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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유전공학

이미 할아버지 세대에서부터 받아 놓았던 축복에 대해 감사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속임수를 써 축복을 받을려고 했던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역으로 속임을 받게 되어 원하던 라헬을 먼저 얻기보다는 그녀의 언니였던 레아를 첫 아내로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임한 후의 야곱은 마치 열심히 일하는 소처럼 7년, 또 7년, 그리고 보상을 받으며 추가로 6년을 더 일해 20년의 세월을 일꾼으로 보낸다. 30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은 야곱의 유전공학이 흥미스러워 보인다. 앞장과 뒷장의 맥락을 보지 않고 읽으면 마치 야곱이 나무 가지를 사용해 얼룩진 새끼를 배게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28장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야곱이 어떤 고대 유전공학의 법칙을 이용해서 스스로에게 더 많은 양이 추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나무가지를 준비했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는 야곱의 행동에 대한 뚜렸한 이유나 설명없이 그렇게 했더니 야곱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더라고만 적혀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대 사회에서 미신적으로 행해졌던 것일 수 있으나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라고 해도 한 피조물이 새끼를 배어 어린 것을 나게 하는 것을 주관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부분은 일부러 겹치게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라헬의 임신에 대한 부분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같은 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무튼, 현대의 유전공학에 대한 발달로 좀 혼돈이 있는 것 같아 잠깐 언급해 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명령하신 것은 창 1:28에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조주가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지만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다. 다스리라는 명령 하에 포함되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다. 모든 생물안에는 유전자가 있다. 즉 유전자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부이며 그것을 유익한 목적으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질병, 죄로 인해 생기기 시작한 유전적 질병까지 유전공학을 사용해 퇴치할 수 있다란 말이 된다. 즉 치료나 치유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한 일이지만 마치 히틀러의 나치가 목적했던 것 처럼 무슨 수퍼 인간들이나 그냥 보기 좋은 인간들을 만들어 대다수를 통치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C. S. Lewis 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신론 유전공학자들이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꿈이 현실화 된다면 소수의 통치자들이 수십억의 인구를 통치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창조주같은 힘과 지혜을 얻었다고 믿고 바벨탑 꼭대기의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람과 태풍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심지어 영물까지 다스리시지만 자신을 내새우며 세상적 힘을 키우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에 자신의 진정한 신분이 나타날때를 기다리시며 치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치유한 것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까지 하신다. 그 어떤 유전 공학자보다 우리의 유전자를 잘 아시고 개개인의 코드를 하나 하나 다 외우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하신데 골무로 뜬 바닷물 만큼 밖에 모르는 우리는 마치 온 우주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과학이고 지식의 수준이다.

Ref: 창 29-30, 마 9:18-38

언약된 線上에서의 만남

미국에 오래 전 국민학교때 이민을 와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쟁사회에 대해 듣기로는 남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사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는 남이 잘 안되면 자신이 경쟁에서 유리하게 앞 설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미안해 하는 마음보다는 조금 더 욕심을 부추키는 마음을 키운다는 말을 들으며 개인적으로 나의 모국이 그런 상태라는 것에 대해 슬프기까지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의견이나 말로 한 국가를 페인트 칠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어느 인간 사회가 되었던 한 인간 사회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조차로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야곱의 이름 또한 발목을 잡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남이 잘되기를 기뻐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남보다 자신이 앞서야 하고 자신이 잘되어야 한다는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3대 언약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마치 부자들도 3대까지 가기 힘들다는 말이 있듯이 특별한 교육 지침을 따르지 않는 가정에서는 3대즈음에 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흐려지든지 아니면 없어지는 경우를 종종본다. 야곱이 태어날때는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이미 15년전에 죽어 없어진 상태였고 이삭과 리브가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3대에게 잘 전해졌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여러 보인다. 첫째로 어머니인 리브가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각이 아니다. 그녀의 의도가 야곱에게 거짓과 속임수를 통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을 나타난다. 왜 이삭이 자신의 축복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겼는지는 고대 시대의 말과 약속에 대한 절대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의 비극처럼 말로 뱉은 말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현대인들 처럼 쉽게 말을 하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 문서화 된 계약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기본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작은 약속이라도 중대히 여기고 어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들이 여러 있지만 구약 시대처럼 인간의 약속이나 말까지 현실과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보는 가치관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기 힘든 세계관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물로 만들어졌기에 그러한 가치관이 존재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의 바른 이해가 있었기에 그런 세계관이 가능했던 것이다.

야곱은 28:11에서 드디어 처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의 삶은 그 때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사람의 말을 따라 남의 발목을 붙잡고 남의 축복을 인간의 방법으로 취득할려고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임하고 부터는 타인에게 발목이 붙잡히는 대상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야곱의 삶의 진행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또한 삶이 바뀌는 것을 본다. 만난 사람마다 죄 사함을 받고, 앉은뱅이가 걷고, 아픈 사람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이 바뀐다. 예수님 또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살리시고, 거짓으로 살아가던 자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누릴려는 잘못된 인생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선상으로 인도하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오늘 날도 계속하신다.

Ref: 창 27-28, 마 9:1-17

관계에서 오는 순종의 우선순위

아브라함의 多妻 (창 25:1), 죽음 (9), 이스마엘의 번성 (12), 두 아들을 가진 리브가 (24), 장자의 명분을 한 식사로 판 에서 (32); 아내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거짓말을 한 이삭 (26:7), 그랄 목자들과의 분쟁 (20), 나타나셔서 언약의 확인 (24), 이방인도 인정하는 이삭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축복 (28), 이삭의 多妻 (34) / 모든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 (마 8:22); 모든 만물의 주 – 바람/날씨 (26), 영물 (32)

아브라함의 시대, 즉 고대 역사부터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초생자(初生者)의 권한, 장자 상속권(primogeniture)이었다. 아브라함의 시대를 지나 근 500년 후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장자가 받는 재산은 두 배가 된다는 것이있다. 즉 아들들이 4명 있으면 재산을 4등분하여, 첫째 아들이 2/4, 즉 총 재산의 1/2의 상속받게 되고 나머지 3명의 아들들은 각 총 재산의 1/2를 3등분하여 1/6를 상속받게 되는 것을 원칙으로 보면될 것이다. 한 곳에 땅을 소유하며 거주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경우 장자의 권한과 상속에 대한 것은 더 유연했을 것이다. 아무튼, 아주 오래전부터 장자가 모든 것을 상속했을 만큼 권한이 컸던 것을 보면 (아들이 두명일 경우, 두배란 100%를 뜻 하기도 함) 그 만큼의 물질적 가치가 있던 것이 확실하고 첫째로 태어나는 것도 축복으로 여겨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권한을 한끼의 식사로 바꾸는 에서를 보면은 나름 성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현실주의적이고 바로 앞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생존적 필요에만 더 충실한 에서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후회를 할지라도 자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당장 충족시켜야 하는 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1960년대에 스텐포드大에 있었던 마시멜로 실험이 생각난다. 어린아이 600명들에게 주어졌던 실험이었고 그들을 다음 40년 동안 추적 조사했었다.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먹지 말고 기다리면 또 하나의 마시멜로가 추가로 주어진다라고 약속을 하고 어른은 15분 동안 아이를 혼자 방에 두고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 600명 중 67%의 아이들 즉 400여명 정도의 아이들이 그 15분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는다. 그러나 두번째 마시멜로를 얻기 위해 기다렸던 아이들은 수십년 후 어른이 되어 기다리지 않았던 아이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란 결과를 보게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을 먹어야 하고 지금 당장 욕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은 삶이 계속해서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위로 향하는 목적도 없이 계속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즉석으로 해결해야 하고 바로 충족시켜야 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수 없다. 성령 충만한 삶의 징표도 마찬가지이다. 크게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기도하고 이 은사 저 은사 보여주는 것만이 성령 충만의 징표라고 잘못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산위의 경험들은 계곡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행되는 순종의 삶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목마르고 배고프더라도 바른 때를 기다릴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향해 성령의 뜻을 해아리고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신의 배를 위해 일하는 사람 육신의 것을 위해만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선순위이다.

장자의 권한이 컸다면 그 만큼 책임도 컸다. 부모가 죽으면 장래를 치르는 것은 오늘날도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도 부모가 죽었다고 하면 일꾼을 잡아두는 일은 없다. 당연히 가서 장래를 치루고 심지어는 위로의 말까지 전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은 이런 배경에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우선순위가 기반이 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기본이 되는 원칙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 친구, 모두 다 귀한 관계이지만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머니가 밖에 왔어도 일부러 그 들을 인정하고 안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형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매우 파격적인 발언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선순위를 강조하시는데 우리가 그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핑계가 어떻게 있을수 있겠는가?

중고등부 중학생 시절때 어느 고등학생 누님이 집에서 구타를 받으면서까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것이 기억이 난다. 눈옆에 멍이 들어있고 몸 여기 저기 구타당해 아파서 한 구석에서 울고 있어고 다른 자매들이 위로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면 혹독한 추위에서도 아버지가 집문을 열어주지 않아 친구집에서 밤을 지내고 그런 누님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한인의 정서로 보면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는 불효막심한 딸이다. 그렇게 맞아가면서까지 교회를 다닌지 2년 정도 되었을까? 같이 살던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철저하게 예수 믿기를 반대하고 거부했던 아버지, 어머니까지 교회를 누님과 같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다 예수믿는 식구들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딸은 남자쫓아 가족을 버리는가 하면 어느 딸은 주님쫓아 가족을 구원시킨다. 이 세상을 쫓는 자 당연히 세상과 같이 망하게 되고 주님을 쫓는 자 세상을 이겨 영생을 얻게 되어있다.

Ref: 창 25-26, 마 8:18-34

친절함이란 바탕위의 믿음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친척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리브가에게 간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창 15:2에서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자신의 종의 이름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면은 24장에 나오는 종이 엘리에셀일 확율이 높다. 아브라함의 집안의 사람들은 동쪽 끝 지방에서 파생된 사람들이고 다메섹은 서쪽지방의 사람이라 생김세도 다를 수 있겠다. 아무튼, 리브가는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배푼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타인을 위해 배려와 친절을 배푸는 인격이 갖춰진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샘이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자신의 하인을 위해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과거 노예제도 하에 있던 노예들이 무조건적으로 무슨 동물 처럼 학대만 받고 살아갔던 것 처럼 흑백논리로 세뇌받고 있는 현대이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평민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치우치지 않은 정상적인 관점이다. (성서적 질서보다는 평등주의를 더 중요시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 흑백논리를 이용해 주인/종 관계를 무슨 윤리적인 악으로 풀이하며 구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아무튼, 이 백부장도 인격이 갖춰진 주인으로서 자신의 하인의 문제에대해 주님께 고하는 것을 본다. 하인을 자신의 하찮은 소유물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을 베푸는 모습이다.

친절은 배푸는대로 돌아오게 되있다. 타인에게 친절하면 그 친절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하인같은 사람이라 할찌라도 인격을 갖춰 대하면 그것이 후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그러나, 타인을 비인간적으로, 하나의 소유물 처럼 대하면 꼭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기본도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익숙하고 친밀해질수록 더욱 禮를 갖춰 대하는 것이 理이다. 인격이 덜 된 사람일수록 처음보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익숙해지면 無禮로 대하게된다. 아무리 작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소중한 인간이다. 아무리 가치관이 꺼꾸로된 세상이라 해도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소중히 여기고 禮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

Ref: 창 24, 마 8:1-17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 7:21

30여년전에 섬겼던 한 교회의 목사님은 한국 신학대 총장의 아들로서 호주에서 목회하다가 버지니아에 와서 목회를 하는 중이었다. 그 목사님이 언급했던 Søren Kierkegaard 의 책 Fear & Trembling 을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은 매우 자주 언급한다. 실존주의적인 철학적인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리고 모리아 산에 가는 과정을 한 개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관찰되는 아브라함은 단순명료한 순종의 모습만 보인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마음이 어떠할지 실존주의적 해석등 여러가지 관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따라하는 그 행함에 포인트가 있다. 순종이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경로는 요나의 삶에 보였던 것 처럼 불순종함의 징표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누구시인줄 바로 알고 그의 말씀을 바로 파악했다면 일단 순종이 결단된 후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철학적인 관점의 가치에 부여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에서도 보이듯 그리 성서적인 관점과 실질적인 믿음의 삶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실존주의적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인 목사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면 마치 Azusa 부흥 전의 기독교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던것으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Vineyard movement 나 Pentecostalism 등 예배 동안의 체험을 강조했던 여러 기류에 대해 그들의 열매를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여부를 제공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들의 열매를 보아라.

마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께서도 같은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오늘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많지만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에서만 오는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두 사람 다 말씀을 귀로 듣지만 순종하는 자만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 처럼, 모두다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있고 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말하고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싸구려 신앙이되니 교회 다니는 것을 무슨 사치품 하나 구입해 놓은 것 처럼 구원을 받아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되어 버렸다. 열매없는 것에 대해 탄식하거나 죄를 밥먹듯이 지며 살아도 회계없는 신앙 소비자들만 많아진 세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내 한 마음만 편하면 만사 오케이하며 살아간다. 구약에서 네 다섯 시간동안 피비린내나는 번제물 앞에서 예배를 드린 이스라엘인이 아니더라도 주일 1시간을 드리는 예배가 최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사이로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f: 창 22-23, 마 7:15-29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구제 –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기도 –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금식 –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보물 – 마 6:20, ” 하늘에 쌓아 두라”; 삶 –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갈래의 길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더 풍성해 보이는 지상낙원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있는 천상낙원을 바라보았다. 롯의 지상낙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질서를 어기는 죄의 極의 징후인 동성연애가 만연한 곳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유황불로 타 없어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죄가 어느 정도 차면 그로 인한 결과는 순식간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았던 그의 딸들도 롯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지속성을 중시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보면 이미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의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 의식 세계를 점령했는지 알 수 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 땅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즉 초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인정 받을 수 있는 구제가 필요한 것은 구제의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영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기위한 구제 사업은 구제를 하는 사람의 명성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지 진정 구제가 필요한 대상을 위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주제 측의 어려운 희생이 요구가 된다 하거나 명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제 대상의 필요와 상관없이 쉽게 구제가 단절되는 것을 본다. 진정한 구제 같은 구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 희생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그 아무도 희생의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도와 금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도 않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타인들을 성공적으로 잘 속여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된 다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정신을 삶의 중심 가치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세상의 강력한 힘보다는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용하다. 그의 마음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것들은 육신을 위한 것 들보다 더 중요한 것에 있다.

창세기 -21장, 마태복음 -7:14의 묵상

Get a Biblical life

Instead of another happy new year, please, please get a Biblical life this New Year.

If you believe the Word of God to be the highest authority, the world, including those within the church, will ridicule you for being bigoted, patriarchal, and even discriminatory, but living a Biblical life means that you follow the footsteps of Christ. The Church has, and should NEVER be a platform for preaching egalitarianism, women’s rights, social justice, or ANY OTHER agendas of this world. Only the Word of God is to be upheld as the RULE and the STANDARD for ALL Christians, and also proclaimed in churches. All other social consequences are mere byproducts of the Word of God. There is only ONE true version of Christianity, and that is a Biblical Christianity, just as our Lord Jesus Christ had believed and lived in accordance to the Word of God. Fakes are the pastors who has to give apologies for simply believing the Word of God as is, and those who claim to believe in the Word of God and yet deny its relevance and power in our own lives.

1 By the humility and gentleness of Christ, I appeal to you—I, Paul, who am “timid” when face to face with you, but “bold” toward you when away! 2 I beg you that when I come I may not have to be as bold as I expect to be toward some people who think that we live by the standards of this world. 3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 4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5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6 And we will be ready to punish every act of disobedience, once your obedience is complete. – 2 Corinthians 10:1-6

18 If the world hates you, keep in mind that it hated me first. 19 If you belonged to the world, it would love you as its own. As it is,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but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That is why the world hates you. 20 Remember what I told you: ‘A servant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a]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If they obeyed my teaching, they will obey yours also. 21 They will treat you this way because of my name, for they do not know the one who sent me. – John 15:18-21

어느 언어학 교수의 설명을 듣고…

글쎄… 지난 40여년 동안 본인 이름 하에 논문 하나 없는 사람이 콜롬비아 대학 교수였다고? 학계와 역사는 이상한 렌즈(Churchward의 무제국의 인간언어시發 이론을 기본으로 함)로 해석하고 자신만이 언어의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고 흔한 표절문제 때문에 그 마스터 키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러한 사고가 평생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의 태도란게 조금 非人間的이고 동국대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 치고는 弘益精神에 위반되는 것이니 아무리 설명을 해도 信賴가 가지 않고 오히려 학교 이름의 위상만 떨어뜨리는 것 같다. (e.g. Inca의 어원을 in (사람)+ca (태양) 나누어 태양의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inca는 Quechuan語로 왕족이란 뜻일뿐이다. 지금 중국어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어 Mandarin(中之宮臣) 의 어원과 비슷한 형태이다. 오히려 더 나은 설명으로 잉카의 태양신인 inti 의 ‘in’ 을 태양으로 설정했다면 모르나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은 사람人과 억지스러운 연결을 하기 위한 해석이라 밖에 설명이 안된다.) 보수적 신학으로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고 보수적인 교단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이 오랜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창조론을 부인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커녕 사람들이 만든 신화라 믿는 믿음없음을 신앙고백으로 삼으면서 표면적으로만 성서적 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학교를 판단하기는 조금 억지라고는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슬퍼하고 회계로 나가는 조짐이 안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들을 떠났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팔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뿐이다. 아무튼, 배움을 갈급해 하는 한국의 수만명이 이런 분을 따르고 있는 선생이라 하니 아쉬운 마음뿐이다.

마스터 키를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란 주장 또한 지금 온 세상을 휘덮고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급격히 발전해 (via Derrida, Foucault, Lyotard, Baudrillard, etc.) 서양에서 보이는 형태는 절대진리와 가치의 근거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전통파괴적형이 더 강조되고 있음.) 거의 모든 해석 자체도 주관적인 짜집기 식이니 訓詁學의 기본 조차도 무시하고 있다 (e.g. 산스크리트어와의 유사성은 불교경전의 번역으로 인한 어원에 대한 배경연구나 가능성에 대한 관심 자체가 두드러지게 빠져있다.) 성서해석학에서도 이런 사람이 어처구니 없이 많으니 (via 성서비평학의 Hase > Wellhausen, Budde, Eissfeldt, etc.) 어떻게 傲慢함으로 무너진 이런 학계의 기본 토대부터 바르게 잡을 수 있는지가 다음 일세기의 숙제이다. (e.g. 고고학: Mt. Ebal에서 발견된 Paleo-Hebrew form 이 페니키아어의 사용보다 더 오래되거나 또는 同時用된 것을 간주하면 메소포타미아文化發/바벨론發說을 기반으로 하는 비평적 고고학과 언어학의 교과서들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經驗主義에 입해 證據를 따라 해석한다고 하면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In his pocket

The rabbis advised:
keep two truths in your pocket,
one should read:
I am but dust and ashes
and the other should read:
the entire world was created for me

An 8-year-old has
something else in his pocket.

Confetti.

Why?

It’s his emergency confetti,
he says,
during these raw days
he carries it with him
everywhere
just in case
there is good news.

그의 주머니 속엔

라비들은 조언했다:
주머니에 두 가지 진실을 간직하라,
하나는 이렇게 적혀 있어야 한다:
나는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적혀 있어야 한다:
온 세상은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

8살짜리 아이의 주머니 속엔 다른 것이 있다.

컨페티.

왜?

그것은 비상 컨페티라고 그는 말한다,
이 험한 날들에
그는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어디를 가든지
그것을 가지고 다닌다.


聖書訓詁學

改新敎의 改革을 否認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今生人들만이 最高의 생각을 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것 마냥 傲慢함을 보이니 더 以上 숨을 쉬지 않는 祖上들이 남긴 글들은 外面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래서 現代 西洋의 hermeneutics 또는 exegetical studies 에서 아무런 疏도 없이 文法의 바른 理解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基本으로 하지만 다음 段階에서는 訓詁學을 適用하는 것도 必要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猶太人들의 聖書學의 基本的인 方法이기도 하다. 改新敎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이유는 不正한 解釋이 아우러져 獨自的이거나 個人的인 解釋들이 主流가 되며 亂舞하여지기 때문이다. 루터의 宣言文 “Here I Stand”는 훌륭했던 것이지만 時間과 같이 바뀌는 文化的 觀點을 통한 聖書解釋은 答보다 問題를 더 불러오고 있다. 基本的으로 過去를 尊重하며 나아가는 聖書訓詁學이 必要한 理由이다.

TIL 2023-11-13

기지국가론(基地国家論)이 바탕되는 인도태평양전략은 日의 전략판; 미중패권전쟁 (인태전략 > 첨단기술경쟁)

2010 Shock: Japan gave 2nd place in world economy to China; Senkaku

2012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일본은 극우로 탈바꿈 > 아베가 2012년말에 당선됨

Towards a more volitional ministry, rather than only-emotion ministry

The constant is the proclivity to win people to our point of view on metaphysical aspects of our faith that we hold dear rather than leading them to Christ.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calling is our own closeness to Christ, and thereby knowing where to lead others to. “You can’t make disciple of others without being a disciple yourself.” So, the commands of the Great Commission makes the prerequisite rather crystal clear. It’s given to someone who is already a disciple. Without following the footsteps of Christ, it can only be a confusing journey of halfhearted mediocrity.

As soon as Adam compromised on the word of God, everything fell apart. Just as we can’t even make the tiniest particle to split on our own, we can’t hold together what’s broken. It takes a miracle and God is more than capable of that. As Thomas a’Kempis reminds us, we must read His words humbly, simply, and honestly, and be cautious of being caught up in our greed of learning rather than obeying the words simply once the essential message is grasped.

Reflection on https://utmost.org/the-method-of-missions/ and TK I-IV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중고등부 사역 시절때 자주 불렀던 찬양 중 Steve Green 의 People Need the Lord 가 있었다. 절망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좋은 메시지이다. 실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해서 가는 것 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가사가 더 주님의 사역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주님의 사역에서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전제하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님의 감정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에는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는 정도이지 그것이 주님의 사역을 특징짓는 구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나는 순종할 뿐이란 사역이 중심을 이룬다. 사도들을 보내실 때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가라고 하셨지 측은지심으로 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라는 어떤 인간의 깊은 감정에 호소하시는 말씀은 전혀 없다. 밀물처럼 등락달락 거리는 인간의 감정을 따라 가는 사역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포장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사람들과의 의견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르치지 말라고 말하고 심지어 사역자체에서도 그것이 반영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보다 인간의 감정을 따르는 사역은 이미 죽은 사역이고 하나님의 관점보다 인간의 관점을 더 중요히 여기는 잘못된 사역이다.


Just as Father had sent me

There’s a praise song called People Need the Lord by Steve Green which I had sung often as a youth pastor. It has a good message of the fact that we need to reach out to people who are in despair and lost. However, the message that we are go to people because of God’s command is probably closer to the Lord’s ministry than the one that focuses on the needs of people. Even though there was no direct mention of the need of people in Lord’s ministry, it is one that is generally assumed in the background. When it comes to appeal to emotion, the gospels only go as far as mentioning that Jesus had compassion on people, but that does not characterize his ministry as a whole. Jesus merely mentions that he is only doing what he does because God had sent him and that God had commanded him and not much more. When Jesus sends his disciples out he tells them that he is sending them just as God had sent him, not because they ought to feel deep compassion for the lost people and fill their needs. There is no profound appeal to emotion that rises from compassion. Is there a greater sin than packaging one’s ministry as being led by the Spirit when it is merely obeying the ebb and flow of one’s own emotional states?

Sometimes, I see some saying you shouldn’t try to teach people in order to avoid some conflicts of opinion, and that is also reflected in the ministry as well. The ministry that puts people’s emotions above the command to teach that everything Jesus had taught is already a dead ministry, and a wrongheaded one for sure if it values the opinions of men above God’s.

Reflection from https://utmost.org/classic/what-is-a-missionary-classic/

모스트모던 시대의 모임

(序文: 요즘 학계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現代에 맞춰진 정치문화적 요구에 반영되는 재건주의적 가치관에 기반을 둔 것들이 많고 인간 역사 대대로 내려온 것들의 충분한 이해와 지속성의 필요성은 시야에서 없어진지는 근 70여년이 되고 있는 現時代精神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과거와 맥을 이루는 관점을 제시한다.) 여자의 조언을 따르거나 여성적 인도자는 최대한 의견의 충돌을 줄이는 방향을 잡는다. 여성적인 성격은 근본적으로 감정적 충돌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집단 나르시시즘의 요소가 강해서 상대를 타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벽 밖에서 만들어지는 그 어떤한 견해는 벽안의 가족들과만 화평하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우물과 같은 조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은 그릇이 작은 것과 비교되어 왔던 것이다. 인도자의 역활은 기본적으로 의견의 충돌을 회피하는게 아니고 충분히 양면의 의견을 이해하고 가운데서 만날 수 있게 돕는 역활이다. 자신이 그 대화의 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해야하며 기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충분히 열린 대화의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렇게까지 확고한 의견이라면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하는데 사람을 설득시키는 방법의 첫 단계는 먼저 충분히 이해하고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받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에 있다. 이 또한 쉽게 어떤 얕은 수단으로만 이해하고 실행한다면 인간적인 기본이 미숙한 사람이라고 봐야겠다. 교회라는 배경안에서는 여성적 인도자는 아주 간단하고 제일 강력한 회피 전략으로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면 천사 자신의 마음에 안들면 악마로 만들어 버리는 전략이 비일비재하니 교회가 계속 세속의 단체들보다 못한다 말을 듣는 것이다. 남성적인 인도자는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되 상대가 자신의 의견이 존중을 받았다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 부족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상당히 높은 이상을 품고 있다하더라도 제일 먼저 더 높이 계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첫 단계이고 그 다음은 사람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에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확고한데 인간의 다른 의견과 생각을 두려워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개인적인 의견이 옳다 생각되면 그 만큼 상대방의 다른 의견을 통해 더 완성도 있는 의견으로 다져지거나 바뀌어지거나 확인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충분한 검토와 생각이 뒷밭침되는 의견은 강하게 내세워야 할 책임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충돌이 있으면 잘 이겨나가면 된다. 옹알이도 충분히 들어주다보면 이해하는 경지까지 갈 수 있다.

어느 회의라든지 모임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극적인 표현은 하지 않는다.
  2. 상대방 생각을 다 아는 것 처럼 말하지 않는다.
  3.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4. “나” 아니면 “제 생각으로는” 라는 단어를 더 많이쓰고 상대방의 헛점이나 잘못된 것은 가능한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구분화 시켜서 확실하고 자세히 지적한다.
  5. 용건이 있으면 종합적으로 말하지 말고 상세히 말한다.
  6. 참을성있게 상대가 무엇을 길게 말해도 끝까지 듣고 더 듣고 싶다는 인상을 남겨주어야 한다.
  7. 어떠한 불평이라도 방어적 태세를 취하지 않고 들어준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해 주는 최소한의 방법이고 내용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포스트모던 가치관에서는 개인의 감정이 어떤 사실의 절대성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잘못된 가치관이지만 미성숙한 사람이 더 많아진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모임진행법으로 생각된다.
  8. 모임을 인도하거나 사회를 본다면 중립을 유지하고 안건을 내지 않고 오로지 사회와 중재에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회자의 말은 자동으로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안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동일한 무게의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평한 제의라는 감정과 의견이 고체되기 쉬워지고 분열이 나온 안건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만은 더 증가할 수 밖에 없어진다.

TIL 2023-10-09

世는 숫자 30을 의미하는 卅에 가로 휙 둘을 더하면 세대를 의미하는 세 자가 된다. 고대에서도 대략 30이면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いくつかの日本食堂では週末だけ割引メニューがある。 週末と平日の区分をしっかり知って食堂に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

TIL 2023-10-08

The presider of the meeting should not be impatient, and better to restrict to only to moderate so that the attendees could be attentive to the speaker, who should be the only one speaking.

Oscar Wilde’s most famous works were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1), Lady Windermere’s Fan (1892) and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1895).

People typically have strong affinity for the institutional names that have passed down regardless of literal, semantic significance, rationale, and relevance.

TIL 2023-10-07

Mohamed Ghassen Nouira of Tunisia restored the ancient purple from oysters. It used to be called Tyrian Purple after the city of Tyre.

Japanese, Momotaro denims is handmade from real indigo and usually costs over $300 as of 2023. https://momotaro-jeans.com/

Damascus steel can made by folding steel over 1,500 or 3,000 times. Real ones cost at least $1,000. Cheaper counterfeits imprint on a regular steel and they can cost under $100.

Eggs has a highest quality protein and provides all kinds of nutrients that are missing in other friends.

37년만에 아시안게임에서 양궁 임시현 선수 3관왕

13년만에 역도 금메달, 박혜정, 인상 125kg, 용상 169kg, 합계 294kg

In the old days, sailors used to get scurvies due to the lack of vitamin C in their diets.

(Note: TIL = Today I Learned)

멋있게 꾸며온 포장

많은 역경을 이겨내어 왔다고 하는 이들의 말은 자신이 그렇게 비춰지고 싶어하는 포장일 뿐 그 속엔 진실이 아닌 것들로 득실거린다. 남에게 마치 훌륭한 사람인양 멋있는 사람인양 보이기위한 포장일뿐이다. 인생이란 바르게 살면 살수록 단순한 것이고 자신의 정욕(欲)을 따라 산 인생일수록 복잡한 인생으로 꼬이게 된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냥 인간이면 당연히 해야할 것을 한 것 뿐이라고 여기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한 사람은 꾸며낸 것을 말해주는데에 급급하다. 당연한 길을 걸은 사람과 자신의 잘못으로 아쉬움과 후회만 날리던 길을 걸은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인것이다. 긴 여정인데 자신의 잘못은 없고 다 누구 누구의 잘못으로 인생이 꼬였다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시초부터 진실하지 않을 확율이 크다. 소설에서나 피 터지는 전장속의 진정한 영웅이 있지 현실 세계에서의 진정한 영웅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꺼져가는 불 하나 지켜 나간 사람들 뿐이다.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튼 보든 말든 바른 길을 나간 사람들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누구나 있다. 그런 피해라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어 냈으리라 생각하고 당연한 자세로 극복해나간다. 그러나 거짓으로 포장되고 속이 비어있는 사람일수록 남에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풀어낸다. 포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에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부지런하다. 타인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굴곡을 겪었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그냥 소설 하나 들은 듯 들어주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길 밖에 없어보인다.

목숨을 다해도…

목숨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승리와 승리를 거둔 다윗 왕.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지만 그가 성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하였다. 그가 진정히 위대한 이유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대단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않고 벌거벗은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두리하나의 천기원 목사가 있다. 아시아의 쉰들러라고 불리며 목숨을 다해 천여명에 달하는 사람들, 특히 여인들과 여자아이들의 탈북을 도와준 인물이다. 그러나, 10여년전부터 이상한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성폭행으로 고소를 받고 고소를 한 탈북 여인의 오빠는 자살까지 한다. 당연히 천 목사는 목숨을 다해 부인해오고 있다.

여기 남서부 지역에 까지 탈북 여자 아이들을 대리고 와서 교회를 방문을 했었다. 식당에 가서 같이 점심을 했는데 상당히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등학생 즈음 되는 여자아이가 와서 목사님의 어깨를 마사지 해주더니 천 목사가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감싸 안아 주는 광경이었다. 내 딸아이였으면 당장 일어나 아이 손을 잡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고 이상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세 딸의 아버지로 나의 딸이 그 어떤 목사라 하는 사람이 저렇게 대한다면… 이라는 생각에 나는 상당히 불쾌해서 인터넷에서 조금 찾아봤다. 전에 성폭행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후 교회 두 대표 장로님들에게도 알려드렸다. 최소한 나의 교회에서는 직접적으로 도와 주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20여년 전도사들과 목사들 사이에 끼어 일하며 여러가지를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여자아이들을 대할 때는 악수조차 하지 않고 신체를 가까이서 만지지도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사역을 담당해 왔었다. 어떻게 그 탈북 아이들을 보호할 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담임 목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목사라고 하고 나중엔 심지어 원래 사람들을 잘 만지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며 추호도 성적인 의도가 없다고 말하는데 또 순진한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목사에다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변호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에 또 뉴스에 올랐다. 이번엔 그냥 작은 신문이 아니라 KBS 9시 뉴스. 아이들의 증언가 주변의 여러사람들의 증언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담임 목사는 자신이 직접 천 목사와 통화해 그런게 아니며 천 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고 있다.

그렇게 먼 옛날이 아닌 90년까지만 해도 미국 경찰들 중에 Blue Wall of Silence 란 것이 있다. 경찰들끼리는 아무리 무엇으로 잘못해도 모른 체 해주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법원에서 까지도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파랑색의 침묵의 벽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 목사들 사이에도 이런 것이 있어 보인다.

‘탈북자 지원단체 대표가 탈북여성 性 폭행’파문 확산 – sundayjournalusa

https://youtu.be/qh6QsAZaDGA?si=jzoCkYvpt8QQwRrc

https://youtu.be/eyzNSSFwslA?si=LD9kCoiWMMl5bbQV

https://youtu.be/CtWKjISmjKY?si=4HSyqZmkKIFT1zJy

https://youtu.be/AzrOPQDGcgo?si=sfYnunmkWB0zaSfR

If we confess our sins

Whenever Japanese students, pastor, or church members visit Korea Pastor Kozo Yoshida (吉田耕三•79) of Seoul Japanese Church (in Seoul, Korea) always take them to places like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Seodaemun Prison, Tapgol Park, and Jeam-ri Church where Korean Christians were massacred by the Japanese soldiers. When Japanese people ask to go to Gyeongbokgung Palace, Insa-dong, or other landmarks more popular with tourists, he always suggests that they stop by a place like Tapgol Park briefly. If possible, he arranges for students from Japan to meet face-to-face with comfort women who are now in their 80s or 90s. “I’m sorry that the grandmothers remind you of old pain, but there is no better education than to tell your peers what they’ve been through.” Through this process, it is said that there were some Japanese students who said, “From now on, I want to serve Koreans and Asians because my perception of history and outlook on life have changed.”

“Only when you know, you can repent and apologize. The reason Japan does not sincerely acknowledge and apologize is because it is ignorant. It is because the people, politicians, and government officials are equally ignorant.”

Since September 1981, Pastor Yoshida has been carrying out the ministry of apology and reconciliation for 40 years. Shintaro Ishihara, the governor of Tokyo, wrote letters to scold Japanese politicians and ministers who made absurd remarks, and wrote articles criticizing Japan in leading newspapers such as Asahi and Mainichi.

If we say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 John 1:8-9)

한국 내 일본인 교회인 ‘서울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吉田耕三•79) 목사는 일본인 학생방문단이나 목회자, 신도들이 한국에 오면 꼭 데리고 가는 곳이 있다.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일제의 기독교인 학살이 있었던 제암리교회 같은 곳이다. 일본인들이 경복궁이나 인사동에 가자고 하면 “잠깐만 탑골공원 들렀다 가자”며 ‘꼬셔서’ 데려간다. 가능하면 일본에서 온 학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와 직접 만나도록 주선한다. “할머니들이 옛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죄송하지만, 학생들 또래에 겪은 일을 들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 인식과 인생관이 바뀌어 한국과 아시아분들을 섬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일본인 학생도 생겼다고한다.    

“알아야 회개도 하고, 사죄도 할 수 있어요. 일본이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도 위정자도 정부 당국자도 똑같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요시다 목사는 81년 9월부터 40년째 ‘사죄와 화해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일제 통치도 창씨개명도 한국인의 부탁을 받아서 한 것’이라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처럼 망언을 하는 일본 정치인이나 각료 등을 꾸짖는 편지를 써 보내고, 아사히、마이니치 등 유력신문사에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쓴 목사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1서1:8-9)

韓国内の日本人教会である「ソウル日本人教会」吉田耕三牧師(79)は、日本人学生訪問団や牧師、信徒たちが韓国に来たら必ず連れて行く所がある。 独立記念館、西大門刑務所、タプコル公園、日帝のキリスト教徒虐殺があった堤岩里教会のようなところだ。 日本人が景福宮や仁寺洞に行こうと言ったら「ちょっと待って、タプコル公園に寄って行こう」と言って「誘って」連れて行く。 できれば日本から来た学生たちは慰安婦さんと直接会うよう手配する。 「おばあさんたちが昔の苦痛を思い出させるのは申し訳ないが、学生たちと同じ年頃に体験したことを聞かせるより良い教育はないため」だ。 この過程を経て「歴史認識と人生観が変わり、韓国とアジアの方々に仕える仕事をしたい」という日本人学生もできたという。    

「知ってこそ悔い改めもして謝罪もできます。 日本が心から認めて謝罪しないのは「無知」だからです。 国民も為政者も政府当局者も同じように無知だからです」

吉田牧師は81年9月から40年間「謝罪と和解の牧会」をしている。 「日本統治も創氏改名も韓国人に頼まれてしたもの」という石原慎太郎東京都知事のように妄言を吐く日本の政治家や閣僚などを叱る手紙を書き、朝日、毎日など有力新聞社に日本を批判する文を書いた牧師だ。

万一私たちが罪なしすると自ら騙し、また真理が私たちの中に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 もし私たちが私たちの罪を自白すれば、私は憎くて毅然として私たちの罪を謝り、すべての不義から私たちをきれいにするでしょう。 (ヨハン1書1:8-9)

Like a tree planted by streams of water

Pioneer Lee Su-jeong, who first translated the New Testament Bible from Japanese to Korean, held a solemn baptism ceremony at the Nowol Orthodox Church (Current known as Shiba Church<芝敎會>) in Tokyo on April 29, 1883, with Pastor John Knox in the presence of Pastor Yasugawa after the baptismal dialogue. It is said that the missionaries and Japanese Christians were nervous about conducting the baptism ceremony for a person who will play the role of a Macedonian as a a pioneer of the Korean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t was the very first baptism of a Korean person in Japan.

The text below is of pioneer Lee Su-jeong’s confession of faith, which is currently on the lower floor of the birthplace of Niijima, the founder of Dojisha University (同志社大学), and the content has been translated from Japanese.


“The faith in God in the heart of a man is like a tree with healthy roots, and a tree without a heart of love and compassion is like withering roots.

A loving heart is like water, which enriches the roots, so even though the leaves fall in autumn and winter, the roots do not dry out. It is always like spring, budding and blossoming, and its leaves are luxuriant.

If you honor God and believe in the Word, flowers will bloom, and every tangled branch will be full of fruit. Its trunk is like a pine tree and a cypress tree, so even when snow and frost come it cannot wither it.”

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 is on me,
because the Lord has anointed me
to proclaim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to proclaim freedom for the captives
and release from darkness for the prisoners,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 Isaiah 61:1-2a

신약 일본어 성경을 한글 성경으로 처음 작성한 이수정선구자는 1883년4월29일 동경 노월정교회에서 존 낙스 목사의 입회하에 야스가와 목사가 세례문답후 장엄한 세례식이 진행 되었다. 일본에서 처음 베푸는 한국 사람의 세례식인 동시에 한국교회의 선구자가 되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역활을 할 사람의 세례식을 진행하는데 선교사들과 일본기독교 신자 및 지도자들이 긴장했다고 전해지고있다.

이수정선구자의 신앙고백의 유품이 동지사대학 창시자 니지마의 생가 아래층에 현재 있는데 그 내용을 한글로 해석한내용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사랑함과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그 나무 뿌리가 마름과 같도다.

사랑하는 마음은 물과 같아서 뿌리를 윤택하게 하나니 가을과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그 뿌리가 마르지 아니 하느니라. 항상 봄과 같아서 싹이 나고 꽃이 만발하여 그 잎이 무성하도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믿으면 꽃이 피고 얽히고 설킨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하니 그 깊음이 있고 심히 크고 달도다. 그 몸통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아서 눈과 서리가 와도 가히 시들게 하지 못하느니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4:18~19)

新約日本語聖書をハングル聖書として初めて作成したイ·スジョン選求者は1883年4月29日、東京老月正教会でジョン·ナックス牧師の入会の下、安川牧師が洗礼問答後、荘厳な洗礼式が行われた。 日本で初めて行う韓国人の洗礼式であると同時に、韓国教会の先駆者となるマゲドニア人の役割を果たす人の洗礼式を行うのに宣教師たちと日本キリスト教信者および指導者たちが緊張したと伝えられている。

イ·スジョン選求者の信仰告白の遺品が同志社大学創始者である新島の生家階下に現在あるが、その内容をハングルで解釈した内容だ。

「人に神様を信じる心があるのは木に根があるのと同じで、愛と哀れな心がなければその木の根が枯れるのと同じだ。

愛する心は水のようで根を潤すものだから、秋と冬に木の葉が落ちてもその根が乾かないからだ。 いつも春のようで芽が出て花が咲き乱れ、その葉が生い茂っている。

神様を敬い、言葉を信じれば花が咲いて絡み合った枝ごとに実がいっぱいなので、その深さがあり、ひどく月島だ。 その胴体は松とチョウセンマツの木のようで、雪と霜が降っても枯らすことができない。“

主の聖霊が私に臨んだのだから、これは貧しい者に福音を伝えようと私に油を注ぎ、私を送って捕虜になった者に自由を盲目の者に再び見るようにすることを伝播し、押された者を自由にし、主の恵みの年を伝播させようとすることである。 (ヌガ福音4:18~19)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m I a real Christian? Romans 8:9 reads, “You, however, are not in the realm of the flesh but are in the realm of the Spirit, if indeed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they do not belong to Christ.” And in v28, we read,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i]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1 Corinthians 13:13,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If someone were to ask me how much I know about Japan, I could use a watermelon for analogy. As a student, I saw the outside of the watermelon. I saw inside of the watermelon as a businessman, and then as a pastor inside a Japanese church denomination, I tasted the watermelon. But it still doesn’t mean that I know Japan very well. As someone had said, Japanese are like onions, where you keep peeling away only to find white and you end up feeling like you still don’t know the person very well. But Ephesians 2:20-22 reads,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In the same manner, I’m still a work-in-progress as a missionary who loves Japanese by the love and grace of God and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I earnestly pray that we all would be true worshipers of God, and as true Christians who help and cooperate to reach Japanese by the love and grace of God and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so that we will all experience the blessing of the dwelling place of God being built in Jesus Christ. Shalom.

이는 나는 진실한 크리스천인가? 라고 묻습니다. 로마서8장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장28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13장13절) 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일본을 얼마나 아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수박을 예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학시절에는 수박 겉을 보았습니다. 사업을 할 때에는 수박 속을 보았습니다. 일본기독교단에서 일본인들을 사역하면서는 수박 맛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을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일본인은 양파와 같아서 양파껍질을 벗겨도 하얀 것처럼 잘 모르겠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2장20절-22절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본인을 사랑하는 선교사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정한 예배 자로 진실한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본인을 사랑하며 협력하여 선교하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축복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샬롬

これは私は真実のクリスチャンなのか?と尋ねます。 ローマ書8章9節に「もしあなたたちの中に神様の霊が居れば、あなたたちが肉体におらず霊にいるから、誰でもキリストの霊がなければキリストの人ではなく。」と言います。 また、私たちが知っているはずの神を愛する者、すなわち彼の思い通りに呼ぶことを受けた者たちには、すべてが力を合わせて善を成す。(ローマ書8章28節)

つまり信頼、希望、愛の3つはいつもあるはずですが、その中で一番は愛だと。(コリント全書13章13節)。

あなたは日本をどれくらい知っているか?と聞かれたら、私はスイカを例に挙げることができます。 留学時代にはスイカの表面を見ました。 ビジネスをしているときはスイカの中身を見ました。 日本基督教団で日本人を使役しながらスイカの味見をしました。 だからといって日本をよく知っていると言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誰かが言ったように、日本人は玉ねぎと同じで玉ねぎの皮をむいても白いようによく分からないという結論です。 しかし、エヴェソ書2章20節-22節で「あなたたちは使徒と預言者たちの敷地の上に建てられたザラキリストイエスが自ら角石になった。 彼の中で建物ごとに連結して主の中で聖殿になって行き、君たちも聖霊の中で神様が住む場所になる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の中で一緒に建てられていく。」とおっしゃるように私は今日も神様の愛と恩恵と聖霊の助けで日本人を愛する宣教師として建てられています。

私たち皆が神様の愛で真の礼拝者として真のクリスチャンとして神様の愛と恩恵と聖霊の助けで日本人を愛し協力して宣教し、神様が住む場所になる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の中で建てられていく祝福が共にすることを切に祈ります。 シャローム

지랄맞은 현대 가족

아버지가 뭐를 같이 하자고 하면
따라 주지도 않고
지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다 따로 따로 인터넷 오디오 북을 듣든지
영상을 시청하든지
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하고
같이하는 것은 이빨 뽑는 듯 싫어하는데
무슨 얼어 죽을 공감대

이런 가족 안에서
서로 말을 듣고
따라주는 게 기적이지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 잠 14:1

True worshipers worship God in the Spirit and in truth

I consider the question of why do we need to evangelize to be the same as asking why do I have to worship God on a daily basis?

Don’t many people come to church to worship so they can receive something from God? Such as blessing, or mental or spiritual comfort? But a true worshipper does not worship God because he expects to receive something from God. Worship is one of giving to God and not of receiving.

Worship is a time when you meet with God. It is a glorious time for the saved children of the Lord to be encountering the living God. We worship God because God has saved us. We were destined to die as sinners, but God has saved us. God came to this earth in form of a servant to save us. He’s done such a marvelous thing and made an unimaginable sacrifice for us that the *least* we could do is to respond to such love and grace with the utmost of our lives and hearts. John 4:23-24 reads,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the Spirit and in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the Spirit and in truth.”

나는 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가? 하나님을 예배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앞에 엎드려 예배를 드리는 건가? 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정신적이고 영적인 위로를 받고자 사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며 예배를 드리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교회에 나와 예배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자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속 받은 주의 자녀들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그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23절-24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하십니다.

この質問は、「私はなぜ神様に礼拝をするのか? 神様を礼拝する理由は何か? 何のために毎日神様を敬拝し、その前に伏せて礼拝を捧げるのか?と尋ねるようなものだと思います。

多くの人が祝福を受けるために精神的で霊的な慰めを受けようと、実は私たちはほとんど何かを受けようと教会に出て礼拝をし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しかし、私たちが何かを受けようと教会に出て礼拝するなら、それは真の礼拝者ではありません。 礼拝は神様に捧げるものであって、受ける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

礼拝とは神様との出会いです。 生きている神様と拘束された主の子供たちとの栄光な出会いの時間です。 私たちが神様に礼拝する目的は、神様が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私たちは死ぬしかない罪人なのに救われました。 神様が鐘の形でこの地に来て私たちを救われる途方もないことを成し遂げられたので、私たちはその方に最上の価値を回しながらその愛と恩恵に答えるのです。 それでヨハネ福音書4章23節-24節に「父に本当に礼拝する者たちは霊と真理で礼拝する時が来るから、もうすぐこの時なので父は自分にこのように礼拝する者を探すのだ。 神様は霊であるから礼拝する者が霊と真理で礼拝するのだ」と言います。

Because God loved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Do you have the love of Jesus Christ? Are you a true worshipper? Can you say you are a true Christian? I ask these questions to myself who has lived in Japan for over 31 years (as of 2021), first as a student, then as a businessman, and now as a pastor and a missionary. Do I have the love of Christ? More precisely, I ask myself do I love the country of Japan, and its people with the love of Christ?

Even though I have received a lot of love and care from Japanese people, first as a student, then as a businessman, and then as a pastor, I could not reciprocate with a sincere love in Christ, because–I’m somewhat ashamed to admit this–of the painful history, and of the political issues that had caused misunderstanding, and thereby feeling socially ostracized as a Korean in Japan.

However, Romans 5:8 reads,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I was having such a hard time, feeling so inadequate, I was about to quit the ministry in Japan when God made me realize the meaning of cherry blossom (日本國花). If you look up the old kanji character for sakura (櫻) it means ‘mother protecting a child.’ God is protecting Japan, and in His time, God will use the remnan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 Romans 5:8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지? 진정한 예배자 인지?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요?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 사업가로, 교역자 선교사로 2021년 31년째을 맞이하며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더 정확하게 물어보면 나는 일본나라와 일본사람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가? 

일본에서의 유학생과 사업을 할 때와 사역자로서 많은 사랑을 일본사람들에게 받았지만 한국인으로 역사와 정치적 문제로 오해 받고 무시당하는 아픔도 있었기에 부끄럽지만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5장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힘들고 부족함을 느껴 일본선교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일본국화(日本國花) 벗 꽃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쿠라(櫻) 옛 한문을 찾아보면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보호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떼에 남은 자들을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5장8절)

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の愛があるのか? 本当の礼拝者なのか? 真実のクリスチャンだと堂々と言えるでしょうか? 日本で留学生として、ビジネスマンとして、交易者の宣教師として2021年31年目を迎え、自分に尋ねます。 私はイエス·キリストの愛があるのか? もっと正確に聞けば私は日本国と日本人をイエスキリストの愛で愛しているのか? 

日本での留学生と事業をする時と使役者として多くの愛を日本の人々に受けましたが、韓国人で歴史や政治的問題だと誤解され無視される痛みもあったので恥ずかしいですが、心からイエスキリストの愛で愛していますとは言えませんでした。 

しかし神様は「私たちがまだ罪人になった時に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ぬことで神様が私たちに対する自分の愛を確証した。」(ローマ書5章8節)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

とても大変で不足を感じて日本宣教をあきらめたかった時、神様は日本菊の桜の意味を悟らせました。 桜の昔の漢文を探してみると、「お母さんが赤ちゃんを守っている」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 神様が日本を保護していらっしゃるし、神様が神様の群れに残った者たちを使う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 

「私たちがまだ罪人になった時、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ぬことで神様が私たちに対する自分の愛を確証したのだ。」(ローマ書5章8節)


A passing thought on the nature of universe

In the satirical novel Flatland by Abbott, we were introduced to sentient beings in a two dimensional world. If a three dimensional, henceforth 3D, being had put his three fingers at that plane, those 2D beings would only see three lines and they would seem like they are moving independently if we wiggled our fingers randomly, but they, if sentient, would also conclude that the lines also move together as if they were a group when we moved our hands smoothly. This is also why nothing can be made secret to a 4D being, because, for example, a 2D sentient being would believe that hiding something behind a closed line, say a square, is secure, while the content is completely exposed to a 3D being. Imagine being able to experience past, present, and future simultaneously, and all of your thoughts exposed as if by a super mind-reading computer. A 4D being (we already are one, in a way) would be just that.

The quantum computer utilizes the entanglement property of quantum mechanics. Once two or more qubits are entangled a change in one would cause a simultaneous change in the other regardless of distance between them. This is a mere property of quantum mechanics, which is directly observable and we are now utilizing for practical purposes. It’s also a mere property of nature, because nature exists at a higher dimension, although our own experience is limited to three dimensional plane and we have yet to discover more quantum entanglements in nature. (It’s everywhere, it’s just that we don’t know which ones to pair together. IMHO, it’s much more closely entangled with multitudes of things in nature.) There was a paper, a couple of years ago, that hinted at this in photosynthesis, but we have a long way to go before we can understand this beyond just with photons. Photons tend to be much more predictable (with a better understanding of quantum mechanics,) and easier to experiment with.

The observable universe is probably a good sign of higher dimensions.

First off, the source of gravitational force is based in 4D or at a higher dimension, and that’s probably why physicists are having such a hard time unifying it with the rest of the forces in the current model. String theories try, and the math seems to point to 11D or even higher, which is another way to say that the source of fundamental forces in nature is much more complex that we can ever hope to imagine. The hubris of Enlightenment ideals is like a 2D being, having recently discovered a truth about nature, boasting about being able determine an arc simply by measuring the distance to each points of the line its seeing in front of it. We only know a thimble worth of ocean full of vast knowledge that is still far beyond us.

Secondly, more discoveries through the latest telescope in our orbit basically reaffirms the view that space is infinitely larger than we had ever imagined. This seems to be congruent with the multidimensional nature of the universe. It’s just another way of saying that infinity at the outer edge of visible universe is exactly what you would expect if the universe is merely a part of a higher dimension. Likewise, this probably means that galaxies we are able to observe are merely a complex unit of higher dimension not-yet-named-thing, if the source of gravity could be enumerated as such.

What does this all point to in my mind? If the biblical account of creation is correct, with no mumbo-jumbo of Deism or Theistic Uniformitarianism, then without paying any homage to the anthropic principle, the universe was created by God for us, so that we can glorify Him and enjoy His presence forever. You are wonderfully and fearfully created by Him. Enjoy the view of the heavens, created specially for us.

Neo-pagans worship their identities

But followers of Jesus worship God.

We’re in the full swing of neo-paganism where people worship their identities. In summary, ancient pagans worshipped wood or stone-made idols, whereas in our days, we worship our identities. Alan Bloom had raised warning lights for the U.S. back in 1980s, when African American studies, and other ethnic studies started to launch in higher education establishments across the U.S. The one directly experienced by Bloom himself was done by brute force at Cornell, in line with the ethos that had to the collapse of German universities by National Socialists several decades earlier. Soon after, likes of Thomas Sowell left Cornell. The same force that threatened academic freedom has begotten many more children since those pioneering decades. Akin to what had happened in Germany in 1930s, the words like “trigger warnings,” “safe spaces,” and “micro-aggressions” are thrown around as if they have any legal legitimacy to shut up any intellectually honest opinions, and if their demands aren’t met, they resort to violence. Until recently, I had no idea how invasive this disease was.

I was shocked to find a couple of my daughters in their late teens strongly identifying themselves as Koreans, almost as a foreign (to me) identity against the mainstream white culture. It isn’t even a true Korean identity, but a misshapen one unique to the US that derogatorily looks down on other Asians who are more assimilated to the US culture as being “white-washed” ?! Anyway, I could not understand why and how they’ve developed such ill-conceived notions about their own identity, and I was lucky enough to help correct for one, but with the pervasive nature of identity politics that have integrated into the US education system, I should have seen this coming earlier. They are taught that it’s all about their identity (however they have defined it themselves) and you can freely rebel against whatever you like in the name of pursuing that identity. You can apply that to being an Asian American, an African American, a lesbian, a trans-sexual, or whatever else you’d like to identify as, and that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your life and nothing else matters. This is what’s being taught to our own children nowadays. A thorough paganization of soul. Add a sprinkle of narcissism already pervasive with this generation on the top of this cake, and it’s hard not to ponder on this sublimity.

내 뒷마당은 안되유~

오랜 정치 파벌 싸움에 이용되어 지역갈등이 더 커진 것 처럼 정치화된 THAAD 때문에 주위에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이 많고 또 세계적 NIMBY 운동 확장세라 조용할 날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미국 연방 군사무기 연구소 바로 옆에서 산다. 도시를 남북으로 딱 잘라 남쪽 1/2의 크기가 다 공군기지와 함께한 연구소 땅이다. 동쪽으로 백두산 높이의 산자락이 있다. 동쪽에 있는 산자락 남쪽으로 등산을 하다 보면 가끔씩 무기 연구소 쪽의 황량한 벌판 지대에서 쿵 하는 저음의 소리와 함께 큰 하얀 연기가 땅 위로 올라온 후 검은 연기로 바뀌어 올라오는 것을 본다. 보통 도시에서는 들은 적은 없는 소리인데 많은 건물 때문에 자동 방음이 되는 것 같다. 산위에서는 들려왔던 소리. 등산하다 가끔씩 봐왔던 것은 지하 실험으로 인한 것들이다.

이렇게 대낮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 실험하고 있는 연구소이지만 여기 지역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반항도 없고 인체에 대한 어떤 위험이 있는지 따지는 사람도 없다. 물론 같이 일하는 분들 중에 부모가 과거에 북쪽에 있는 핵무기 연구 중 방사능 노출로 인해 암유발과 함께 돌아가신 분들도 몇 만났지만 여기 같은 동네에 있는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어떤 시민 항의가 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군사용 무기라서 특단의 비밀리 진행되는 연구가 대부분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산 남쪽에 올라가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지하 실험들… 핵무기와 관련된 연구도 진행된다는 것도 직접 연구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튼, THAAD 가 문제라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용하는 전화기를 먼저 문제삼아 없애야 할 것이다. 왜냐면 전화기에서 나오는 EMF 가 THAAD 100배가 넘기 때문이고 더 강력한 EMF 라서 (지속적이지는 않음) 몸 옆에서 신호가 떨어질 때마다 세포의 유전자를 붕괴한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THAAD 수준의 EMF가 문제라면 왜 TV, 라디오, 그리고 무수하게 많은 더 심각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EMF를 문제삼고 있지 않을까?? 정치인들의 유치하고 거짓된 선동과 그것을 대응하며 소비되는 신경, 돈, 시간, 인력이 낭비되고 있는게 아쉬울 뿐이다. ㅡ.ㅡ

The Cancer of Self-significance: Faux Spirtuality

One of the tales from Chaucer’s famous work is the tale of a Pardoner, who calls out to yorkels to come to him to purchase indulgences from him so that they could be absolved of sin. The sense of the spiritual superiority is not lost on him, and this fervor only grows to the height of his greed, thus the oft-repeated theme of the tale: radix malorum est cupiditas.

Although the innate need for self-significance seems as natural as hunger, I often find more signs of self-significance than Christ-significance among the leadership of the church. One salient example of this is often seen among Korean churches. To a certain extent, the why can be easily grasped, but it is often overlooked as a part of etiquette, probably to the dismay of the Head of the Church. It is often the wife of the pastor who typically sacrifice her adult years and beyond for the education and then leads into a lifetime of pastoral ministry. Her husband is the visible leadership, and wife is expected to take the assistive role to that ministry. If not in any active form, then a benign neutrality as a housekeeper. However, in the spiritual fervor of post-1970s revival in South Korea, the wife of a pastor lays claim to some spiritual power such as being able to read people’s mind, or see things that others can’t because God has gifted them with such abilities. Sometimes, they claim to have dreams which, for mysterious reason, becomes as authoritative as the Word of God, in a ministry setting. The pastor is often mute about this, however, such claim to spiritual power imbues his ministry with a veil of power that no lay member of the church can dare to challenge. Else they are immediately marked as being of the devil, and gradually casted out of the church. Unbeknownst to the believers, including the perpetuators themselves, the people being driven out are often people that are disliked by the pastor and his wife. This type of witch-hunting continues to this day in many of Korean and Korean American churches as far as I can tell.

The tradition of early morning prayer meeting, speaking in tongues, everyone praying out aloud all at the same time, and so on, are all marks of fervency of the spirit among Korean churches, however, it can also be a sign of faux religiosity that has no bearing on the true health of the church such as discipleship, biblical theology, evangelism, and so on. Rather, it probably masks more problems underneath that aren’t being addressed directly.

Why do so many K/KA churches allow this to continue? The cultural element of respecting authority is still very strong to the point where any challenge to the authority is seen as being of the devil. Divisiveness, although often warned by Paul, is strongly discouraged even at the cost of maintaining status quo that is toxic to the health of the church. Many problems remain unaddressed, unconfronted, and swept under the rug for the sake of the harmony of the church. The incompetence in leadership, and many failures at different levels are simply covered with the continued mediocrity of reluctant acceptance, labeled as being part of maturity, and verges on becoming a learned helplessness covered under the thin veil of positivism.

True, there is no perfect church, but false spirituality should not reign. The Word of God needs to be elucidated, and proclaimed in the walls of the church to weed out any darkness, especially that of the faux spirituality which clearly portends the lack of discipleship, and preaching of the transformative gospel grounded in the biblical 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