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時: 2018年 2月 20日 (火)

행 13:1-12
안디옥의 교인들이 예배와 금식을 하는 중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신 일을 위해 구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를 하고 보냈다. 실루기아와 구브로를 통해 살라미에 도착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이때 요한이 그들을 도왔다. 바보라는 곳에 도착했을때 서기오 바울이라는 지방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했으나 그와 같이 있던 마술사, 또는 거짓 선지자 바예수 자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반대하여 총독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성령에 충만했던 바울은 그를 똑바로 보고 다음을 말한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즉시 그는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 자신의 손을 잡고 인도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총독은 예수를 영접해 믿기 시작했고 이 기적을 보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워했다.

초기 교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힘을 쓰고 그런 중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교회란 단어는 헤라어 ecclesia 에서 오는 말이다, 즉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건물이 아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은 만인의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라 (이사야 56:7) 말씀을 하셨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마치 구약의 말씀을 알고 따라하는 듯 모일 때마다 같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면 같이 모여 예배하는 중에 잠깐 기도하는 것 빼고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특별 기도회가 아닌 이상 별로 기도를 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행정모임이나, 같이 먹는 친교모임, 아니면 어떤 강사를 듣는 집회 모임, 또는 교육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다 필요한 모임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뜻하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리라” 하는 모임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상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기도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볼일만 하거나 곧장 만날 사람과 대화를 하며 사람의 뜻을 이루어 가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장소로 보여지지 않을때가 있다. 사람들과 같이 모이면 수다만 떠는 것을 더 좋아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 모임의 제일 큰 목적은 같이 모여 기도하라고 있는 것이다. 교회서 성가대 모임, 성경공부 모임, 다 좋지만 모여 더 자주 기도를 같이 하고 그냥 성경 말씀을 돌아가 읽으며 선포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겠다.

바나바와 바울이 간 바보(Paphos)라는 곳에 사탄이 바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뜻은 ‘예수의 아들’, 로마(헬라)식 이름은 엘루마(Elymas)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 당 시대 발음은 예슈와 구약의 여호수아(예호슈아; 뜻: 구원의 하나님)란 이름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Yeho-shua = Ye-shua).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사람을 멀리할려고 하는 일을 볼 수 가 있다. 그는 직업은 마술사라고 소개된다. 옛 개역한글판에는 박수. 즉 고대시대에 흔히 점쟁이 (거짓 선지자)역활을 하면서 치유를 한답시고 무슨 주문을 외우거나 사람에게 약같은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말했다. 여기서 총독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총독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그를 장님으로 만들고 총독은 복음을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설교 들을 종합해 분석해 보면 돈과 물질에 대한 설교가 제일 많으시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란 메시지이시다. 창세기서 하나님은 물질을 다스리라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죄로 인해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서 창조의 질서가 깨진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에서 제일 많이 듣는 것이 자신들의 돈벌이 생활로 바뻐서라는 말이다.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노예.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것 처럼 그것이 당연히 사람살이의 이치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기까지하다. 마법사 엘루마가 당당했던 것 처럼. 헌금에 대해서 아나니아 부부처럼 그 자리에서 죽거나 엘루마처럼 장님이 되는 일이 많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특별히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 같다. 그러나, 죽이시고 장님이 되게 하지 않는다고 거만히 삶을 사는 사람들은 경고를 받고 회계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든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의 눈 앞에 펼쳐저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치 않은 것은 회계하게 하시고 삶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