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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더 귀해지는 친구

이호선 교수의 세바시 비디오를 보고 나름 생각해 본다.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에 시공간을 같이 지내며 가까웠던 친구는 버리지 말고 더 자주 연락하면 지내야 하며 만나면 싫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현제의 친구들, 즉 회사에서, 클럽에서,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미래를 같이 만들어갈 친구들이라 내 주머니에 현금과 같은 사람들이고 미래의 친구들은 과거와 현제의 친구들을 통해 만들어져가는 귀한 인맥들이 된다고 한다.

나이들어 사귀는 친구들과 사진을 많이 찍으라고 한다. 초청을 받으면 항상 받아드리고 가라는 것. 배려, 동정, 공유,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청에 수락하는 것들이 좋은 친구의 특징들. 그리고, 어디 여행을 가게 되면 비록 그 장소에 가까운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고 지나간다라고 소식을 꼭 전해 주어야 한다. 만나면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나이들어서 더 질높게 노는 시간를 가져라 등의 포인트이다.

과거의 친구

한국에서 10대 초반때 이민와 국민학교때 알던 친구들이 있다. 그나마 근 30년이 지나 인터넷으로 다시 연결된 친구가 몇몇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하지 지내서 그냥 존재만 인정하는 정도.

미국에서 국민학교 1년 그리고 중학교 2년을 다니며 가깝게 지내던 한인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난 지역에 동양인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백인 친구들만 많았던 과학고에 시험을 봐 합격되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때 죽마고우 처럼 가깝게 느겼던 한인 친구들과는 이별?을 하는 것 처럼 되었다. 사실 내가 다른 학교를 가게 되니 그들이 모여 놀때는 나를 좀처럼 끼워주지 않게 되었고 점점 멀어졌던 것 같다. 비록 교회는 꾸준히 다녔지만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누나 형들이었고 또래 나이에 있던 교회 친구들은 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너무 일찍이 미국에 이민와서 그랬는지 좀 벌러덩 “까진” 아이들이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교회 중고등부에서 이민온지 얼마안된 동생같은 아이를 매주 집에 대려다 주며 가깝게 지내는 친구아닌 친구가 생기게 되고 그랬다. 과학고에서 미국인 친구 몇몇과 대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 아이비리그로 빠지고 나는 신학교를 가는 바람에 또 그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이건 사실 미국 처럼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너무나 흔한 현상. 여기 저기로 대학들로 가다보면 다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이때 가족과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는 것이 미국의 일상이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다니며 KCCC에서 알게된 목사님들, 형들과 친구들. 시카고에 와서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들을 통해 사귀었던 친구들. 사실 내가 연락을 않해서 멀어진것이지 다시 연락하며 얼만든지 친구처럼 보낼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이런 많은 친구들 중에 나와 계속 꾸준히 연락하는 친구들은 다 그 때 가정 형편이 힘들고 마음에 상처들이 있던 친구들이었다. 나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나도 조금 놀란다. 내가 그렇게 그들을 위해 시간을 보냈던가?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를 했던 기억밖에 없다. 몇 시간이고 아파트 계단에 앉아 대화를 하며 기도해 주었던 기억들뿐. 오늘 날 이 몇몇 친구들은 나를 무슨 은인처럼 대하고 있지만 진정한 은인은 위에 계신 분이다.

현재의 친구

지금은 회사와 교회 그리고 검도 클럽이 있다. 회사에서는 딱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한인 지인이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고 나보다 2~3살 위인긴 한데 나름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라 좀 처럼 가까이 지내기는 쉽지 않다. 교회에서는 또래 30~40대가 별로 없다. 2~3명 있어도 다들 이민온지 별로 안되거나 삶이 너무 바쁜 사람들이어서 시간내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바쁜 것을 보면 이 나이때 사람들은 다 바쁜 시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교회에 대한 넋두리를 풀면 책한권이겠지만 시골 아닌 시골 같은 미국 도시에 살기로 한 이런 건 충분히 감수해야지 계속 밉상인 사람들을 밀어내면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제 교회가 문제가 없고 완벽했는가. 주신 사명 안에 바른 관점과 노력에 달린 것이지. 그냥 쉽게 벗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것도 그런것이 나같이 어릴 때 이민와 미국에서 교육받은 친구들은 다들 대도시에 있지 이런 외진 곳에 오지는 않는다. 20대 30대를 미주한인 청소년 사역에 불태운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정도 신경을 써야 해서 뭐 불태웠단 표현은 조금 과한 표현이란 생각도 들지만 무식하게 황야같은 한인교회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청소년 사역에 뛰어든 것을 뒤로 돌아보면 그런 표현도 적절하단 생각도 든다. 지금 사는 곳 근처에 미국에서 태어나 자신이 미국인이라 생각하고 자라고 한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는 친구 하나 있지만 그는 평생 돈만 벌면서 살아서 대화하면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을 느낀다. 그 도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교회도 안나간지 오래 된 것 같고 세상의 먼지가 가득히 느껴져 대화를 하다보면 나의 참을성만 계속 자극하는 것을 느낀다. 대화의 장벽, 문화의 장벽, 나이의 장벽, 경험의 장벽, 가치관의 장벽… 장벽 투성이겠지만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하겠느냐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들을 넘어 주는 것이 더 귀찮아졌다. 항상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친구를 대하는 것이 부담이지 않겠는가. 스스로도 조심해야 겠지만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실감이난다. 신나게 같이 모여 대화를 주고 받으며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는 칼 같은 말로 등에 비수가 꽂혔던 것 같았다. 무슨 자랑도 아니고 수수하게 그냥 대화 했다고 생각했는데 가르치는 느낌을 받았는지 상당히 싫었던 모양이다. 수십년 어린 학생들만 대한 나로서는 또래 사람들과 대화할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생님처럼 나온니 그냥 피하는게 더 편한 것 같다. 물론 과거에는 다들 무엇이라도 배우기에 갈급한 상태여서 가르치는 사람을 소중히 여겼을때가 있었지만 그런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시카고에 있을때도 또래 교인들이 모이고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일찍 떠나면 소주잔이 나오고 그랬는데 난 술은 못한다. 그래서, 비록 초청의 제스처였지만 일부러 나도 일찍 모임에서 나왔다. 같이 놀아주고 마셔주는것이 힘드니 가깝게 지내기가 쉽지 않은 건 당연지사.

전도사로 가정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주중에 컴퓨터 관련 일을 같이 평행으로 해왔다. 컴퓨터 관련 일은 국민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했으니 그건 30년, 평행은 20여년… 중년에 들어서면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전쟁에서 돌아온 전사같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다. 어느 목사가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다가오면 어떻게 시원히 답변해 줄 수 없다. 자신은 목사로서 정체성을 뚜렸히 습득했는지 몰라도 난 여러 목사들에게 받은 상처 투성이니 별로 설명해 주고 싶지도 않다. 그 들은 타인에게 또는 아내의 희생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그랬겠지만 난 타인의 도움없이 아내와 가정을 위해 일하며 학교를 다녔고 차 개스 돈을 아끼기 위해 매 금요일 부터 주일까지는 교회 책상위에서 수년동안 밤을 지냈다. 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간 것 뿐. 처음엔 그것이 청소년 사역인줄 알고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 인지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맡기고 중고등부 전도사가 나의 평생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 그리고, 같이 일했던 전도사들이 목사가 되기 위해 중고등부 사역을 신학도때만 하는 디딤돌로 여기고 졸업후 몇 년 후에 그냥 청년 그 다음 어른 목회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실망에 빠졌고 나는 목사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십년 이런 저런 사역자들을 만나며 늦게 깨닳은 것은 한인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이민 1세들의 교회다. 거기엔 한인 2세들이 설 곳 도 없도 설령 있다한들 그냥 “아이들” 사역이 되어버린다. 이런 배경에서 한인들 중 자신들의 자식에게 한국어까지 제대로 가르치는 가정은 별로 없다. 다들 세속적 성공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심으로 형성이 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런식으로 한인 교계가 세대가 지나며 발전이 없는 것은 목사들이 목사직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단 그냥 직업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神聖不可侵한 영역으로 줄을 그어서 그런 것 같다. 인간이면 누가 비판을 좋아하겠느냐만,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적으로 받아드리는 것보다 교계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드리면 더 건설적으로 발전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든다. 교인들을 자기 편만들기 수법으로 신성모독으로 포장을 한 후 사탄 마귀를 몰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을 몰아내는 쇼를 하는 치사스러운 목사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교회란 이런 지도자들이 反響窒을 만들어 그 효과로 발전없이 침체되기 때문이다. 큰 마음 또는 사랑을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대일로 직면하여 사람을 대하여 감명을 주었던 과거의 목사형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그냥 反響窒 만들기에 집착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외부에서 오는 비판들은 하나님도 안믿는 사람들이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치자, 그러나, 내부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차단시키면 그냥 스스로 완강해 지는 수 밖에 없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해 버리면 회개란 타인에게 필요한 설교 제목으로 전락한다. 이런 모습은 교역자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교단에서 더 많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목사는 목사끼리만 통하는 것들이 더 많으니 평생 교인탓을 하며 서로 잘못된 것들은 그냥 눈감아 주고 다독여 주면서 反響窒효과가 시너지효과와 더불어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니, 계속해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하고 목사들이 먹사라 불리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교회에서만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봐도 다른 단체에 비해 인력 미개발 지역처럼 느껴지는 곳이 교회이니 과거에 전쟁 후 아무것도 없었던 한국같은 상황에서야 교회가 사회를 인도하는 모습으로 보여졌던 것이었다. 아무튼, 나름 處士의정신으로 살기 시작한 것 같다. 士도 아닌 주제에 處士라 칭하는 것도 과분이라 생각되니 그냥 시골의 한줌의 土라 여겨 스스로 處土라 칭해야겠다. 歸原이라 할까.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19세기 西勢東漸으로 인해 근본없어진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대응에 대한 생각이 더 확고해진 것 뿐이라 뿌리를 찾아가 접목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검도클럽에서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과는 10여년 같이 연무를 이어오니 가족처럼 가까와 질 수 밖에 없다. 일주일에 두번 많았을 때는 세번씩 만나며 잠깐 잠깐 대화하며 서로 기분 나쁘게 할 일이 없이 같이 땀 흘리며 연무에 집중하니 그럴 수 밖에.

내가 오늘 죽으면 나의 장례식에 올 사람들은 수백명 수천명은 아니어도 멀리서도 비행기 값을 지불을 해서라도 올 친구들이 몇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 사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多岐亡羊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양극화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한 것들이고 사태가 터진 후로는 그저 가속화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까지 경제를 살려놓았다는 말은 맞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부채를 실질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마이너스 경제였다란 것과 그냥 외부적으로 비추기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ying)의 연속이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지 미국의 달러가 세계화된 화폐이어서 계속해서 경제의 모습이 띄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미국을 적대시 하는 북한에서 까지 미국의 달러가 기존화 되지 않았던가. 그 보이지 않는 위세만으로도 달러가 미국 경제를 계속 흘러가게 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이미 실속 경제란 것은 희미하게만 지속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는 또 어떠한가? 아무리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한들 여전히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같은 운동으로 시끄러워져 있고 비판적 사회정의 (critical social justice)의 깃발은 사회를 비합리적인 정치적 정당화(political correctness)운동으로 갈기 갈기 찢어놓고 있다. 경찰로 인해 죽는 흑인들의 숫자보다 직무중 죽고 있는 경찰의 숫자가 더 많고 흑인 동네에서 흑인들 서로가 죽이는 수가 훨씬 많지만 정치화된 이슈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슈가 되지 않는 것들을 극대화로 이슈로 만드는 썩은 대중 매체들의 정치 플레이에 바보들은 말려들어가고 있다.

이런 배경에 코로나로 세계가 앓고 있다. 세계경제포럼會는 바로 코앞에 大清零를 말하고 있고 잃을 것이 없는 그들은 전 세계가 다시 제구성되며 그들이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발정되어 있다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처럼 세계적 변화의 바람이 불때가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또 있었으며 그것을 다시 살펴 바르게 앞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西勢東漸의 문턱에 있던 조선역사에서 배울점은 온통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실패를 통한 서러운 배움으로 가득차 있는 반면에 40년 정도 빠르게 18세기 중턱에서 일본이란 나라는 대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하는 국면에 있어서 상당히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 처럼 보인다. 현대어에서 을씨년스럽다란 말이 사전에 들어갈 만큼 조선은 나라를 빼앗기는 서러움을 경험했지만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복의 꿈을 꾸며 이를 단기적으로 실행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을 키운 나라는 일본이란 나라였다. 일찍히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에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란 거인이 있었다. 그는 비록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업적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현제 재일 한국인 3세이며 세계32위 日재벌인 Softbank의 창업자인 손정의(孫正義)또한 자신의 회사의 로고를 사카모토 료마의 기업 Kaientai (海援隊) 로고를 그대로 가져와 일본인인 료마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서양국가들을 공부하여 일본의 전통적인 계급주의에 막을 내리고 일본 국회의 성립을 가능케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가 더 일찍이 하였던 것들이 더 큰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무라이 가문이지만 下士의 집안으로서 우리나라로 치면 반쪽양반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일본은 사회신분제도가 한국보다 더 엄격히 그리고 더 무섭게 지켜졌었다. 과거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양반 가문 출신이면 양반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반쪽 양반이면서 사회성만 좋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양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무리 사무라이(侍) 가문이라 하고 검술이 좋고 학문이 깊어도 下士집안 출신이면 上士집안 출신에게는 개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사회적 열등감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부터 료마(龍馬)는 귀중한 배움을 받는다. 첫 배움은 격노로 그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이룰 수 없다란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어린 자신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생명의 귀함을 배운다. 그 두가지의 배움이 그의 삶의 중심적인 역활을 해냈던 것 같다. 이때 중국의 아편전쟁의 대한 결과를 얼마전에 듣던 일본인들은 미국의 일방적인 함대사령관 페리의 방문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고 방문 이후에 일본은 매우 시끄러워졌다. 료마가 살고 있던 토사번 또한 같았다. 료마와 같이 성장한 친구들은 다 성인이 되고 차츰 다들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갈 당시 미국 페리의 방문으로 인해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고조 되가고 있었다. 존왕양이 정신의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下士들과 더 현실적으로 사태를 바라보았던 막부(幕府)와 막부를 지지하는 上士는 작은 불씨에도 활활 타올라 서로 목에 칼을 댈 수 있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지만 료마는 양쪽을 화해시킨다. 거듭 그는 상반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역활을 멋있게 해낸다. 사실 화해나 이해를 시켜 가까운 친구나 지인의 생명을 구한 것도 두번이나 된다. 侍의 특유의 야비한 책임전이로 자신의 하급인사에게 할복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료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구하는 일본식으로는 바보 같은 짓을 여러번 한다. 그러나, 위신앞에서는 생명을 파리같이 여기는 사무라이 중에서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뼈 깊이 믿는 료마는 가까운 친구들에게까지도 이상한 외계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만약 존왕양이 정신만을 가졌던 일본이었다면 활활 타오르면서 일본은 순식간 불타버리고 미국에게 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동력을 더 건설적인 흐름으로 가게 한 것이 료마의 더 큰 공인 것이다.

지금의 한국을 보면 정치적으로 다시 양극화된 시대에 들어간 것 같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중간정도 되는 나라에 속하지만 대국들 사이에서는 사실 한국은 보잘것 없는 나라다. 한국 뉴스를 대하면 마치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사실 미국 전략 리포트나 외국의 관점에서는 한국은 15~20 번째의 관심에 드는 위치에 있다. 즉 외국의 시각으로는 다 중국을 촛점이 가있고 한국은 그냥 부차적인 관심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대한민국은 얼마든지 북한과 같이 없어질 수 있는 상황에 금방 놓일 수 가 있는 것이다. 오늘 평양에 핵무기가 떨어지면 서울은 불가피하게 후유증을 같이 겪게 된다. 한국에서 미군이 다 빠져나와도 미군의 관점에서는 오키나와 기지가 있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전략에 그리 큰 차질이 없다. 한국이 미국이 필요한 것이지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한 적이 없다. 마치 18세기의 중국, 일본과 같이 서양 나라 들에게는 별볼일 없는 나라였다면 지금의 한국은 그 때보다 더 빈약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 때는 조선이란 땅 덩어리가 하나였는데 지금은 분단 국가다. 그리고 분단 국가인데다가 그 속을 드려다보면 조선 말기처럼 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파 저파로 다 나누어져 있다. 국력이 바닥난 상태란 것이다. 딱 잡아 먹히기 좋은 상태란 말이다. 坂本龍馬같이 화해와 다리 역활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더 없이 필요한 나라가 지금의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