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時: 2018年 3月 8日 (木)

행 18:24-19:7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온 아볼로는 언변에 능하고 성경에 능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의 도를 담대히 가르쳤지만 오로지 요한을 통해서 만 알고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예수에 대해 저 자세히 알려주고 아가야로 갈때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사도들이 그를 환영하며 받아 줄수 있게 편지를 써주었다. 그가 도착하여 능력있게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선포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공개적으로 물리쳤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때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만 알고 있었던 제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믿었을때 성령을 받았냐고 묻자 그들은 들은 적도 없다고 하여 안수하여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방언하며 예언하기 시작했다. 약 12명 정도되는 제자들이었다.

아볼로와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된 제자들이다. 그들은 요한이 가르쳤던 것 처럼 예수가 구약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삶이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쳤던 소리로 부르심을 받았던 요한. “회계하라. 예수 메시야의 시대가 지금 임하였다.”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회계를 통해 예수의 완전한 계시를 받아 드릴 수 있는 준비가 완벽히 되었었다. 아볼로는 인간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왔던 유대인이었다. 그는 이미 구약의 말씀에 능통하여 예수를 전하고 있었으며 이미 1년 반정도 고린도에 있으며 가르쳤던 바울의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면은 하나님은 어떤 유창한 것으로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방이 모여 강을 이르듯 작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사용하시는 것을 본다. 세례요한의 메시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전함에 응하는 아볼로의 겸허함.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드리는 요한의 제자들. 파가르기 좋아하고 어떤 권력체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가 중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만을 받고 순종하는 사도들이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아볼로와 같이 주께서 주신 맑은 정신과 재능은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겸허한 마음으로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7日 (水)

행 18:12-23

아가지역의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들어오자 유대인들이 다시 연합하여 바울을 공격해 재판에 세우며 율법에 어긋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라고 한다. 갈리오는 범죄한 자를 재판에서 보겠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관한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재판에서 몰아내었다. 유대인들은 재판장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리지만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후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 안디옥에 이른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다니며 모든 제자들이 믿음에서 굳건하게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하게 따르고 있다면서 왜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보다는 단지 바울의 복음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이다. 정조때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를 통해 가톨릭교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이유도 유학가의 성리학파들과 실학파들이 권력형태를 유지해 올 수 있던 왕 중심적 사상에 위협을 받아서였지 어떤 유학의 덕치주의 철학과 대립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선의 왕이 아닌 예수를 왕으로 섬기라 하니 자신의 권력체계에 대한 위협이 아니면 무엇인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졌던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바울 또한 계속된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오늘 날 진정히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은 예수보다 더 권위를 세울려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는 정면 충돌할 수 밖에 없게된다. 사탄은 오랜 시간 이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국력을 이용해 핍박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자신들의 뜻대로 살기 편한 환경으로 유도한다. 즉 자가신성화이다. 개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사상. 종교적인 면을 띄고 있지 않지만 자신들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하며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간다.  예수님의 독점적인 선포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대립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주님, 주께서 나의 삶의 진정한 주님이 되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모이면 모래같다는 말은 오래전 부터 들어온 비유이다. 그 만큼 단합이 어렵고 같이 협력하여 일 하기 어려운 민족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왔다.  미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양적인 문화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도리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타국에서의 단합이 어떤 모습이야 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민족이다. 사실상 단합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수십 수백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일본과 같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단일민족이다. 한 언어와 한 혈통을 나눈 민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분열되고 파싸움이 일어나는가?  답은 근대역사속에 들어있다.

1910년까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하나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 또는 한말이라 칭하는 국민적 신분이 분명했지만 그 후로 크게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항상 열등한 민족으로 보아왔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수치를 겪으며 일본이 흡수한 서양문명을 현대화란 이름하에 일본식으로 현대화를 경험하여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여겼던 민족에게서부터 정체성을 키워와야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되며 더 큰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간접적과 UN(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레닌산 공산주의와 미국산 민주/공화주의. 북한과 남한으로의 분단. 지역주의. 강압적 보수주의와 한국식 한으로 본토에서 교화시킨 한국산 진보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본적으로 근시적 성질을 지닌 한국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갈라질수 있는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되었다. 더 많이 있겠지만 크게 갈라지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지역주의
  2. 미국을 보는 관점
  3. 일제강점기와 일본을 보는 관점
  4. 북한을 보는 관점
  5.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6. 이승만 정권의 시대를 보는 관점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지역주의만 빼고 나머지 이유는 다 근대사에 일어난 일로 인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성격을 아시고 서로를 감싸고 이해해 주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신민(新民)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였다. 신본주의적 배경에 그는 어떤 분리된 역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민족적 정신의 맥을 바르게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조선말기이후 민족적 정신을 계승을 받거나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 나마 이어왔던 한학의 맥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배경에서 일제의 제국대학의 지나학(支那學)으로 대체되고  해방이후에는 대만의 중국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대륙중국의 경제적 상승을 코앞에서 경험하고 나서는 중국학을 다시금 정리하여 받아드리는 태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퇴계(退溪) 이황이나 율곡(栗谷) 이이같이 훌륭한 학자들을 둔 한국이 구미(歐美)의 중국학에 비해서도 상당한 바닥 수준이라는 것. 한국 교육 시스템을 봐도 실용주의적 서양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조선시대 학가들이 깊이 연구한 문서와 질문들에는 먼지만 싸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전통한학에 대한 것을 검색하거나 관련된 검색어를 사용해 서당을 찾아보면 풍수지리니 건강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쓰레기가 넘쳐나온다.  물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들의 모임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것 뿐.) 가까이 한인교회를 같이 다니는 지인들 중 비교적으로 서울대졸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도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동양문화를 마치 중국문화로만 분리해 타국의 것으로 이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세기를 혼란스럽게 지나며 100여년전의 조선의 것들은 조선의 후손들이 스스로 경시되어 오니 정체성의 문제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적인 것들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무속신앙
  2. 유교
  3. 불교
  4. 도교

사실 인간의 긴 정신 역사속에 종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서양의 역사속의 문예 부흥에 따른 계몽주의는 인간을 신성한 헬라의 구시대 종교의 부흥이라고 봐도 문제가 안된다. 이 맥을 이은것을 무신론주의나 인본주의라 불러도 무관하다. 구시대 헬라의 문화를 보면 그러한 정신은 다신론적인 성격을 띈 문화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이 힌두교의 정신을 계승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정신은 위 4가지 모두의 영향이 있었으나 지배층의 정신은 유교에 의해 발전되왔었다. 그래서 빠르게 현대화를 경험하며 전에 있던 것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드리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60% 이상이 노비로 있었던 구조선이 무엇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리고 지배층의 유교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감정또한 강하게 표출되며 기독교를 제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같은 유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접목의 필요라던가 연관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에 유학파들의 사람들또한 기독교인이 되며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세상의 것으로 간주하여 어떤 진지한 학구적이나 정신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장 나라가 패망해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배부린 소리인가?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학구적이 어떻고 정신적이 어떻고가 시야에 들어오겠는가? 불가피하게 물질적인 노력에 더 충실해야했다.  전 시대의 것들은 계승될 가치가 없어졌으니 나머지 국민들은 알아서 현실적 필요에 휩싸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경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나가야 하는가?  역사속에서 미래를 위한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작정 오래된 것은 구닥다리 취급해 버려온 것은 답이 아니다. 영국 기독교인이 호머의 오디시나 일리에드가 그리스의 문화유물이라 무관해 하지 않는다. 서양의 문학작품으로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마치 영국의 산물인 것 처럼 깊이 있게 읽는다. 서양의 모든 후세의 문학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제 파동치는 민족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중국에서 온 것은 무관하게 생각할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천년넘게 사용해 온 한자까지 뿌리 뽑아 없애려 하는 이상한 움직임이 까지 보인다. 옛것을 도끼로 찍어 넘겨버리고 남은 한국의 문학물은 몸통없이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일때가 있다.  중국이 역사의 안개뒤로 뭍여버렸으면 이렇게 중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로마 제국은 없어졌지만 중국은 역사의 고리를 물고 아직 존재하고있다. 동양문화와 종교의 근본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해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 유럽국가들은 정신적 세계를 같이 공유하며 역사를 지나왔다. 동양에 사는 사람들 또한 자연적 이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가?

기독교와 유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는 신을 론하는 민속신앙과 어떤 신이 언급되는 敎들이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도덕과 관계로 근거하는 철학에 불과하다. 순수한 불교도 엄격히 따지면 세상을 보는 철학의 눈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을 시키고 많은 기독교인 철학가와 신학자들이 교리를 발전 시킨 것 처럼 동양에도 그러한 급의 다른 시각의 정신적 발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기독교로 계승시킨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어가 많아 문제 삼았다가 한국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영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국의 옛 것의 본질적인것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디서 주어 들은것만을 가지고 버리라고 하는 무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다. 과거에 조선말기의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카톨릭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핍박을 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장악하며 절대중앙집권주의로 권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껴서이었다. 유가의 성리학과 실학자들이 주를 형성해 기독교를 핍박해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 가르친것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지켜대듯이 절대적으로 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뿐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이념 자체가 정도전(鄭道傳)이란 유학자에게서 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고 유학의 기본 경전이 아니라 후세의 외경에서부터 도입된 생각들로 인해 순수한 유교라고 칭하기 어렵다. 순수한 유교는 논어, 맹자, 순자뿐이라 보면된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새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것을 정리해 서술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왕을 우주의 도덕적 중심(또는 중정) 그리고 성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궁에서는 매일 같이 유경을 공부하는 경연이 있었고 왕은 백성들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예수를 기준이라 하니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예수를 넘긴 이유가 같다. 그 들의 왕이 왕 중에 왕 되신 예수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칭하셨다. 이 땅의 왕 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난 질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서로 겹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 유학의 중정과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왕이 아니라 예수 왕으로 하면 전에 있던 도덕적 이상이란 틀에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돈이의 태극도설같은 곳에서 나오는 오행설 같은 것들은 걸러내야할 것이다. 도교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요소같은 것도 많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이란 정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인격적 부분이다. 미래의 한국인 이란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이란 나라를 통해 역사하신 것과 한국인들의 후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安時: 2018年 3月 6日 (火)

(16:19 ~ 17:34) 바울은 데살로니아, 베뢰아, 아덴(Athens)에서 복음을 전한다. 데살로니아의 유대인들은 계속해 따라다니며 군중들을 격분시켜 복음을 반대하였고,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아덴의 사람을 쟁론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행 18:1-11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간다. 같은 업종(장막만들기)에서 일하던 이탈리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같이 있으며 매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바울과 합류하였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매도하자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며 이제부터는 유대인들에게 가지않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며 회당을 나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니 회당의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신 후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아굴라는 로마에서 전도를 받은 유대 기독교인이며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 로마에서는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서로 분쟁이 심화되서 그런지 아니면 복음으로 많은 도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해서 그런지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그냥 다 몰아낸다. 이 때 나오게 된 아굴라다. 나중에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까봐 사역자로서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교회에서 중세때부터 시작된 성직자들은 교회 사역에만 전념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인간이 만들어넨 종교적 행위이며 인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될려면 사역자들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담당하는게 교회라는 인식에서 나와야 하고 교인들도 다른 업종에서 일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을 완전한 사역자로 받아드리지 않는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일단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의해 사역이 되고 안되고라는 썩은 인식이 자리잡혀 있는 한 교회는 계속 썩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하는 행위는 옷을 털며 그들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피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의 나와 있는 파수군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할일을 다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해진 말씀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 들의 (영적인) 죽음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뜻. 그렇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언급 된 것 처럼 제일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나가 멀리 간 것도 아니라 바로 옆집에 머물게 된 바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감정이었겠는지는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이것에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던 바울은 얼굴이 철판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 너를 지키겠다는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 끝날때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바울과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3月 5日 (月)

행 17:16-34

아덴에 온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숭배로 가득찬 것을 보고 매일 회당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전도하였다. 에비구레오(epicureans)와 스도이고(stoics) 철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바울을 아레오바고(Aeropagus)로 대리고와 쟁론한다. 바울은 그 들이 모시고 있던 무명의 신을 소개한다고 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를 들은 자 중에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이 있엇고 바울은 여기서 떠난다.

安時: 2018年 3月 4日 (日)

행 16:19-17:15

무당 소녀의 주인이 소녀에게서 귀신이 나간것을 보고 더 이상 돈을 벌수 없게된 것을 알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로마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둔다. 한밤중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사슬이 풀렸다. 지키고 있던 교도소장이 이것을 보고 자살을 할려 할때 바울이 우리가 다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그를 중단 시키자 그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다. 다음 날 교도소장에게 어제 옥에 가둔 사람들을 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두었으니 그들이 직접와서 풀으라고 반박하자 명령을 전한 경찰들이 다시 돌아가 이것을 전하니 바울의 일행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듣고 상관들이 두려워했다. 상관들이 직접와서 사과하고 그들을 옥에서 나가게 한다. 일행은 루디어 도시에 들려 교회를 격려하고 몇 도시들을 통과해 데살로니가로 온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카이저말고 예수가 왕이라한다고 하며 도시 전체를 격분하게 만들어 일행을 초청했던 야손을 잡아왔다. 야손을 돈을 주고 야손과 야손의 사람들이 풀려났다. 바울의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베뢰아의 사람들은 열심을 내어 말씀을 받고 성경 말씀을 매일 보며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 것인지 공부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사람들을 격분시키니 일행은 바울을 아덴에 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

Free traditional Chinese (漢字) fonts

例示: 大學之道 八條目

 

Some fonts sourced from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ayatom&logNo=1018127074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安時: 2018年 3月 2日 (金)

Paul's Second Missionary Journey, 49-52 AD

Illustration Credit: Mission Bible Class, https://missionbibleclass.org

행 16:6-18
지금의 터키의 여러 도시(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서쪽으로 순행하나 어떤 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건나가고 아시아 동쪽으로는 가지않게 되다가 바울의 환상에서 마게도냐의 남자가 그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마게도냐로 향한다. (지금의 터키)드로스에서 마게도냐의 빌립보까지 가서 머물다가 기도하는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옷단을 파는 여자)에게 전도해 그녀가 세례를 받게되고 그녀의 집안또한 구원을 받는다. 기도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바울에게 어떤 점치는 소녀가 몇일을 계속 따라다니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며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고 외치니 바울이 귀찮게 여겨 소녀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낸다.

마게도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을 아시아로 돌리셨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서 중동지방에서 유럽쪽으로 복음이 건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의 터키에서 그리스 북쪽에 있는 나라인 마게도냐를 복음이 정복하는 순간이다. 불과 300년전에 알렉산더 왕이 온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의 나라는 몇 세대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고 없어졌지만 그 위대했던 인간국가의 왕의 모국이였던 마게도냐에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고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아직도 살아있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 그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루디아. 유럽에서의 첫 기독교이되는 영광을 지니게 된다. 단지 기도하러 나왔다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는 상황을 본다. 고넬료처럼 복음을 들으러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의 마음 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밭은 겸허함으로 일궈진 하나님의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곳이다. 루디아는 이 도시의 유명 상품인 옷단을 판매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하인들도 여러 명 거닐며 큰 집도 있던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그 녀의 집을 빌립보의 첫 교회로 세우신다.

귀신들린 소녀. 그 시대에 상업적 목적으로 점을 치는 곳은 많았다. 마치 한국의 무당같이 어떤 귀신을 받아들여 그 어린 삶이 사람들의 돈버는 수단으로 사용됬던 것이다. 귀신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위협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과 성경의 여러가지 예를 보면 귀신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그냥 알고만 있다는 것에 끝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에 있어서 귀신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누구를 따르는 삶을 사는냐에서 달라진다. 귀신은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을 일삼아 살아가는 존제이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무력하지만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지옥으로 대려갈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존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케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주님,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민감하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육신은 너무나 약하나이다, 그러나 육신의 것들은 뒤로하게 하시고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것을 더 먹고 더 중요시 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직장에서도 이런 거짓을 자주 보는데 그 때부터는 그 당사자가 쓰레기처럼 보이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安時: 2018年 3月 1日 (木)

행 15:36-16:5
바울은 바나바에게 전에 말씀을 선포한 교회들을 방문하자고 하자 바나바는 요한 (헬라어 이름: 마가) 을 같이 대리고 갈려고 했으나 바울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에게서 떠나 일을 같이 하지 않은 요한을 대리고 가지 않고 싶어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서로 떨어지게 된다. 바나바는 요한을 대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대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를 방문한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할 때 제자 디모데를 만난다.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혼혈아이고 이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막기위해 디모데를 할레를 시키고 같이 사역을 다닌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을 교회들과 나누니 교회들이 믿음에서 격려를 얻고 계속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하였다.

요한을 두고 여태 같이 사역해 왔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다. 사실 요한이 어떤 이유로 밤빌리아에서 그 들을 떠났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이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었다. 바울은 이것을 이유로 요한을 대려가지 말자고 한다. 바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일에나 꾸준하지 못하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조금의 희생도 하지 않을려고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로 대는 사람은 나도 개인적으로 같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같은 사람은 매우 흔하다. 이런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바울과 더 동의하는 편에 있다.

동시에 요한을 받아드리고 다시 한번 찬스를 주는 바나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인물들인지 엿보이게 하는 본문 말씀이기도 하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또한 사역으로 회복했던 인물이다. 바울을 죽일려했던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한 동안 먼 곳으로 가 있었고 바나바가 직접 가서 바울을 대리고 왔서 복음 사역을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다. 이 계기로 요한(마가)는 나중에 바울을 인정을 다시 회복하고 더 나가 후에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된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그냥 사도행전 12장에서 언급이 끝나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보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바나바가 대인배같은 인물인것 같다. 그렇다고 바울이 소인배란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기준이 더 높았던 바울에 비해 바나바같은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회복의 기회를 얻고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대로 사용하시고 준비된 만큼 사용하신다. 좋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지므로 더 많은 교회들이 이들의 사역의 해택을 본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이행. 그리고 그 분의 은혜에 비춰볼때 바나바와 같이 타인에게 챤스를 주고 관계의 회복을 허락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다음은 혼혈아인 디모데가 나온다. 본문 말씀에는 그는 이미 사역에 충실하고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사도들에게 추천받은 인물로 기록되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되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던 바울은 할레를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계속 충돌하고 싶지 않아 디모데에게 할레를 받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주께서 가르치신 것 처럼 우리에게 죄진 자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바나바와 같이 더 큰 은혜로 사람들을 대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8日 (水)

행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와 바울를 다시 안디옥으로 보낼 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하고 같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 내용: “우리가 보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서 너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전할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너희에게 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않아 다음과 같이만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우상에게 주어진 음식과 피가 흐르는 음식 또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며, 음행에서 멀리하라.”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하고 교회에서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아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와 연관해 세가지가의 주동사가 있다. (1) 보냄 (2) 읽음 (3) 가르침.

(1) 실라와 유다가 교회 장로들로부터 선택받아 가게된다. 그들은 형제들중의 인도자라고 나와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교회의 인도자들은 지혜와 성령충만이라는 두가지의 강령에 따라 지정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택될때 이 두가지의 기본적인 강령을 간과하는 것을 너무 흔히 본다.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사회적 지휘가 높거나 유명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교회의 물질적인 것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 다 지혜나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지혜롭다고 말할때는 근본적으로 바른 인신론적 바탕에서 의미하는 지혜이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 누군가 지혜롭다고 말할때와는 다른 지혜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바로 알고 인간의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위에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다. 여우처럼 약아 빠져서 계산에 빠르고 모든 것을 다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세상의 물욕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절대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서의 첫 강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신론적 (epistemic) 바탕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기본적 틀일 뿐이다. 다음은 성령충만. 요 16:8에 성령님의 3가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 의, 그리고 다가올 심판. 그리고 모든 진리로 (v13) 인도하신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 주님의 의를 입은 사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의 기본이라 하겠다. 회계나 주에 대한 믿음은 자연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니 많은 교회가 멍멍이판일수 밖에 없지않는가.

(2) 편지를 읽음. 27권의 신약 중 21권이 편지이다. 서신서라고 한다. 그 중에 바울의 서신이 제일 많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인 것 처럼 편지를 읽고 모두 기뻐하고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날의 교회 또한 이 편지를 읽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딱딱한 틀에 익숙해져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앞에서 읽고 교인들은 모두 다 같이 들으며 그것을 통해 기뻐하는 전통이 없어진 것이다. 구약에서도 제사장 에즈라 하나님의 성전이 제건된 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사람들이 회계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 갈급한 지금이다.

(3) 가르침. 교회의 3가지 대강령중 교육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육. 선교. 친교. 바르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움의 근본이다.

주님, 바른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더 성장해 나가며 순종으로 열매맺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7日 (火)

행 15:12-21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셨는지 말하고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구약의 이사야서와 아모스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림을 받으리라하는 예언의 말씀을 언급하여 이렇게하여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교류를 위해 세가지를 지키기를 권고한다: (1) 우상에게 제사지낼때 사용된 음식을 피한다 (2) 목졸려 죽여진 고기를 피한다 (3) 피가 아직 있는 음식을 피한다. 그리고 권고가 아닌 꼭 지켜야 할 도덕적 법: 음행에서 멀리한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이것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한다. 여기서 공식적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전해졌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야고보. 그는 예수님의 이복형제였다. 이 당시 그가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 역활을 했고 그리고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율법을 꼼꼼이 지키는 유대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었다. 이러한 야고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기독인들이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여겼던 기본적인 음식에 대한 율법과 깨끗한 도덕적 삶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 당시 많은 이방인들은 헬라와 로마 문화와 종교에 배어있던 물란한 요소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요즈음 남색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커져 미국 문화와 교육에 번번히 나타나 교만한 행각을 보이는 것 처럼 그 당시에도 인간의 문화는 여전히 타락의 습성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의 문화만 그럴까… 한국 문화도 보면 과거 술집이나 어두운곳에서나 보였던 것들이 대중문화화 되어 만연히 보여지고 있는 추세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극치로 야비하고 추한 문화가 대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1서 2장에서 나온 것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문화적으로 거리낀다 생각되고 어렵다라고 생각되면 너무 쉽게 구약은 폐지되었다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율법을 폐지시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셨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율법이다. 너무나 더러워져 무엇이 더러운것인지 모르게 하는 대중문화. 복음으로 거듭나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택받았으면 토해내 버린 것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겠다. 주님, 주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6日 (月)

행 15:1-11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전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큰 마찰이 생겨 토론을 하고 이것에 대해 두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갔다오기로 한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선포하지만 바르세인들의 당에 속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믿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토론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역사하사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게 되었고 그 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니 어찌하여 자신들의 조상이 짊어졌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말한다. 자신들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처럼 그들 또한 은혜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Soli gratia. Grace alone. 오로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이 극락에 도달하는 여부나 다음 환생의 상태를 업보라는 것에 의존 되있다고 한다. 엄격히 보면 하나님이 필요없는 구원론들이다.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업으로 인해 어떤 우주적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람의 힘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택과 구원을 엿볼수 있다. 이런것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전적이며 파격적인 은혜를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별함을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또한 다른 세상 종교들 처럼 자신들의 업을 기준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시작서 부터 계획하신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이것이 더 확실해 졌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디어 예수를 통해 완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사람의 이 만든것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회방할려고 한다. 사람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주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5日 (日)

행 14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니 많은 사람들이 믿었으나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제자들을 돌로 쳐죽일려고 하여 떠나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루스드라에서 다리가 불구인 사람을 치유하여 그 사람이 다시 걷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를 헬라의 신으로 여기고 그들의 사제들이 와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번제를 드릴려고 하니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 자신들은 사람이며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며 그들을 말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번제를 할려고 한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부터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이곳까지 따라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죽이고 죽은 줄 알고 바울의 시체를 도시 밖에 버린다. 제자들이 바울 주위에 모이니 바울은 다시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는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거치면서 제자들을 격려하며 많은 핍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교회마다 다니며 기도와 금식을 하고 안수하며 장로들을 세웠다. 몇 도시를 더 순행하며 다시 안디옥에 와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것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을 알렸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지옥에 가두실때까지는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 세상에는 만연할 것이다. 바울은 돌에 맞아 정신을 잃기까지해서 시채처럼 도시 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마다 항상 반대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일에는 항상 어떤 반대하는 세력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역사한다. 즉 사탄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침범하는 자, 즉 싸우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듯이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 싸워나가는 것이다. 육신과 혈육을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즉 사람들과 머리 맞대고 싸워나가는 싸움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우는 싸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홀리었는지 어떤 세력이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영적인 눈이 어둡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사용되는 도구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무리 가까운 혈육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없으며 이 육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온전히 주의 뜻을 바로 인식하고 이루는데 뱀같이 지혜롭게 하시고 비둘기같이 순수하게 하소서. 이 주일을 분별하여 주님에게 연랍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安時: 2018年 2月 23日 (金)

행 13:44-52
다음 안식일에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을 반대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지만 받지 아니하므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해진다.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지도층과 부유층의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만든다. 제자들은 발에 먼지를 털고 이코니엄으로 기쁨과 성령 충만함으로 가게된다.

기쁨이란 나 자신의 것보다 더 큰 것에 대해 나아갈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 얼마나 기쁜 것인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제자들의 마음. 그 가운데 받는 핍박과 적들의 공격은 기쁨을 더하는 화살이요 주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마음은 하늘을 비상하리요. 주님, 땅에 묻혀 썩지 아니하는 씨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주를 위해 나 자신을 잊고 주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저 높은 것과 더 큰 것, 즉 하나님의 비젼을 바라보고 기쁨과 성령충만으로 앞으로 전진하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2日 (木)

행 13:32-43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 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이 죄에서 자유케 하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자유케 된다는 복음을 알린다. 회당의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꼭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며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으라고 격려한다.

찬송가 268장
1.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 육체의 정욕을 이길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3. 눈보다 더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4.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산더미 같은 나의 이 영혼을 주의 피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시고 온전히 눈이 주님 만을 바라는 하루가 되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21日 (水)

행 13:13-31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안식일날 버가의 회당에서 앉아 있으니 회당 지도자가 권할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하자 바울이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선택하사 이집트에서 크게 하셨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사 40년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참으신 후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었다. 이것이 450년 동안의 일이었고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법관들)들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해서 40년동안 사울을 세우셨고 그 이후 다윗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다윗의 자손으로 언약하신대로 구원자 예수를 주셨다. 예수가 오기전에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그가 아니요 나는 그의 신발 끈 조차 매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 하셨다. 이 구원의 메시지 (복음) 이 우리에게 선포되었으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매 안식말마다 예수를 예언하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를 몰라보고 말씀도 이해 못해 그를 처벌함으로 예언의 말씀을 성취시키었다. 죽을 죄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은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에 처해지기를 간구했고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나서 그를 무덤에 옮기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바울의 사역이 시작된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다. 버가에서 선포되었던 바울의 메시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구약과 신약의 너무 깊은 선을 그어버린 이해는 위험한 성경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대한 것들이 구원 역사에 흐름에 일맥 상통하는 것들이고 그 가운데 약속하셨던 것들이 예수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본다. 즉 성경 전체의 하나님을 바로 아는 바탕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 타락했던 인간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은 무리들을 선택하셔서 인류의 진실된 역사의 기록을 보존케 하시고 백성들을 대하시면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시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재일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구약의 성경 말씀을 달달 외우고 있었던 바울 (히브리어 이름: 사울) 이었다. 불과 짧은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에 불을켜 그리스도인들을 다 전멸시켜 죽여버릴려했던 바울. 그 만큼 하나님의 사명을 뜨겁게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지금은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유대인 누구보다도 성경을 더 잘 알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고 어떻게 예수를 통해 그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었는지 설명할 줄 알 수 있었던 사람이 바울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우연이란 없다.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선하시고 좋으신 뜻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주님, 사도 바울을 준비하신 과정을 보며 그 아무리 최악의 상황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 일어나는 일 가운데 불안속에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주관아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승리하게 인도하여 주소서. 주의 나라임하사 주의 뜻을 이 삶을 통해 이루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바울 일행은 도착한 후 첫 안식일 아침에 회당에서 바울의 첫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구약시대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역사하심이 지금까지 어떻게 다윗의 후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까지 어떻게 구원이 역사가 성취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스테반은 모세에 집중하였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구약시대에 행하신 역사와 다윗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복음 성취를 위하여 오신것을 전파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예수를 박해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정반대인 복음 증거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면서 복음 증거에 앞장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삶되게 하시고 모든것을 그리스도인으로써 감당하는 삶되게 하시고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 중심이 되는 삶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도 부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安時: 2018年 2月 20日 (火)

행 13:1-12
안디옥의 교인들이 예배와 금식을 하는 중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신 일을 위해 구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를 하고 보냈다. 실루기아와 구브로를 통해 살라미에 도착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이때 요한이 그들을 도왔다. 바보라는 곳에 도착했을때 서기오 바울이라는 지방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했으나 그와 같이 있던 마술사, 또는 거짓 선지자 바예수 자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반대하여 총독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성령에 충만했던 바울은 그를 똑바로 보고 다음을 말한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즉시 그는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 자신의 손을 잡고 인도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총독은 예수를 영접해 믿기 시작했고 이 기적을 보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워했다.

초기 교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힘을 쓰고 그런 중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교회란 단어는 헤라어 ecclesia 에서 오는 말이다, 즉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건물이 아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은 만인의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라 (이사야 56:7) 말씀을 하셨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마치 구약의 말씀을 알고 따라하는 듯 모일 때마다 같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면 같이 모여 예배하는 중에 잠깐 기도하는 것 빼고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특별 기도회가 아닌 이상 별로 기도를 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행정모임이나, 같이 먹는 친교모임, 아니면 어떤 강사를 듣는 집회 모임, 또는 교육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다 필요한 모임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뜻하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리라” 하는 모임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상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기도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볼일만 하거나 곧장 만날 사람과 대화를 하며 사람의 뜻을 이루어 가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장소로 보여지지 않을때가 있다. 사람들과 같이 모이면 수다만 떠는 것을 더 좋아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 모임의 제일 큰 목적은 같이 모여 기도하라고 있는 것이다. 교회서 성가대 모임, 성경공부 모임, 다 좋지만 모여 더 자주 기도를 같이 하고 그냥 성경 말씀을 돌아가 읽으며 선포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겠다.

바나바와 바울이 간 바보(Paphos)라는 곳에 사탄이 바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뜻은 ‘예수의 아들’, 로마(헬라)식 이름은 엘루마(Elymas)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 당 시대 발음은 예슈와 구약의 여호수아(예호슈아; 뜻: 구원의 하나님)란 이름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Yeho-shua = Ye-shua).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사람을 멀리할려고 하는 일을 볼 수 가 있다. 그는 직업은 마술사라고 소개된다. 옛 개역한글판에는 박수. 즉 고대시대에 흔히 점쟁이 (거짓 선지자)역활을 하면서 치유를 한답시고 무슨 주문을 외우거나 사람에게 약같은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말했다. 여기서 총독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총독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그를 장님으로 만들고 총독은 복음을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설교 들을 종합해 분석해 보면 돈과 물질에 대한 설교가 제일 많으시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란 메시지이시다. 창세기서 하나님은 물질을 다스리라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죄로 인해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서 창조의 질서가 깨진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에서 제일 많이 듣는 것이 자신들의 돈벌이 생활로 바뻐서라는 말이다.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노예.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것 처럼 그것이 당연히 사람살이의 이치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기까지하다. 마법사 엘루마가 당당했던 것 처럼. 헌금에 대해서 아나니아 부부처럼 그 자리에서 죽거나 엘루마처럼 장님이 되는 일이 많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특별히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 같다. 그러나, 죽이시고 장님이 되게 하지 않는다고 거만히 삶을 사는 사람들은 경고를 받고 회계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든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의 눈 앞에 펼쳐저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치 않은 것은 회계하게 하시고 삶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19日 (月)

행 12장
헤롯 왕이 예수를 따르던 제자 야고보(마가의 형제)를 죽이고 여러 교인들을 잡아들였다. 유대인들 이를 원했던 것이고 헤롯 왕은 베도로 또한 잡아 들였다.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초서있던 군인들도 모르게 감옥에서 걸어나오게 하시고 베드로는 마가의 집에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던 교인들에게 나타가 그 들을 놀라게 한다. 베드로는 일으난 일들을 야고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와 다른 교인들에게 말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헤롯왕에게 베드로가 없었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헤롯왕은 보초서던 군인들을 사형하고 사람들을 시켜서 베드로를 찾아나셨지만 찾지 못했다. 헤롯왕은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그가 신이라고 경배를 하자 그는 이를 그냥 받아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다. 복음의 말씀은 계속 전파되고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돌아온다.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밤사이에 4병의 군인이 한 조를 이루어 세개의 조가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며 만약 죄인이 탈옥하게 되면 감옥에 있는 죄인의 죄를 보초서던 군인들이 고스란히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알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옥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이는 무슨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기도가 배경에 깔려 있다. 하나님의 더 크신 뜻도 있지만 그에 합당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교인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계속해서 같이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보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 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사역자들을 통해 말씀이 선포되고 교인들은 이를 위해 물자적 지원과 기도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롯왕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다. 요세프스란 당시대의 유대인 역사 기록가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옛역사, 제19권) 헤롯왕은 은으로 만든 매우 반짝거리며 요란 스런 옷을 입은 것으로 기록 되있고 공공 장소에 나와 사람들에게 무슨 연설을 할때 시간이 맞았는지 아니면 비슷한 시각에 구름이 열려 햇빛줄기가 그 에게 비췄는지해서 빛이 매우 크게 그의 옷에 반사되는 작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고 말하며 그를 경배하기 시작했다. 전 장에서 보면 베드로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며 안수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고 경배할려할때 베드로는 깜짝 놀라며 자신은 그냥 사람이라고 말하고 경배받는 것을 거부하는 반면 헤롯은 아무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드린다. 마음의 상태를 알수가 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헤롯은 어떤 새를 보고 나서 순간 갑자기 배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쓰러져 5일 동안 앓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있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struck down” 했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하나님께서 겸허하며 순종하는 자는 올리시고 교만한 자는 낮게 하신다. 주님, 오늘또한 가까이서 멀리서 주의 나라위해 최전방에서 피땀흘리고 있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여 주소서. 노 선교사님이 계신 볼리비아에서는 전도가 불법화 되는 등 기독교인들의 핍박이 심각한 경지까지가 있습니다. 그들의 사역에 함께 하여 주시사 이런 핍박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역을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평양 PUST에 있는 마 누님또한 함께 하셔서 지혜와 성령충만으로 지하교회의 더 많은 학생들이 주님을 목숨걸고 따르게 하여주시사 북한이 하루 빨리 복음화 될 수 있게 하여주소서. 캄보디아의 오 선교사님의 사역에도 더 많은 열매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주소서. 지금 파키스탄의 현지인 사역자들을 가르치고 계신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도 건강을 지켜주시고 주위의 사탄이 세력들이 침범치 못하게 지켜주소서. 이 날에도 주의 역사를 기대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17日 (土)

행 11:19-30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하면서 시작된 핍박으로 인해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유대땅에서 먼 곳 까지 흩어지게 되었고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안디옥 (지금의 터키 중부 극남쪽에 위치안 도시) 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낸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들에게 믿음안에서 굳건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주님에게 오게되었다. 그 후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안디옥으로 대리고 온다. 일년동안 바나바와 사울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렸었다. (이때 아가보란 선지자가 다가오는 가뭄을 예언한다.) 이들은 유대 땅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선물도 보내었다.

Crisis is an opportunity in disguise 란 말은 사실 위기(危機)란 한자를 풀이한 말이다.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더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방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독한 유대 우월주의를 무슨 국민적 설득을 통해서 아니면 촛불집회를 형성해서 인식을 바꾸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제일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셨다. 바로 가만히 있지 못할 핍박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있는가? 자신의 민족적 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기독교인들을 저 세상 끝까지 내보내시는 과정이다. 여기서 바나바란 사람이 나온다. 기독교인 일꾼의 제일 좋은 본이 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명령하는 위치가 아니라 직접 가서 사울을 대리고 온다. 거의 죽을 뻔하게 되서 멀리 다소까지 보내졌던 사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사울은 여기서 잊혀졌을수도 있다 그러나 바나바의 순종 (성경에서는 자세히 어떤 경과를 지나 바나바가 가게 되었다고 자세히는 나오지는 않는다) 으로 인해 사울이 나중에는 이름이 바뀌어 바울이 하나님에게 크나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바나바없이는 바울이 없다. 이 두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교회인 안디옥교회에서 일년이나 그 들을 가르치고 제일 처음 언급되는 기독교인이라 부림을 받는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게 된다.

우리의 삶속에 위기가 닥쳐올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믿음의 눈으로 보게하시고 불안과 어려움속에 초조해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믿음으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바나바 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직접 순종하여 주의 나라 이루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16日 (金)

행 11:1-18
유대땅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유대 기독교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거나 밥을 같이 먹지 않았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가이사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말하며 이방인도 성령님, 즉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는데 내가 누구라고 하나님의 일을 막겠는냐 하며 설명하니 그때야 다른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이제 이방인도 회계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인정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사상(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란 정신)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아담과의 언약 (창 3:15) 에서도 아브라함과의 언약 (창 12)에서도 암시된 모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뚜렸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 사이에서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당연한 것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듣고 나서야 인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 마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칭 잘 안다고 했던 바르세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무지하다고 말한 것이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의 단순함을 지루해한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 육신과 안목의 정욕으로 인해 더 흥미스럽고 자신의 물욕을 채우는 것을 추구한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는 높은 벽같은 것을 자신들이 만들어 뽐내고 다니는 것을 즐거워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고 그 들의 누룩같은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 즉 말씀 만을 가지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지않았다. 사소한 율법의 조항들을 가지고 따지며 자신들의 머리좋은 것을 밝히고 남들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즐기던 자기 도취증에 빠졌던 사람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말고도 더 자신들의 삶을 재미있게 하는 것을 우상삼아 사는 사람들이 만연하다. 그래서, 마음이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 앞에서 하품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만 찾아간다. 진리는 삶의 뒷자리도 아니고 등에 칼을 맞고 피흘리며 트렁크에 들어가 있어 온전히 외면당하는 시대이다. 저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의 물욕에 따라 살아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선물로 주신 시간과 물질들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주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바로 보고 느끼게 하시고 그 일에 동참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15日 (木)

행 10:34-48
베드로의 복음 선포:
“난 이제 하나님께서 편애하시며 사람을 외모(민족,사회위치,등)로 보시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하고 바른 것을 행하는 자를 받아주신다. 너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된 만유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강의 복음을 아노라. 요한이 세례를 하고 나서 갈릴리에서 시작해 온 유대 땅에서 일어난 일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함께하사 악한 영의 영향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등 선한 일을 행하였다. 유대인은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나와 다른 증인들은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음식까지 먹었노라. 우리에게 명하사 예수가 살아 있는자와 죽은 모든 자의 재판장으로 정한바 된 것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라하셨고 모든 선지자들 또한 그를 증언하되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베드로는 그들의 요청대로 몇 일 더 머물게 된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정체와 사역에 대한 선포를 말한다. 예수가 빠지면 복음이란 없다. 절대적으로 설교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 설교마다 예수님의 복음이 빠지면 과연 그 설교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강단인지 아니면 사람의 의견만을 담은 강단인지 의심해볼 여지가 있는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유대 종교적 관점에서는 매우 큰 것을 말하고 있다. 율법의 1/3 이 죄 사함과 관련있는 것들인데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서 요구되는 죄사함과 관련있는 것들, 즉, 성전, 제사장, 희생물, 그리고 희생에 요구되는 조항 들이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이 들은 성전이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매우 큰 상징물이다. 성전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으며 율법의 중요한 조항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복음이다. 복음은 사실상 여러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하나님의 영의 충만한 역사또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을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그들의 삶 전체가 180도 바뀌었었다. 그렇다, 복음을 통해 예수가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바로 깨닫게 되면 우리가 진정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을 알게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 하셨는지 알게 된다. 이 근본적인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예수 귀한 그 이름앞에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은혜의 하나님의 역사앞에 탕자처럼 돌아와 그 품에 안길 수 밖에 없다. 나를 힘들게만 하고 너무나도 멀리만 있던 하나님이 너무나 가슴벅차게 크신 사랑을 배푸는 아버지로 알게 되는 순간이다. 할렐루야!

安時: 2018年 2月 14日 (水)

행 10:17-33
베드로가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과 같이 가이사라로 가서 백부장 고낼료를 만난다. 베드로는 들어가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들도 깨끗하지 못하다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을 밝히고 (하나님께서 몇일 전에 보여주신 것)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대리고 오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선포하라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고 말했다.

율법상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히 선택받은 백성이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예로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상이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위한 것이면 흔한 것과 분리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해당될때는 거룩이란 표현이 사용된다. 유대인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선택된 백성. 그들이 무슨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찮고 마치 버려진 아이와 같은 백성을 선택하여 쓰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던 것. 유대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의 오류를 보고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매우 큰 노력을 했는데 이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구약의 613의 율법에 더 엄격한 기준을 마치 집에 둘러있는 높은 담 처럼 만들어 수천가지에 이르는 법률을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그런 인간들이 만든 조항들에 더 권위를 주기위해 제목을 Mishnah (구전율법) 이라고 하여 모세 오경이외에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지켜져온 것 처럼 포장을 하였고 이것은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한 전통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법전이다. 이렇게 엄격한 유대인들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 확신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따라간다.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He was teachable.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셨는지도 모른다. 제사장이나 바르세인이나 사두게인은 인간의 mishnah 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약의 말씀에 어긋나지않고 도리어 완성시키시는 복음의 말씀을 받아 드릴 수 있는 마음상태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They weren’t teachable. 자신의 편견, 버릇, 편향, 성격등에 어긋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는 배울 수 있는 마음인가 아니면 인간의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인가? 주님, 주의 말씀 앞에 그 어떤 것도 더 높이 올라가게 하지 마시고 저 또한 teachable 한 마음으로 가질 수 있게 인도하셔서 주의 고귀한 말씀의 빛으로 오늘 이 날의 길도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安時: 2018年 2月 13日 (火)

행 10:1-16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이 있었는데 그 는 불의 이웃을 돕고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환상 중에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그의 착한 행실과 기도가 하나님앞에 전달되어 기억되었다고 하며 욥바에 머므르고 있는 베드로를 대리고 오라고 명령한다. 다음 날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깨끗하지 않은 동물(돼지, 파충류, 새, 기타등등)까지 먹으라고 하신다.

 

백부장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10장 후에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자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를 봐서는 그는 그 시대 때 만연한 헬라또는 로마제국의 다신주의보다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받아드리고 그 에게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구제에 힘썼다는 것이 나온다. 이 또한 그냥 말로써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삶에서도 하나님의 믿음을 알 수 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백부장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이 아닌 온전한 은혜의 방식으로 그를 구원하시고자 하기 위해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음 날 베드로를 준비시키신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도 신앙을 실천하는 유대인들은 음식을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을 두어 먹는다. 금지된 음식들이 많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 하늘에서 먹으면 안되는 금지된 동물들을 내려 보내시고 먹으라고 지시하신다. 이 뜻의 풀이는 곧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 해 주신다. 구약의 율법은 모세오경에 수록되어 있으며 크게 3가지로 나눈다. 도덕법 (moral law), 시민법 (civil law), 그리고 의식법이다 (ceremonial law).  도덕법은 십계명에서 요약되고 있고, 시민법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해당되는 법, 그리고 의식법은 제사와 제사장 그리고 죄씻음과 관련된 율법에 해당된다. 레위기11장에서 깨끗지 못한 동물들에 대한 법이 나오는데 이것이 의식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되는 법. 시민법은 도덕법과 합쳐 현대 존제하는 인간의 모든 법의 기초와 원칙을 제공해주는 법의 원천지가 되지만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으로 인해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때 지성소의 성막이 찢어지므로 더 이상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것을 믿고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며 우리가 음식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온전히 예수가 이루신 공로를 통해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이를 기억하라고 예수님께서 성찬식으로 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신것들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있지 않지만 계속되는 사역과 여러 사도들을 통해 이것이 초기교회에서 거의 모두 다 드러나고 기독교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이해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은 이렇다. 백부장의 믿음이 하나님께 전달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는 그냥 종교적 행위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은혜를 배푸셨다. 그렇다 구약에서 부터 신약까지 모든 말씀들은 우리가 그냥 듣고 이해하고 끝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 실천되고 행하라고 있는 것들이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이고 지금 이날까지 그 전통이 살아있어 유대민족은 교육에 매우 열정이 크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삶에 적용하고 살아가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주님, 순종은 없고 머리만커져가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를 알아도 그것을 평생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12日 (月)

행 9 (지난 2일 + 오늘 분량)

사울은 사도들을 잡아 죽일 각오로 대제사장의 권위를 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하늘에서 큰 빛이 내려와 사울은 땅에 떨어지고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란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예수이며 도시로 가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듣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받는다. 사울과 동행했던 사람들도 소리를 들었으나 아무도 없었기에 다들 기이히 여기고 사울은 장님처럼 보지를 못해서 그들이 다메섹에 까지 인도해 주었다. 다메섹에서는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울의 눈을 다시 뜨게 하실려고 하나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사람이고 왜 마메섹에 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을 표했으나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택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아나니아는 순종하여 사울을 만나 기도해 주고 사울은 눈을 뜨고 세례를 받는다. // 사울은 다메섹에서 몇일동안 제자들과 시간을 보낸 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사울의 변화에 놀라며 시간이 지나며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일려고 계획하나 사울과 제자들은 이것을 미리알고 피해다닌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할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그를 아직 두려워하였으나 바나바란 제자가 그를 사도들에게 대려와 있었던 일을 설명하니 사울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헬라말하는 유대인들은 그와 토론하고 죽일려고 하자 제자들이 사울을 살리기 위해 멀리 보낸다.  이 동안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 된다. // 베드로 룻다에 가서 8년동안 중풍병으로 누워만 있던 애니아란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하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른다. 근처 마을에 있는 착한 일을 많이하는 다비다라는 그리스도인이 병으로 죽자 사람들이 베드로를 오라한다. 베드로는 와서 기도하자 죽은 다비다가 다시 일어나자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유명한 사울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없앨각오를 하며 다메섹으로 가지만 예수님은 사울이 상상하지도 않았던 계획이 있으셨고 사울은 그 때 주변 나라들을 다 복음화 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 사용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의 좁은 견해나 생각에 따른 것 과는 차원이 다른 계획이고 차원이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인간적인 논리로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등등 생각할 수 있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다 버리는 것 없이 하나님의 좋으신 뜻대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하시고 사용하신다.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달달 외우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눈을 뜨게 하시고 많은 교회에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 교회의 기반을 세우시게 하신 것이다. 바울과 같이 사용이 되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여러 다른 방법으로 그 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쓰신다. 요한, 베드로, 마태, 여러 사도들 다 각각 주어진 텔렌트대로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다. 베드로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아니면 누군가가 어떤 큰 지혜와 능력이 있어서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봐서는 하찮은 것 (대부분의 사도들은 무식한 어부들이었다) 낮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올려 쓰신다. 주위에 가까이 보이는 것들을 봐서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부터 쭉 아무런 큰 변화없이 자란 신앙인의 모습은 자신이 뭘 잘했는지 잘하는지 자랑하고 있는데 도리어 전에 하나님의 모르고 방탄했던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은혜로 자신을 용서하시고 받아 주셨는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를 보면서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는지… 주님, 오늘 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도하여 주시고 말씀의 빛으로 나의 앞길을 밝혀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9日 (金)

행 8:26-40

빌립은 주의 말씀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예언의 말씀에 나온 예수님을 전파하고 내시는 세례를 받고 기뻐하며 돌아갔다. 빌립의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하에 지역의 모든 마을에서 복음을 전한다.

 

빌립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에 깨어있었고 순종하였다. 그 순종으로 인해 멀리 있는 한 민족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드리는 매우 큰 역사의 한 작면이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안인들의 국한 되었던 복음의 전파 그러나 빌립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었으므로 복음이 이디오피아에 전해진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의 인격을 알고 영적으로 깨어있어 영적인것으로 바로 분별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깨닫게하시고 주의 역사하심에 동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安時: 2018年 2月 8日 (木)

행 8:4-25

예루살렘에서의 핍박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흩어져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고 그 중에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치유와 귀신을 쫓아낸다.  같은 성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시몬이라는 마술사도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놀라한다. 예루살렘의 교회의 사도들은 사마리아에서의 복음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다. 그때까지 세례만 받고 있었으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하므로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체험을 한다. 마술사 시몬은 이것을 보고 돈으로 능력을 살려고 한다. 돈을 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살려고하는 시몬의 바르지 않은 마음을 보고 베드로가 회개하지 않으면 돈과 함께 망을 것이라 경고한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한다.

 

여기 본문에서 복음의 역사가 어떤 어려움으로 인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근처도 가지 않았던 사마리아성으로 넘쳐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복음이 선포되고 병고침이 있고 악귀가 쫓김을 받는 사역에서 시몬이라는 마술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유행하는 마술. 훈련된 손이 눈보다 빠르다는 것을 이용해 사람들 앞에서 착시효과를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는 오락이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어떤 영적인 능력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몬은 많은 제자들도 있었던 것. 그런 사업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복음을 들은 시몬은 자신의 거짓된 삶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빌립을 따라 다닌다.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체험한 시몬, 그러나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그 능력을 전수 받을려고 하는 것을 보면 진정한 180도의 회개였는지 의심가는 여지가 남는다. 사실 그의 요청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이였다. 요청의 단어들만 봐서는 그리 크게 이상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좋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는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나 보다하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 사도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로서 시몬의 요청 뒤에 있는 마음을 읽었다. 세상의 맛을 본 시몬은 그 큰 능력을 위대한 술책으로 보고 자신이 전보다 더 위대해지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환상이 있었나보다. 그래서 베드로는 23절에 시몬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다라고 표현하며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고 경고한다. 시몬의 모습이 이 시대에서 다른 이를 눈속임하면서 진실되게 살 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 처럼 보이지만 아직까지도 세상의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육적인 욕심으로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생각해 가슴이 부풀어 오른 사람들의 모습. 주님 바르세인들처럼 시몬처럼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회개하게 하시고 주의 임재앞에 진실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7日 (水)

행 7:54-8:3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스데반이 구약을 이야기한 것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 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였다란 말을 하기위한 것인 것을 알고 그들은 화가나 이를 가를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것을 보개된다. 이를 말하니 종교지도자들을 스데반을 무력으로 도시 밖으로 끌어나가 돌로 쳐 죽인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와 같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며 죽는다. 이 때부터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의 교회들는 매우 큰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이 핍박을 앞장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울. 집집 마다 다니며 기독교인을 이 잡듯이 찾아네 옥에 가두는 일을 한다. 이 살벌한 사울이 나중에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바울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큰 죄나 작은 죄나 알고 있는 죄나 모르고 있는 죄, 털어보면 먼지 안나는 사람없다는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존제다. 죄가 밝혀졌을때 인간은 자연적으로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진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서 그는 부끄러움에 숨어버린다. 그 부끄러움은 강퍅해진 마음이 아니고 양심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면 아담의 자손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죄책감이라 한다. 이 죄책감은 마음의 안내자이다. 회계하라는 신호이다. 그 신호를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하던지 아니면 부인하고 악마의 편에 서는 것이다. 현시대에 와서 심리학과 사회학이란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둔 인간을 주제로 한 학문들은 이 중대한 신호를 무효화하는데 앞장서서 1960초반부터 인간을 비인격화 하는데 성공했고 우리는 그것을 전 세계적 사회의 매우 빠른 퇴보를 보며 지금에 이르러 왔다.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던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가인이 아벨을 돌로쳐 죽였고,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일려했던 이유를 보면은 다 교만에 눈이 가리워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시와 질투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에 반항에 살인자들로 변했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성스러운 존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 스데반이 구약을 읊으면서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난 그들의 죄. 구약은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이란 교훈의 거울로 우리의 죄를 나타내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반응 중에 이를 갈았다는 말이 나온다. 지옥을 표현할 때 이를 간다고 나온다.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지옥을 향하고 있다하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보좌옆에 예수를 보게 될때 그냥 홧김에 그를 끌어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그들이 예수에게 한 것처럼 역시 율법으로 따지면 처형할 수 있는 권리도 타당한 과정도 거치지 않고 맹수들 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버린다.  신성모독이라 이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무지는 여기에서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죄를 대면했을때 이들은 날뛰는 하이에나들로 변한다.  구약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간통과 살인을 언급하며 죄를 대면하게 했을때 다윗은 날뛰는 하이에나로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옷장같은 골방에 들어가 배옷을 입고 머리에 흙과 재를 뿌리며 몇날 몇일 동안 금식하며 통곡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피눈물이 되게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하였다. 회계를 한다고 해서 죄값을 치루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몇 세대를 걸쳐 심은대로 거두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렸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이라 불리지 않나 생각된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했으면 유대인들의 역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다. 주님, 성령님께서 죄를 인식하게 하시는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회계하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히 못할 죄가 없으면 다시 새롭게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무한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아무리 작은 죄라도 마음이 더 강퍅하게 부인하고 사탄 마귀의 유혹과 어둠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스데반처럼 죽음 맹렬한 순간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간것 처럼 이 하나 밖에 없는 삶또한 주만 따르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安時: 2018年 2月 6日 (火)

행 7:37-53

스데반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1) 모세는 이스라엘사람중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중재자의 역활을 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숭배를 한다. 하나님은 전의 선지자의 예언 처럼 그들이 계속해 우상을 섬기게 나두셨고 예언의 말씀대로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다.
(2) 다윗의 시대까지 성막에서 하나님의 예배가 이루어졌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건물에 자신의 임재가 국한되어 있지 않다라고 상기 시켰고 백성의 조상처럼 성령을 자꾸 반대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팍한다고 말했다. 오실 의로운자에 대한 예언을 한 사람들을 다 죽이기 까지했다. 그리고 당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배신하고 살해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특별히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역사속에서 비춰진 과거의 행적을 언급하며 스데반은 그 후손인 그 사람들을 향해 너희 아비가 예수님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인 것 처럼 예수님을 죽였다고 분명이 알려준다. 모세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눈 앞에서 체험하면서도 불평하고 불만하고 불신하고 우상을 섬기었다면 지금 과학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더 하면 더 했지 이런 시대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바울이 로마서 6장1절에 언급한 것 처럼 죄가 많을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랴 하고 반문한다. 이 세상이 그 때보다 더 나뻐진 세상이다. 더 거짓된것이 만연한 이 세상.  주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더 특별하고 귀중히 여겨야 하는 지 더 깨워 알게 하여 주소서.  모세는 입밖으로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다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또한 앞에 펼쳐지는 가관앞에서 낙담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시며 가실 길을 걸을 셨습니다.  주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버리고 불신한다해도 오리지 이 한 인생 주님을 향해 끝까지 불타게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