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Logos (λόγος)

理 is both far and near. The principle is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and it is there to be followed and acted upon.

관계에서 오는 순종의 우선순위

아브라함의 多妻 (창 25:1), 죽음 (9), 이스마엘의 번성 (12), 두 아들을 가진 리브가 (24), 장자의 명분을 한 식사로 판 에서 (32); 아내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거짓말을 한 이삭 (26:7), 그랄 목자들과의 분쟁 (20), 나타나셔서 언약의 확인 (24), 이방인도 인정하는 이삭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축복 (28), 이삭의 多妻 (34) / 모든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 (마 8:22); 모든 만물의 주 – 바람/날씨 (26), 영물 (32)

아브라함의 시대, 즉 고대 역사부터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초생자(初生者)의 권한, 장자 상속권(primogeniture)이었다. 아브라함의 시대를 지나 근 500년 후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장자가 받는 재산은 두 배가 된다는 것이있다. 즉 아들들이 4명 있으면 재산을 4등분하여, 첫째 아들이 2/4, 즉 총 재산의 1/2의 상속받게 되고 나머지 3명의 아들들은 각 총 재산의 1/2를 3등분하여 1/6를 상속받게 되는 것을 원칙으로 보면될 것이다. 한 곳에 땅을 소유하며 거주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경우 장자의 권한과 상속에 대한 것은 더 유연했을 것이다. 아무튼, 아주 오래전부터 장자가 모든 것을 상속했을 만큼 권한이 컸던 것을 보면 (아들이 두명일 경우, 두배란 100%를 뜻 하기도 함) 그 만큼의 물질적 가치가 있던 것이 확실하고 첫째로 태어나는 것도 축복으로 여겨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권한을 한끼의 식사로 바꾸는 에서를 보면은 나름 성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현실주의적이고 바로 앞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생존적 필요에만 더 충실한 에서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후회를 할지라도 자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당장 충족시켜야 하는 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1960년대에 스텐포드大에 있었던 마시멜로 실험이 생각난다. 어린아이 600명들에게 주어졌던 실험이었고 그들을 다음 40년 동안 추적 조사했었다.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먹지 말고 기다리면 또 하나의 마시멜로가 추가로 주어진다라고 약속을 하고 어른은 15분 동안 아이를 혼자 방에 두고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 600명 중 67%의 아이들 즉 400여명 정도의 아이들이 그 15분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는다. 그러나 두번째 마시멜로를 얻기 위해 기다렸던 아이들은 수십년 후 어른이 되어 기다리지 않았던 아이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란 결과를 보게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을 먹어야 하고 지금 당장 욕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은 삶이 계속해서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위로 향하는 목적도 없이 계속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즉석으로 해결해야 하고 바로 충족시켜야 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수 없다. 성령 충만한 삶의 징표도 마찬가지이다. 크게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기도하고 이 은사 저 은사 보여주는 것만이 성령 충만의 징표라고 잘못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산위의 경험들은 계곡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행되는 순종의 삶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목마르고 배고프더라도 바른 때를 기다릴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향해 성령의 뜻을 해아리고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신의 배를 위해 일하는 사람 육신의 것을 위해만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선순위이다.

장자의 권한이 컸다면 그 만큼 책임도 컸다. 부모가 죽으면 장래를 치르는 것은 오늘날도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도 부모가 죽었다고 하면 일꾼을 잡아두는 일은 없다. 당연히 가서 장래를 치루고 심지어는 위로의 말까지 전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은 이런 배경에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우선순위가 기반이 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기본이 되는 원칙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 친구, 모두 다 귀한 관계이지만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머니가 밖에 왔어도 일부러 그 들을 인정하고 안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형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매우 파격적인 발언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선순위를 강조하시는데 우리가 그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핑계가 어떻게 있을수 있겠는가?

중고등부 중학생 시절때 어느 고등학생 누님이 집에서 구타를 받으면서까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것이 기억이 난다. 눈옆에 멍이 들어있고 몸 여기 저기 구타당해 아파서 한 구석에서 울고 있어고 다른 자매들이 위로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면 혹독한 추위에서도 아버지가 집문을 열어주지 않아 친구집에서 밤을 지내고 그런 누님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한인의 정서로 보면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는 불효막심한 딸이다. 그렇게 맞아가면서까지 교회를 다닌지 2년 정도 되었을까? 같이 살던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철저하게 예수 믿기를 반대하고 거부했던 아버지, 어머니까지 교회를 누님과 같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다 예수믿는 식구들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딸은 남자쫓아 가족을 버리는가 하면 어느 딸은 주님쫓아 가족을 구원시킨다. 이 세상을 쫓는 자 당연히 세상과 같이 망하게 되고 주님을 쫓는 자 세상을 이겨 영생을 얻게 되어있다.

Ref: 창 25-26, 마 8:18-34

친절함이란 바탕위의 믿음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친척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리브가에게 간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창 15:2에서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자신의 종의 이름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면은 24장에 나오는 종이 엘리에셀일 확율이 높다. 아브라함의 집안의 사람들은 동쪽 끝 지방에서 파생된 사람들이고 다메섹은 서쪽지방의 사람이라 생김세도 다를 수 있겠다. 아무튼, 리브가는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배푼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타인을 위해 배려와 친절을 배푸는 인격이 갖춰진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샘이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자신의 하인을 위해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과거 노예제도 하에 있던 노예들이 무조건적으로 무슨 동물 처럼 학대만 받고 살아갔던 것 처럼 흑백논리로 세뇌받고 있는 현대이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평민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치우치지 않은 정상적인 관점이다. (성서적 질서보다는 평등주의를 더 중요시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 흑백논리를 이용해 주인/종 관계를 무슨 윤리적인 악으로 풀이하며 구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아무튼, 이 백부장도 인격이 갖춰진 주인으로서 자신의 하인의 문제에대해 주님께 고하는 것을 본다. 하인을 자신의 하찮은 소유물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을 베푸는 모습이다.

친절은 배푸는대로 돌아오게 되있다. 타인에게 친절하면 그 친절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하인같은 사람이라 할찌라도 인격을 갖춰 대하면 그것이 후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있다. 그러나, 타인을 비인간적으로, 하나의 소유물 처럼 대하면 꼭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기본도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익숙하고 친밀해질수록 더욱 禮를 갖춰 대하는 것이 理이다. 인격이 덜 된 사람일수록 처음보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익숙해지면 無禮로 대하게된다. 아무리 작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소중한 인간이다. 아무리 가치관이 꺼꾸로된 세상이라 해도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소중히 여기고 禮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

Ref: 창 24, 마 8:1-17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 7:21

30여년전에 섬겼던 한 교회의 목사님은 한국 신학대 총장의 아들로서 호주에서 목회하다가 버지니아에 와서 목회를 하는 중이었다. 그 목사님이 언급했던 Søren Kierkegaard 의 책 Fear & Trembling 을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은 매우 자주 언급한다. 실존주의적인 철학적인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리고 모리아 산에 가는 과정을 한 개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관찰되는 아브라함은 단순명료한 순종의 모습만 보인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마음이 어떠할지 실존주의적 해석등 여러가지 관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따라하는 그 행함에 포인트가 있다. 순종이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경로는 요나의 삶에 보였던 것 처럼 불순종함의 징표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누구시인줄 바로 알고 그의 말씀을 바로 파악했다면 일단 순종이 결단된 후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철학적인 관점의 가치에 부여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에서도 보이듯 그리 성서적인 관점과 실질적인 믿음의 삶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실존주의적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인 목사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면 마치 Azusa 부흥 전의 기독교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던것으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Vineyard movement 나 Pentecostalism 등 예배 동안의 체험을 강조했던 여러 기류에 대해 그들의 열매를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여부를 제공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들의 열매를 보아라.

마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께서도 같은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오늘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많지만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에서만 오는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두 사람 다 말씀을 귀로 듣지만 순종하는 자만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 처럼, 모두다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있고 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말하고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싸구려 신앙이되니 교회 다니는 것을 무슨 사치품 하나 구입해 놓은 것 처럼 구원을 받아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되어 버렸다. 열매없는 것에 대해 탄식하거나 죄를 밥먹듯이 지며 살아도 회계없는 신앙 소비자들만 많아진 세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내 한 마음만 편하면 만사 오케이하며 살아간다. 구약에서 네 다섯 시간동안 피비린내나는 번제물 앞에서 예배를 드린 이스라엘인이 아니더라도 주일 1시간을 드리는 예배가 최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사이로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f: 창 22-23, 마 7:15-29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구제 –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기도 –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금식 –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보물 – 마 6:20, ” 하늘에 쌓아 두라”; 삶 –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갈래의 길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더 풍성해 보이는 지상낙원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있는 천상낙원을 바라보았다. 롯의 지상낙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질서를 어기는 죄의 極의 징후인 동성연애가 만연한 곳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유황불로 타 없어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죄가 어느 정도 차면 그로 인한 결과는 순식간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았던 그의 딸들도 롯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지속성을 중시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보면 이미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의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 의식 세계를 점령했는지 알 수 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 땅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즉 초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인정 받을 수 있는 구제가 필요한 것은 구제의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영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보이기위한 구제 사업은 구제를 하는 사람의 명성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지 진정 구제가 필요한 대상을 위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주제 측의 어려운 희생이 요구가 된다 하거나 명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제 대상의 필요와 상관없이 쉽게 구제가 단절되는 것을 본다. 진정한 구제 같은 구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 희생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그 아무도 희생의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도와 금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도 않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타인들을 성공적으로 잘 속여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된 다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정신을 삶의 중심 가치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세상의 강력한 힘보다는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용하다. 그의 마음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것들은 육신을 위한 것 들보다 더 중요한 것에 있다.

창세기 -21장, 마태복음 -7:14의 묵상

Get a Biblical life

Instead of another happy new year, please, please get a Biblical life this New Year.

If you believe the Word of God to be the highest authority, the world, including those within the church, will ridicule you for being bigoted, patriarchal, and even discriminatory, but living a Biblical life means that you follow the footsteps of Christ. The Church has, and should NEVER be a platform for preaching egalitarianism, women’s rights, social justice, or ANY OTHER agendas of this world. Only the Word of God is to be upheld as the RULE and the STANDARD for ALL Christians, and also proclaimed in churches. All other social consequences are mere byproducts of the Word of God. There is only ONE true version of Christianity, and that is a Biblical Christianity, just as our Lord Jesus Christ had believed and lived in accordance to the Word of God. Fakes are the pastors who has to give apologies for simply believing the Word of God as is, and those who claim to believe in the Word of God and yet deny its relevance and power in our own lives.

1 By the humility and gentleness of Christ, I appeal to you—I, Paul, who am “timid” when face to face with you, but “bold” toward you when away! 2 I beg you that when I come I may not have to be as bold as I expect to be toward some people who think that we live by the standards of this world. 3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 4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5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6 And we will be ready to punish every act of disobedience, once your obedience is complete. – 2 Corinthians 10:1-6

18 If the world hates you, keep in mind that it hated me first. 19 If you belonged to the world, it would love you as its own. As it is,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but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That is why the world hates you. 20 Remember what I told you: ‘A servant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a]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If they obeyed my teaching, they will obey yours also. 21 They will treat you this way because of my name, for they do not know the one who sent me. – John 15:18-21

어느 언어학 교수의 설명을 듣고…

글쎄… 지난 40여년 동안 본인 이름 하에 논문 하나 없는 사람이 콜롬비아 대학 교수였다고? 학계와 역사는 이상한 렌즈(Churchward의 무제국의 인간언어시發 이론을 기본으로 함)로 해석하고 자신만이 언어의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고 흔한 표절문제 때문에 그 마스터 키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러한 사고가 평생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의 태도란게 조금 非人間的이고 동국대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 치고는 弘益精神에 위반되는 것이니 아무리 설명을 해도 信賴가 가지 않고 오히려 학교 이름의 위상만 떨어뜨리는 것 같다. (e.g. Inca의 어원을 in (사람)+ca (태양) 나누어 태양의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inca는 Quechuan語로 왕족이란 뜻일뿐이다. 지금 중국어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어 Mandarin(中之宮臣) 의 어원과 비슷한 형태이다. 오히려 더 나은 설명으로 잉카의 태양신인 inti 의 ‘in’ 을 태양으로 설정했다면 모르나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은 사람人과 억지스러운 연결을 하기 위한 해석이라 밖에 설명이 안된다.) 보수적 신학으로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고 보수적인 교단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이 오랜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창조론을 부인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커녕 사람들이 만든 신화라 믿는 믿음없음을 신앙고백으로 삼으면서 표면적으로만 성서적 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학교를 판단하기는 조금 억지라고는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슬퍼하고 회계로 나가는 조짐이 안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들을 떠났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팔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뿐이다. 아무튼, 배움을 갈급해 하는 한국의 수만명이 이런 분을 따르고 있는 선생이라 하니 아쉬운 마음뿐이다.

마스터 키를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란 주장 또한 지금 온 세상을 휘덮고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급격히 발전해 (via Derrida, Foucault, Lyotard, Baudrillard, etc.) 서양에서 보이는 형태는 절대진리와 가치의 근거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전통파괴적형이 더 강조되고 있음.) 거의 모든 해석 자체도 주관적인 짜집기 식이니 訓詁學의 기본 조차도 무시하고 있다 (e.g. 산스크리트어와의 유사성은 불교경전의 번역으로 인한 어원에 대한 배경연구나 가능성에 대한 관심 자체가 두드러지게 빠져있다.) 성서해석학에서도 이런 사람이 어처구니 없이 많으니 (via 성서비평학의 Hase > Wellhausen, Budde, Eissfeldt, etc.) 어떻게 傲慢함으로 무너진 이런 학계의 기본 토대부터 바르게 잡을 수 있는지가 다음 일세기의 숙제이다. (e.g. 고고학: Mt. Ebal에서 발견된 Paleo-Hebrew form 이 페니키아어의 사용보다 더 오래되거나 또는 同時用된 것을 간주하면 메소포타미아文化發/바벨론發說을 기반으로 하는 비평적 고고학과 언어학의 교과서들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經驗主義에 입해 證據를 따라 해석한다고 하면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聖書訓詁學

改新敎의 改革을 否認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今生人들만이 最高의 생각을 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것 마냥 傲慢함을 보이니 더 以上 숨을 쉬지 않는 祖上들이 남긴 글들은 外面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래서 現代 西洋의 hermeneutics 또는 exegetical studies 에서 아무런 疏도 없이 文法의 바른 理解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基本으로 하지만 다음 段階에서는 訓詁學을 適用하는 것도 必要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猶太人들의 聖書學의 基本的인 方法이기도 하다. 改新敎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이유는 不正한 解釋이 아우러져 獨自的이거나 個人的인 解釋들이 主流가 되며 亂舞하여지기 때문이다. 루터의 宣言文 “Here I Stand”는 훌륭했던 것이지만 時間과 같이 바뀌는 文化的 觀點을 통한 聖書解釋은 答보다 問題를 더 불러오고 있다. 基本的으로 過去를 尊重하며 나아가는 聖書訓詁學이 必要한 理由이다.

Towards a more volitional ministry, rather than only-emotion ministry

The constant is the proclivity to win people to our point of view on metaphysical aspects of our faith that we hold dear rather than leading them to Christ.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calling is our own closeness to Christ, and thereby knowing where to lead others to. “You can’t make disciple of others without being a disciple yourself.” So, the commands of the Great Commission makes the prerequisite rather crystal clear. It’s given to someone who is already a disciple. Without following the footsteps of Christ, it can only be a confusing journey of halfhearted mediocrity.

As soon as Adam compromised on the word of God, everything fell apart. Just as we can’t even make the tiniest particle to split on our own, we can’t hold together what’s broken. It takes a miracle and God is more than capable of that. As Thomas a’Kempis reminds us, we must read His words humbly, simply, and honestly, and be cautious of being caught up in our greed of learning rather than obeying the words simply once the essential message is grasped.

Reflection on https://utmost.org/the-method-of-missions/ and TK I-IV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중고등부 사역 시절때 자주 불렀던 찬양 중 Steve Green 의 People Need the Lord 가 있었다. 절망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좋은 메시지이다. 실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해서 가는 것 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가사가 더 주님의 사역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주님의 사역에서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전제하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님의 감정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에는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는 정도이지 그것이 주님의 사역을 특징짓는 구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나는 순종할 뿐이란 사역이 중심을 이룬다. 사도들을 보내실 때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가라고 하셨지 측은지심으로 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라는 어떤 인간의 깊은 감정에 호소하시는 말씀은 전혀 없다. 밀물처럼 등락달락 거리는 인간의 감정을 따라 가는 사역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포장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사람들과의 의견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르치지 말라고 말하고 심지어 사역자체에서도 그것이 반영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보다 인간의 감정을 따르는 사역은 이미 죽은 사역이고 하나님의 관점보다 인간의 관점을 더 중요히 여기는 잘못된 사역이다.


Just as Father had sent me

There’s a praise song called People Need the Lord by Steve Green which I had sung often as a youth pastor. It has a good message of the fact that we need to reach out to people who are in despair and lost. However, the message that we are go to people because of God’s command is probably closer to the Lord’s ministry than the one that focuses on the needs of people. Even though there was no direct mention of the need of people in Lord’s ministry, it is one that is generally assumed in the background. When it comes to appeal to emotion, the gospels only go as far as mentioning that Jesus had compassion on people, but that does not characterize his ministry as a whole. Jesus merely mentions that he is only doing what he does because God had sent him and that God had commanded him and not much more. When Jesus sends his disciples out he tells them that he is sending them just as God had sent him, not because they ought to feel deep compassion for the lost people and fill their needs. There is no profound appeal to emotion that rises from compassion. Is there a greater sin than packaging one’s ministry as being led by the Spirit when it is merely obeying the ebb and flow of one’s own emotional states?

Sometimes, I see some saying you shouldn’t try to teach people in order to avoid some conflicts of opinion, and that is also reflected in the ministry as well. The ministry that puts people’s emotions above the command to teach that everything Jesus had taught is already a dead ministry, and a wrongheaded one for sure if it values the opinions of men above God’s.

Reflection from https://utmost.org/classic/what-is-a-missionary-clas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