gift of life is gratitude. For all that has been, a knight says, “Thank you.” For all that is to come, a knight says, “Yes!”
    • Hawkes’ religious context as a Christian is a type of all-encompassing gratitude towards the Almighty for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Where as in Bushido, again, this is an aspect of 礼儀 (reigi) where the gratitude for the other person is the other side of humility. Even in today’s kendo keiko (古 practice/training), for example, you are required to say “[respectfully] thank you very much” (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at every practice session with your practice partner.  Gratitude for the opportunity to train in a lifetime cultivation as a shugyosha (originally a Buddhist term as a “seeker of enlightenment,” or more commonly, someone whose life is dedicated towards the perfection of virtues and skills), and gratitude for helping to realize one’s weaknesses.
  4. Pride
    • “Never pretend you are not a knight or attempt to diminish yourself because you deem it will make others more comfortable. We show others the most respect by offering the best of ourselves.”
    • The idea very much overlaps one found in Bushido.  気位 (kigurai = pride or self-respect) is to be expressed through proper posture, etiquette (礼), and most importantly through the spirit (気 ki). In regular practice sessions, one is to give one’s utmost (physically, mentally, and spiritually) as a sign of respect for others’ time.
  5. Cooperation
    • “Each one of us is walking our own road. We are born at specific times, in specific places, and our challenges are unique. As knights, understanding and respecting our distinctiveness is vital to our ability to harness our collective strength. The use of force may be necessary to protect in an emergency, but only justice, fairness, and cooperation can truly succeed in leading men. We must live and work together as brothers or perish together as fools.”
    • 和 (wa, harmony) is one of the virtues not only in Bushido, but in its greater Japanese cultural context. Japanese had even labelled themselves as a people of 和, as one of the most highly prized virtues. This can also be considered as a outward manifestation of 仁 (jin, benevolence of mercy), which is one of the four major virtues of Confucianism, and considered to be the very essence of all other virtues. Hawkes is not so far from putting this as the most important concept like in Bushido when he equates the absence of this virtue as a sure destruction.
  6. Friendship
    • “The quality of your life will, to a large extent, be decided by with whom you elect to spend your time.”
    • Hawkes’ understanding of friendship is one that we, as Westerners, can easily identify with. The Bushido’s idea of friendship is one that is characterized by a deep, relational commitment that can seem to override even the absolutes of moral codes at times. 忠義 (chugi, loyalty) is tightly bound with the idea of 名誉 (meiyo, honor), and more often than not, the traditional version of this idea represents a deep sense of loyalty.
  7. Forgiveness
    • “Those who cannot easily forgive will not collect many friends. Look for the best in others.”
    • In Bushido, a similar virtue is also encouraged, more often expressed as overlooking the offense of others. The central tenet of 仁 (jin) expresses this idea implicitly, although when it comes to the actual practice it is often limited to one’s close circle of relationships.
  8. Honesty
    • A dishonest tongue and a dishonest mind waste time, and therefore waste our lives. We are here to grow and the truth is the water, the light, and the soil from which we rise. The armor of falsehood is subtly wrought out of the darkness and hides us not only from others but from our own soul.
    • 真実 (shinjitsu) truth, along with 誠実 (seijitsu) sincerity are considered as one of the eight virtues as outlined by Nitobe Inazō in his well-known book on Bushido. The spirit and the attitude around honesty happens to coincide very closely with Spartan stoicism, with its strong emphasis on frugal living and abstinence from any form of greed, which usually acts as the originating force towards dishonesty and pretentiousness.
  9. Courage
    • Anything that gives light must endure burning.
    • 勇気 ( yuu-ki) courage is the modus operandi of 義 (gi) righteousness or rectitude, and it is always in service of 義 and outside of that it would not be called courage. This is also one of the four important elements of kendo.

On the Korean script war

One of the silent wars that has been raging on the Korean peninsula is between those who promote only hangeul usage and those who wants to conserve the traditional mixed script usage where both hanja (traditional Chinese characters) and hangeul are used interchangeably. It’s true that in the linguistic history, specifically the history of written script, of East Asian countries, especially in Korea and in Japan, the use of phonetic scripts have been looked down upon as inferior to the use of classical Chinese idiomatic characters.

It seems that Korean people (those who are living in Korea) are evenly split between the all-hangeul-use camp and the mixed-use camp, with a lot of nonopinionated stuck in the middle. I’ve memorized around 500 hanja characters so far, and in spite of my large ignorance, I incline towards the mixed-use, not because I am an elitist but because I believe there is more to lose than to gain. History is already a largely marginalized subject in schools due to overt emphasis on job skills in education, and it doesn’t help to establish any more sense of connection to history if you herd an entire generation people to an ignorance of scripts used by their forefathers. Take the example of the writings by Ahn Jun-geun (Korean: 안중근 (安重根)).  Thanks to a popular bumper sticker, everyone is familiar with his hand print along with the word, “大韓國人,” (Korean: 대한국인), literally translated, “The Person of the Great Country of Han.” However, the main writing which this was part was “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 (Korean: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translated, “100,000 pounds of gold can’t equal to a [proper] teaching of [one’s] child,” is largely unknown to the populace. He wrote this while in jail, waiting for his execution, which was the penalty for trying to assassinate Ito Hirobumi.

And then there is the deeply honored historical figure called General Yi Sun-sin, whose writing was only in hanja. Some Koreans may have heard of Diary during the War (Korean: 난중일기 (亂中日記)), even may have read a translation of it, but only very few has ever read it in its original writing. Of course, it doesn’t help that he wrote mostly following the Chinese grammatically rule, just as the literatis of his day did, but even knowing the characters themselves would help to identify the words with which he wrote. Continuing to neglect the linguistic heritage, and marginalize its use for the future generations of Koreans is to distance the Koreans to the real historical identity of its past, and only to ostracize its people from sharing the common heritage of its own history, as well as its connection to its neighbors.

A soul living in a faddish world

Today’s world is full of people with over-the-top confidence of the very age they are living in. As the old Eastern saying goes, a frog in the well (井底之蛙) thinks of its well 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The entrapment of such captive intelligentsia to its own myth of progress causes minds and human types that resemble Swift’s Lilliputians, or strutting cocks that face down their ancestors only because they happen to be breathing at the present moment. Have you ever tried to talk to a teenager who believes he has come to a point in life where there is nothing more to learn from you?  Welcome to the world of teens de historia.

I think it’s better to be utterly broken with the knowledge of one’s own ignorance, so I hearken back to the sages of old. All thirsty souls are welcome.

오늘 날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 사는 시대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이 세상이 우주의 중심인것 처럼. 발전이란 신화를 절대적으로 믿는 자칭 지식인들로 인해 小人國人間形이 만연하고 현제 숨을 쉬고 있는 이유하나로 과거의 조상들의 것들을 수탉과 같은 기세로 깔아보는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는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는 십대 청소년과 대화를 해본적이 있는가?  시대적 십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자신의 無知에 대해 心적으로 깨진 사람이 난것 같다.  저 먼 과거의 賢者들과 聖人들의 미새한 소리를 들어본다. 모든 갈증하는 이들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