繪事後素

原: 論語, 八佾/8
子夏問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謂也?」子曰:「繪事後素。」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

繪事後素(회사후소,huìshìhòusù,かいじこうそ), painting work after white
Horse before carriage. Essentials or canvas come first before formalities or decorations.

This is from a passage where Gong-ja reminds his disciples that a person ought to develop his character first before adding on other stylistic things (文飾).

Jaha (字: 子夏, 卜商) asked, “What does this text mean? ‘Dimples from a beautiful smile are pretty, pupils from beautiful eyes are clear. It is like painting with white silk (素以爲絢).'” Gong-ja (孔子) replied, “You paint after you prepare a white canvas (繪事後素).” To which, Jaha asked again, “So etiquettes/formalities (禮) come after?” And at this, Gong-ja expressed his great pleasure with Jaha’s reply and said that he is now ready to discuss poetry (詩).

Jaha realized that formalities (depicted as a painting (絢)) are expressions of the heart (depicted as a white canvas (素)), and the principle of poetry is the same. This is why Gong-ja praised his reply, and considered him ready to discuss poetry.

The mainstream interpretation of this was reinforced by Zhu-ja (朱子, 朱熹, 1130-1200) of Song (宋) dynasty, but a different interpretation was given earlier during later Han (漢) dynasty by Jung Hyeon (鄭玄, 127-200) who read this as painting white (素) after painting with colors (繪), so as to filling in the spaces between colors with white.

愚公移山

原: 列子, 湯問

太形、王屋二山,方七百里,高万仞。本在冀州之南,河阳之北。北山愚公者,年且九十,面山而居。

愚公移山(우공이산,yúgōngyíshān,ぐこういざん), Wu-gong moves mountains
No matter how difficult, it can be done with persistence and diligence

There lived a 90-year old man named Wu-gong (愚公) whose residence was between two tall mountains, Mt. Tae-haeng (太行山) and Mt. Wang-ok (王玉山). He’s always found it difficult to travel to and fro other towns, so he gathered his family members to discuss creating a level road all the way to Ye-ju (豫州) and south of Han-su (漢水). However, his wife objected saying how an old man like him would be able to remove the dirt from the mountain and where to put the dirt, and to this, he replied nonchalantly, “I’ll just dump it in the Bohai Sea (渤海).”

Soon, Wu-gong with his three sons and grandsons started working. It was no easy task, since the travel to dump dirt at Bohai Sea would take a year. One day, an old friend Ji-su (智叟) tried to persuade Wu-gong to stop the work because of the age. To this, Wu-gong simply replied that his sons will carry out the work, and then his grandsons, and then later generations will continue the work until two mountains disappear. Ji-su went away shaking his head, however, the mountain spirit (蛇神) guarding those two mountains were shocked to hear this, and reported this to the Jade Emperor (玉皇上帝, aka God of Heaven). He was moved by Wu-gong’s persistence, and ordered to relocate Mt. Tae-haeng to Sak-dong (朔東) and Mt. Wang-ok to Ong-nam (雍南).

(蛇足: This is why they say there used to be two mountains in Gi-ju (冀州) but nowadays, there is not even a small hill there.)

一以貫之

原: 論語, 里仁/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子出。門人問曰:「何謂也?」曾子曰:「夫子之道,忠恕而已矣。」

原: 論語, 衛靈公/3
子曰:「賜也,女以予為多學而識之者與?」對曰:「然,非與?」曰:「非也,予一以貫之。」

一以貫之(일이관지), one [/with] through/[threaded] — understanding many through one or a grand principle

From Yi-in (里仁): Gong-ja (孔子) said, “Sam (參, 曾子), my way is through only one thing.” To which, Jeung-ja  (曾子) replied, “Yes, indeed.” After Gong-ja left the room, literati (門人) asked Sam what the master meant. Jeung-ja answered, “My master’s way is only of faithfulness (忠, as being wholehearted) and compassion (恕, as in compassionate understanding of others).”

From Wi-ryeong-gong (衛靈公): Gong-ja asked Sa (賜, 字: 子貢), “Do you see me as someone learned in many things, and be able to recall them well?” Ja-gong (子貢) replied, “Yes, are you not?” Gong-ja answered, “No, I merely see all things through one.”

It’s debatable as to what this penetrating through one thing (一以貫之) may truly mean, but one way to understand this is that, as already mentioned, faithfulness and compassion is a mere way to achieve this, and looking through the greater context it’s only natural to interpret humaneness (仁) as the way (道) through which all things can be reflected on.

濫觴

原:  孔子家語, 三恕/10

子曰: 由!是倨倨者何也?夫江始出於岷山,其源可以濫觴 …

濫觴 (남상), [enough to] run over a small glass [for liquor]

A warning to disciple, Jaro (仲由, 字: 子路), who once showed off a fancy dress. Gong-ja (孔子) reminded him that the source of a great river Yang-ja (楊子江) is no more than enough to run over a small glass.

갚아야 할 빚만 있는 삶

인생의 추억의 안개속 뒤를 바라보면

빚진 것 밖에는 보이지 않네

무관심속에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었어야 할 인생이었고

십자가의 은혜도 채험하지 못하다 방황하다 죽었을 인생이었으나

내가 무엇이라고 이리도 넘치고 넘치는 큰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

배푼 은혜보다 받은 은혜가 더 많았고

줄 수 있었던 기회가 없던 사람들에게 선물과 축복을 받았으니

지금의 오해들 쯤이야

지금의 외로움 쯤이야

지금의 따분한 쯤이야

얼마든지 참고 갈 수 있으리

그들에게 빚을 다시 갚으리

받은 은혜보다 받은 축복보다

몇십배 몇백배 다시 배풀어 줄려면

지금보다 몇십배 몇백배 더 부지런히 살아 열매를 맺어야 하네

아브라함과의 언약

On the salvific economy of God according to His eternal covenants

느부갓네살왕을 봐도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들을 욕되게 한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대로였다. 하나님께서 영원하다 하며 맺은 언약이 (창 17:7) 영원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일시적으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말씀 그대로 이해한 것을 지금와서 선택적 해석법은 무엇인가? 비록 전통적으로 대체주의가 받아졌지만 성경말씀의 바른 이해의 기준위에 다시 바로 잡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체주의가 독일 나치들의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 시킨 제일 큰 원동력이었다. 그 참사를 이어 1948년 5월 14일의 기적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성경에서 계속 약속하셨던 것들의 진행형 성취에 불과한데 이것도 무시하면 마치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약속을 어기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이상한 짓에 해당되지않는가? 신약의 새로운 언약은 구약의 언약의 진행적인 성취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Heb 8:13 의 κατάρας ἐγγύς 또한 서서히 없어질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장들을 통한 희생을 요구하는 부분에 있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12절에 죄에 대한 용서가 더 이상 구약의 언약에 바탕을 둔 희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새언약에 바탕을 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벽한 희생이지만 13절을 완성형으로 잘못 이해한 중점으로 대체주의로 이끌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관계에서는 아직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아직 이루실 것들 많이 남아있다. 사도 바울의 경고 또한 잊으면 않된다. 그의 신학원리에서도 이방인 교회는 접목된 지체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의 이해가 제일 성경적인 이해라 말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큰 반감을 가졌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을 포함한 이방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대체신학을 형성하였다.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이것을 대체적인 의미까지로 적용되는 것은 성격에서 적용하는 범위 밖으로 나간 것으로 봐야 한다. 정통적으로 고집해 왔던 신학원리가 비성경적이라면 끼워 맞추기로 해석학을 적용하지는 말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몸통과 가지는 바르게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3

Jeremiah 31:15-26

A problematic interpretation of this passage was spotted. This is a dream of Jeremiah, the prophet receiving vision from the Lord of what would come to be fulfilled. The verses from 15 and down are interpreted in plain sense to refer to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i.e. figurative speech of Ephraim referring to them.) However, on the promise of God to restore and gather them back into their land, the interpretive lens is selectively replaced with overriding assumption of the interpreter — that is of the supersessionism. Here, instead of a normative exegetic principle, a clear instance of eisegesis goes on, by imposing the supersessionic idea on verse 23.

중년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직장 상사때문에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는가? 다른 곳에 간다 해도 별 차이가 없을 확율이 상당히 높단다. 네가 상사가 되어 아무리 잘할려고 노력해도 너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는 부하직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같은 경제 불황 시기에 옮길 생각이나 그만 둘 생각은 말고 그냥 좀 더 참자. 너 같은 어려운 인간을 대하는 상사도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상사를 대하라. 그러면, 괴롭히는 상사도 이해할 수 능력이 생길 것이다.

친구들은 대학 교수이고 돈 잘버는 직장에 다니며 다들 나름 삶에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데 너 자신만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져 우울한가? 너의 고조부님의 성함은 기억하는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안다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렇다, 우린 잠깐 있다 없어지고 잊혀질 이슬과도 존재인데 명예를 가지고 있고와 돈이 있고 없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늘에 앉아 계신 분 앞에서 살아라. 진정 인생이 개와 소와 같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라 믿으면 한 순간 더 살아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정한 믿음은 영원을 바라며 사는 것이고 고로 진정한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그것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친구들과 비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너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주신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충실히 행하는지 보고 계신다. 밥먹듯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눈감고 아옹거리며 하나님을 속이고 사는 쓰레기같은 삶은 청산하고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을 솔직히 사는 것 — 그것을 첫 걸음으로 만들어라.

진정한 친구가 없어 한탄하고 있는가? 그럼 남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라. 오래된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어라. 나이들어 귀찮게 하지 말고 가시같은 말은 삼가하고 항상 격려의 말과 그 사람에게 덕이 되는 말만 해주어라. 하소연 할 친구가 필요하면 만날 기회도 없고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편지를 써라. 그런 친구도 없으면 과거에 지나갔던 친구에게 편지를 써라. 주소를 모르면 그냥 주소쓰지 말고 우체통에 넣어라.

사람들 눈 피해서 야동을 보고 있는가? 사람들 눈피한다고 하나님이 안보고 계시냐? 그럴 시간과 힘이 남아돌면 차라리 땀 흘리는 운동을 해서 에너지를 바르게 소비하라. 요즈음 전화기는 전화기가 아니고 어른들을 위한 고무 젖꼭지이다. 언제까지 젖꼭지 물고 살것인가? 인간이면 인간답게 화면보단 사람과 교감하며 대화하고 아내가 있으면 아내를 아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랑해 주어라. 스스로의 욕구를 일부러 자극시키지 말라. 인간의 마음은 구멍뚤린 그릇 같아서 만족이란 없고 욕구를 달랠 수록 오히려 사람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작은 것에서 부터 자제력을 키우고 더 인간다워져라. 전화기 붙들고 살지 말고 책을 잡아라. 책에 있는 것들이 더 질높은 것들이다. 오래된 책을 더 많이 읽어라.

아내보단 다른 여자가 눈과 마음에 들어오고 있는가? 아직도 여자에게 미련이 있는가? 동물적 감각은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라. 불에 뛰어들어 다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신만 다치냐? 너에게 붙어 온 집이 불타오른다. 불태울려면 방탄소년단에나 가입해서 춤이나 쳤서야지 지금 아재가 되어 뭣 하는 미친짓이냐? 그건 미친 정도가 아니고 더한 수준이다. 미친짓 한다고 무슨 답이라도 나올 것 같냐? 아직 그 만큼 여자에 대해 모른다면 넌 그냥 단순 무식한것이다.

돈이 많이 드는 사치스런 취미는 그만해라. 그 돈 모아 더 유익한데 쓰던지 아니면 선교 헌금이나 해라. 돈 많이 안쓰고 시작 할 수 있는 취미가 널린 세상이다. 언어를 배우고 싶냐? 인터넷에 널려있다. 역사를 배우고 싶냐? 인터넷에 널려있다. 운동을 하고 싶냐? 그냥 밖에서 꾸준하게만 뛰고 집에선 쌀가마로 근육을 키워라. 집에만 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게으른 㖈들이다.

중년이 되면 최소한 자신의 몸, 인생 하나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면 노답이다. 이것도 모잘라 이 나이때까지 남 뒷바라지나 바라며 아내 피빨아 먹으며 양심도 없이 기대하는 기생충 인생도 많아진 시대라 그것을 괜찮다고 생각하고 산다면 노답 곱하기 투다. 이 시점에 술이나 마약에 빠져서 바닥을 해매고 있으면 기적이 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 봐야한다. 출신, 배경, 가족 탓하지 말고 환경 탓하지 말고, 사회 탓하지 말라. 자존심 때문에 네 생각에 걸맞는 직위아니면 일하지 못하는 사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무슨 이씨 왕가의 외동아들이냐? 어디서 배워먹은 찌질이 정신이냐? 인생은 그냥 낙을 누리며 사는 병맛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았으면 이제 정신 리셋하고 바르게 살아라.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선생이나 선배같은 사람이 인도해 주는 것 같으면 자존심 세우지 말고 너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 처럼 매달려 알려주는대로 순종하라. 마흔 중반 될때까지 방황하다 정신 차리고 사람 구실하나 했던 지인은 직접 자신에게 하지도 않았던 비난 한마디 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지 혼자 또 다시 엉뚱한 곳으로 빠지더라. 그런 희미한 결단가지고는 사나이가 무엇을 하겠느냐? 지금 철저히 회계하고 정신 차려 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귀해지는 친구

이호선 교수의 세바시 비디오를 보고 나름 생각해 본다.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에 시공간을 같이 지내며 가까웠던 친구는 버리지 말고 더 자주 연락하면 지내야 하며 만나면 싫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현제의 친구들, 즉 회사에서, 클럽에서,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미래를 같이 만들어갈 친구들이라 내 주머니에 현금과 같은 사람들이고 미래의 친구들은 과거와 현제의 친구들을 통해 만들어져가는 귀한 인맥들이 된다고 한다.

나이들어 사귀는 친구들과 사진을 많이 찍으라고 한다. 초청을 받으면 항상 받아드리고 가라는 것. 배려, 동정, 공유,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청에 수락하는 것들이 좋은 친구의 특징들. 그리고, 어디 여행을 가게 되면 비록 그 장소에 가까운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고 지나간다라고 소식을 꼭 전해 주어야 한다. 만나면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나이들어서 더 질높게 노는 시간를 가져라 등의 포인트이다.

과거의 친구

한국에서 10대 초반때 이민와 국민학교때 알던 친구들이 있다. 그나마 근 30년이 지나 인터넷으로 다시 연결된 친구가 몇몇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하지 지내서 그냥 존재만 인정하는 정도.

미국에서 국민학교 1년 그리고 중학교 2년을 다니며 가깝게 지내던 한인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난 지역에 동양인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백인 친구들만 많았던 과학고에 시험을 봐 합격되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때 죽마고우 처럼 가깝게 느겼던 한인 친구들과는 이별?을 하는 것 처럼 되었다. 사실 내가 다른 학교를 가게 되니 그들이 모여 놀때는 나를 좀처럼 끼워주지 않게 되었고 점점 멀어졌던 것 같다. 비록 교회는 꾸준히 다녔지만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누나 형들이었고 또래 나이에 있던 교회 친구들은 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너무 일찍이 미국에 이민와서 그랬는지 좀 벌러덩 “까진” 아이들이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교회 중고등부에서 이민온지 얼마안된 동생같은 아이를 매주 집에 대려다 주며 가깝게 지내는 친구아닌 친구가 생기게 되고 그랬다. 과학고에서 미국인 친구 몇몇과 대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 아이비리그로 빠지고 나는 신학교를 가는 바람에 또 그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이건 사실 미국 처럼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너무나 흔한 현상. 여기 저기로 대학들로 가다보면 다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이때 가족과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는 것이 미국의 일상이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다니며 KCCC에서 알게된 목사님들, 형들과 친구들. 시카고에 와서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들을 통해 사귀었던 친구들. 사실 내가 연락을 않해서 멀어진것이지 다시 연락하며 얼만든지 친구처럼 보낼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이런 많은 친구들 중에 나와 계속 꾸준히 연락하는 친구들은 다 그 때 가정 형편이 힘들고 마음에 상처들이 있던 친구들이었다. 나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나도 조금 놀란다. 내가 그렇게 그들을 위해 시간을 보냈던가?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를 했던 기억밖에 없다. 몇 시간이고 아파트 계단에 앉아 대화를 하며 기도해 주었던 기억들뿐. 오늘 날 이 몇몇 친구들은 나를 무슨 은인처럼 대하고 있지만 진정한 은인은 위에 계신 분이다.

현재의 친구

지금은 회사와 교회 그리고 검도 클럽이 있다. 회사에서는 딱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한인 지인이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고 나보다 2~3살 위인긴 한데 나름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라 좀 처럼 가까이 지내기는 쉽지 않다. 교회에서는 또래 30~40대가 별로 없다. 2~3명 있어도 다들 이민온지 별로 안되거나 삶이 너무 바쁜 사람들이어서 시간내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바쁜 것을 보면 이 나이때 사람들은 다 바쁜 시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교회에 대한 넋두리를 풀면 책한권이겠지만 시골 아닌 시골 같은 미국 도시에 살기로 한 이런 건 충분히 감수해야지 계속 밉상인 사람들을 밀어내면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제 교회가 문제가 없고 완벽했는가. 주신 사명 안에 바른 관점과 노력에 달린 것이지. 그냥 쉽게 벗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것도 그런것이 나같이 어릴 때 이민와 미국에서 교육받은 친구들은 다들 대도시에 있지 이런 외진 곳에 오지는 않는다. 20대 30대를 미주한인 청소년 사역에 불태운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정도 신경을 써야 해서 뭐 불태웠단 표현은 조금 과한 표현이란 생각도 들지만 무식하게 황야같은 한인교회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청소년 사역에 뛰어든 것을 뒤로 돌아보면 그런 표현도 적절하단 생각도 든다. 지금 사는 곳 근처에 미국에서 태어나 자신이 미국인이라 생각하고 자라고 한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는 친구 하나 있지만 그는 평생 돈만 벌면서 살아서 대화하면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을 느낀다. 그 도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교회도 안나간지 오래 된 것 같고 세상의 먼지가 가득히 느껴져 대화를 하다보면 나의 참을성만 계속 자극하는 것을 느낀다. 대화의 장벽, 문화의 장벽, 나이의 장벽, 경험의 장벽, 가치관의 장벽… 장벽 투성이겠지만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하겠느냐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들을 넘어 주는 것이 더 귀찮아졌다. 항상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친구를 대하는 것이 부담이지 않겠는가. 스스로도 조심해야 겠지만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실감이난다. 신나게 같이 모여 대화를 주고 받으며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는 칼 같은 말로 등에 비수가 꽂혔던 것 같았다. 무슨 자랑도 아니고 수수하게 그냥 대화 했다고 생각했는데 가르치는 느낌을 받았는지 상당히 싫었던 모양이다. 수십년 어린 학생들만 대한 나로서는 또래 사람들과 대화할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생님처럼 나온니 그냥 피하는게 더 편한 것 같다. 물론 과거에는 다들 무엇이라도 배우기에 갈급한 상태여서 가르치는 사람을 소중히 여겼을때가 있었지만 그런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시카고에 있을때도 또래 교인들이 모이고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일찍 떠나면 소주잔이 나오고 그랬는데 난 술은 못한다. 그래서, 비록 초청의 제스처였지만 일부러 나도 일찍 모임에서 나왔다. 같이 놀아주고 마셔주는것이 힘드니 가깝게 지내기가 쉽지 않은 건 당연지사.

전도사로 가정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주중에 컴퓨터 관련 일을 같이 평행으로 해왔다. 컴퓨터 관련 일은 국민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했으니 그건 30년, 평행은 20여년… 중년에 들어서면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전쟁에서 돌아온 전사같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다. 어느 목사가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다가오면 어떻게 시원히 답변해 줄 수 없다. 자신은 목사로서 정체성을 뚜렸히 습득했는지 몰라도 난 여러 목사들에게 받은 상처 투성이니 별로 설명해 주고 싶지도 않다. 그 들은 타인에게 또는 아내의 희생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그랬겠지만 난 타인의 도움없이 아내와 가정을 위해 일하며 학교를 다녔고 차 개스 돈을 아끼기 위해 매 금요일 부터 주일까지는 교회 책상위에서 수년동안 밤을 지냈다. 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간 것 뿐. 처음엔 그것이 청소년 사역인줄 알고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 인지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맡기고 중고등부 전도사가 나의 평생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 그리고, 같이 일했던 전도사들이 목사가 되기 위해 중고등부 사역을 신학도때만 하는 디딤돌로 여기고 졸업후 몇 년 후에 그냥 청년 그 다음 어른 목회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실망에 빠졌고 나는 목사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십년 이런 저런 사역자들을 만나며 늦게 깨닳은 것은 한인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이민 1세들의 교회다. 거기엔 한인 2세들이 설 곳 도 없도 설령 있다한들 그냥 “아이들” 사역이 되어버린다. 이런 배경에서 한인들 중 자신들의 자식에게 한국어까지 제대로 가르치는 가정은 별로 없다. 다들 세속적 성공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심으로 형성이 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런식으로 한인 교계가 세대가 지나며 발전이 없는 것은 목사들이 목사직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단 그냥 직업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神聖不可侵한 영역으로 줄을 그어서 그런 것 같다. 인간이면 누가 비판을 좋아하겠느냐만,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적으로 받아드리는 것보다 교계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드리면 더 건설적으로 발전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든다. 교인들을 자기 편만들기 수법으로 신성모독으로 포장을 한 후 사탄 마귀를 몰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을 몰아내는 쇼를 하는 치사스러운 목사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교회란 이런 지도자들이 反響窒을 만들어 그 효과로 발전없이 침체되기 때문이다. 큰 마음 또는 사랑을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대일로 직면하여 사람을 대하여 감명을 주었던 과거의 목사형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그냥 反響窒 만들기에 집착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외부에서 오는 비판들은 하나님도 안믿는 사람들이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치자, 그러나, 내부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차단시키면 그냥 스스로 완강해 지는 수 밖에 없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해 버리면 회개란 타인에게 필요한 설교 제목으로 전락한다. 이런 모습은 교역자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교단에서 더 많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목사는 목사끼리만 통하는 것들이 더 많으니 평생 교인탓을 하며 서로 잘못된 것들은 그냥 눈감아 주고 다독여 주면서 反響窒효과가 시너지효과와 더불어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니, 계속해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하고 목사들이 먹사라 불리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교회에서만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봐도 다른 단체에 비해 인력 미개발 지역처럼 느껴지는 곳이 교회이니 과거에 전쟁 후 아무것도 없었던 한국같은 상황에서야 교회가 사회를 인도하는 모습으로 보여졌던 것이었다. 아무튼, 나름 處士의정신으로 살기 시작한 것 같다. 士도 아닌 주제에 處士라 칭하는 것도 과분이라 생각되니 그냥 시골의 한줌의 土라 여겨 스스로 處土라 칭해야겠다. 歸原이라 할까.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19세기 西勢東漸으로 인해 근본없어진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대응에 대한 생각이 더 확고해진 것 뿐이라 뿌리를 찾아가 접목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검도클럽에서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과는 10여년 같이 연무를 이어오니 가족처럼 가까와 질 수 밖에 없다. 일주일에 두번 많았을 때는 세번씩 만나며 잠깐 잠깐 대화하며 서로 기분 나쁘게 할 일이 없이 같이 땀 흘리며 연무에 집중하니 그럴 수 밖에.

내가 오늘 죽으면 나의 장례식에 올 사람들은 수백명 수천명은 아니어도 멀리서도 비행기 값을 지불을 해서라도 올 친구들이 몇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 사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