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 질서, 그리고 형평성과 평등의 차이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 하나님도 자신의 언약의 백성을 다른 백성들도 보다 더 사랑하였다. 현대에 와서 이런 정상적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비이성적인 만행으로 봐야하는 것이 옳다. 한 남자가 이 세상 모든 다른 여자들을 거부하고 한 여자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사랑하는 것이 부부관계이며 인간 사회의 제일 기본이 되는 관계인 것 처럼, 한 아버지가 여러 아이들 중 한 아이를 더 총애하는 것이나 여러 친구들 중 한 친구를 다른 친구들 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등 하나를 다른 것 보다 더 위에 두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이런 자연적 질서는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 보는 매우 평범한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가 어느 한 아이를 더 총애한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만 무엇을 해주고 다른 아이들을 외면한다면 이것까지 바른 것이라고 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총애하는 아이를 특별 대우를 해 줄수 있지만 다른 자식들에게의 아버지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인간 단체에서도 가능한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맞는 것이지만 자연적 질서는 그대로 적용된다. 당연히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봉급을 받게 되는 것이고 더 많은 일을 능력있게 소화해 내는 사람이 그 많큼의 댓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평등과 형평성의 차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허술한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자연 질서적 체계의 필요도 이해 못하고, 형평성과 평등의 차이의 필요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적으로만 평등을 외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無知의 極値의 시대이다. 동일하게 같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을 평등이라 할 수 있지 권리만 을 가지고 평등을 말하는 오류를 범하는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평등하게 대해주지 않아서 온 문제가 아니라 이브가 하나님을 넘어서고 싶었을때 부터,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부터가 문제였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가 촛점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아벨의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에만 촛점이 가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비교했을때 왜 나는 그 만큼 축복받지 못했는 가에 촛점이 부여되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하자. 시기라고 하자. 질투라고 하자.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다른 아들들은 가인과 같이 시기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을 본다. 이것이 더 커지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듯이 이 아들들도 같은 마음을 품게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적 질서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그저 평등만 외치는 오늘 날의 사람들의 아우성과 같은 맥이다. 자연적 질서를 무슨 변태적 악으로 수정하고 역사적 형평성의 문제들을 평등의 문제로 수정하여 기형적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마구 괴변과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행동한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바르세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보고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자신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같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심지어는 치유의 역사와 여러 기적을 행하는 것을 옆에서 보며 가인의 후손인 것을 확인시켜준다. 요셉의 형제들 처럼 그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며 성장해 가기 시작하는 시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오로지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우리 마음에 내키는 데로 간다면 우리 모두 다 가인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질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존중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한다면 아벨 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등만 외치는 가인은 되지 말아라.

Ref: 창 36-37, 마 1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